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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운석 장면 박사 묘비문 박종화(朴鍾和) 형산(荊山)의 흰 옥(玉)은 그 빛깔이 본시 조촐하고 깨끗하거니와 부서질 때 그 소리 더 한층 맑고, 깨끗하고, 여수(麗水)의 황금(黃金)은 그 광채(光彩) 본디 찬란(燦爛)하거니 떨어질 때 그 음향(音響)이 더욱 쟁연(錚然)하게 세상을 진동하는 법(法)이다. 전(前) 국무 총리(國務總理) 운석(雲石) 장면(張勉) 요한 박사(博士)가 서기(西紀) 1966년(一九六六年) 6월(六月) 4일(四日)에 홀연 명륜동(明倫洞) 자택(自宅)에서 세상을 떠나니 가족(家族)들의 슬픔은 말할 것 없고,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슬퍼했다. 공(公)의 백옥(白玉) 같은 몸가짐을 아까워하고, 공(公)의 황금(黃金)같이 빛난 업적을 돌이켜 생각했던 것이다. 정부(政府)와 국회(國會)는 공(公)의 장의(葬儀)를 국민장.. 더보기
고(故) 요한 장면 박사 묘비 제막에 붙여 - 이효상 이효상(李孝祥, 국회 의장) 슬프다. 선생이 떠나신 지 벌써 반년이 지남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당신의 모습이 사라지는 듯하옵니다. 세상의 인심이란 이렇게 야박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편 당신이 영원한 행복 속에 들어가 계시니 모두들 안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평생에 닦으신 길은 비록 외롭고 고된 길이었으나, 주님의 성의에 맞갖은 길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었어도 겸손하고 인자하기만 하였고, 그렇게 큰 권력을 가졌어도 자기를 버리고 남의 자유만 무척 존중하였다는 것은 당신의 굳은 신앙에서 우러나온 당신으로서 가장 마땅한 일이라 믿어졌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당신의 무덤 앞에 모여 묘비를 세우고, 또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이 당신의 .. 더보기
묘비 제막식 개회사 - 양일동 양일동(梁一東, 전 국회 의원)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은 공사간 다망하심에도 불구하시고 고 운석 선생 묘비 제막식을 위하여 이처럼 먼 거리까지 왕림하여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경애하는 운석 선생께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종하신 지 어언 5개월이 지났습니다. 지난 6월의 국민장의는 선생의 유덕(遺德)을 힘입어 많은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엄수되었습니다마는, 선생께서 가신 후 일월이 바뀔수록 추모의 정이 새로워지는 것은 선생의 생전이 얼마나 값지고 향기로웠던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는 바입니다. 선생이 나라에 끼치신 공적과 한 인간으로서의 깨끗하고 진실한 평생은 우리의 가슴속에 길이 살아 있을 것이며, 후세 자손들의 심금을 울릴 것입니다. 국민장의를 맡아 집행하였던 우리들은 운석 선생의 고.. 더보기
하느님께 맡긴 ‘영욕과 실의’ - 현석호 곡(哭) 운석 장면 박사 - 현석호(玄錫虎, 전 국방 장관) 오호! 운석 장면 박사는 가셨다. 평생의 염원인 진정한 민주 정치 실현의 꿈을 펴지 못한 채 홀연히 가신 선생의 영전에서 이제 우리는 충격과 비통함을 누를 길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하는 길이지만, 나라와 동지를 누구보다도 아끼시던 선생이 운명하시고 보니 이제 우리에게는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허탈과 슬픔만이 남았을 뿐이다. 선생은 신앙을 그대로 생활화한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우리 헌정사에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참된 민주 정치의 실현가이었다. 온건하면서도 다정한 외유 내강의 성품과 덕망에 누구나 심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원칙에서 추호도 탈선하지 않는 철저한 신념과 용기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돌이켜보건대 선생이 .. 더보기
천국에 계신 장 박사님께 - 최염열 최염열(崔廉烈) “천국에 가려면 며칠 걸리느냐?”는 물음에, “천당은 닷새 걸려….” “왜?” “예수 승천에서 성령 강림까지 10일간 걸렸으니까. 그것은 왕복이요, 가기만 하자면 5일이 걸리지 않겠느냐”라고 유머러스하게 교리 강의에서 재담하시더니, 실지로 천당에 가시자니 며칠이 걸리시던가요? ‘오주 예수’를 ‘오호! 주 예수’ 하며, 가톨릭의 도어를 노크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사온데 이제 또한 박사님, 우리를 뒤로 하고 먼저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 인자한 모습 눈에 선하며, 그 양양한 말씀 귀에 삼삼하여 부르면 응답하실 듯 내밀면 손에 잡힐 듯 애절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박사님, 백 권 책을 백독하고서,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하겠다고 하면서 박사님께서 빌려 온 책이며.. 더보기
오호(嗚呼) 운석 장면 선생 - 최석호 최석호(崔奭浩, 신부) 운석 장면 박사가 서거하였다. 마치 믿음직스럽게 튼튼한 바위와도 같이 우리 교회 생활권 내에 우뚝 솟아 있던 존재라 이미 장례까지 끝난 오늘날에도 그분의 죽음은 선뜻 곧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분은 결코 전면에 떠들썩하게 나서지 않는다. 항상 은근히 뒤에 숨어서 어떤 때는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겸손하게 저 만큼 후면에 나가 앉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 겸손하고, 성실하고, 품위 높고, 부드럽고, 근엄한 시선은 잠시도 끊이지 않고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각에도 운석 선생은 아직 명륜동 자택에 앉아서 사랑과 근심으로 우리 교회를 바라보고 계신 것만 같다. 그러나 운석 선생은 가시었다. 그 근심과 사랑에 사무치는 시선은 우리에게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더보기
장면 박사 서거를 애도함 - 조재천 조재천(曺在千, 전 법무 장관) 1966년 6월 4일 하오 4시 50분 ‘자유 민주의 별’이 또 하나 떨어진 슬픈 시각입니다. 운석 선생의 마지막 숨결을 지켜 본 재천은 옷깃을 여미며 영전에 엎드려 웁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하고, 또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지만, 막상 선생께서 운명하시고 보니 진정코 사실로 믿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 전까지도 느낄 수 있었던 따스한 호흡이 멎어지셨다니 놀랍고 슬픈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정치적 생애는 형극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시어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으시고, 자유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준행하는 정치적 선각자로서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서서 불의와 독재와 싸우셨습니다. 개인적 폄핍(貶乏)을 .. 더보기
오직 양심의 자유를 추구 - 김영선 곡(哭) 장면 박사 - 김영선(金永善, 전 재무부 장관) 운석 장면 박사가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그분과 고락을 함께 했던 나의 슬픔은 말할 길이 없다. 그분은 분명히 위대한 인격을 소유자였다. 국내에서 농학을 공부하다가 미국에서 철학을 연구한 그분의 가장 큰 염원은 인간의 영혼을 구령하는 데 있었다. 또 하느님이 주신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있었다. 그분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살아오셨으며, 이를 토대로 인간 사회에 민주 질서를 확립하고 민주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생애를 바친 분이다. 때문에 그분은 결단성이 없는 유약한 인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분처럼 강한 이가 드물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인간이 갑옷 입고 투구를 써야만 강한 것인가? 너그럽고 부드럽게, 화를 입어도 결코 보복을 않는 .. 더보기
운석 장 박사를 애도함 - 김도연 김도연(金度演, 전 국회 의원) 이제 존경하는 외우(畏友) 장면 박사의 부음에 접하고 보니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나는 그가 오래 살아서 이 나라를 위해 좀더 일을 해주기를 바랐는데, 이제 그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허전한 마음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고(故) 장 박사와 나의 교분은 해방 후 그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 때에도 교육가, 종교가로서의 그의 명망은 지실(知悉)하고 있었으나, 그때는 직접적인 교분은 없었다. 해방 후 고하(古下), 설산(雪山), 인촌(仁村) 선생 등과 한민당(韓民黨)을 창당할 때 장 박사에게도 입당을 교섭했으나, 그는 교회 일 관계로 입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 박사는 민주 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 과도 입법 의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더보기
장면 박사의 서거를 슬퍼한다 - 가톨릭 시보사 국가 민족과 교회에 공헌한 위업을 추모하며 - 가톨릭 시보사 지난 4일 새벽, 병세의 악화로 혹시나 하고 두려워했던 그대로 요한 장면 박사는 드디어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목메어 눈물짓는 각계의 인사들과 모든 국민들의 애도와 함께 우리도 그의 서거를 슬퍼하면서, 하늘에서 또 하나의 별이 떨어진 것처럼 우리 민족의 손실을 뼈아프게 절감하는 바이다. 그는 70평생을 조국을 위해서 바쳤고, 그의 일생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으며, 그는 또한 일생을 교회를 위해서 바친 사도직의 귀감이 되었었다. 티 없는 우리 민족의 정치인이었고, 그리스도의 정신에 충만된 진실한 가톨릭인이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 온 그이, 우리 교회를 지켜 온 그분의 경력은 너무나 다채롭다. 민족적으로 볼 .. 더보기
장면 박사의 국민장 - 한국일보 한국일보 지난 4일 향년 67세를 일기로 별세한 장면 박사의 장례식이 오늘 국민장으로 엄수된다. 그의 유가족과 친지와 많은 국민들이 슬퍼하며 애도의 뜻을 표하는 가운데, 한 조용하고 애국적인 민주주의 지도자였던 장면 박사는 세인과 유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전 부통령이요, 제2 공화국의 국무 총리였던 그는 교육가로서 정치가로서 그리고 진실한 종교인으로서 순결하고도 고매한 인품을 지니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성실하게 봉사해 왔었다. 건국 초에는 유엔 총회 한국 수석 대표로 파견되어 유엔으로부터 한국 승인을 얻는 데 활약했었고, 6·25 동란 시에는 주미 대사로서 또는 국무 총리로서 국가 방위에 불후의 공적을 남겼다. 그 후 재야 보수 정치 세력의 지도자로서 민권 투쟁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대열에 .. 더보기
장면 박사의 서거 - 중앙일보 중앙 일보 제2 공화국의 국무 총리였던 장면 박사가 지난 4일 지병인 간장염으로 자택에서 운명했다. 그는 5·16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나날을 조용한 신앙 생활로 지내다가 끝내 서거했기 때문에, 그의 지난날의 화려했던 정치적 생애는 세인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 민국을 수립하고 육성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 민주 정치를 신장하는 데 있어서 그가 남긴 업적은 불후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건국 초 유엔 총회 수석 대표로 파견되어 유엔으로부터 한국의 승인을 얻는 데 크게 활약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에는 주미 대사로서, 혹은 국무 총리로서 국가 방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후에는 재야 보수 세력의 지도자로서 민권 투쟁과 자유 수호에 앞장섰었다. 제2 공화국 내각 책임제하의.. 더보기
장면 박사의 서거를 애도 - 조선일보 조선일보 1 전 부통령이요, 제2 공화국의 국무 총리였던 장면 박사가 향년 67세로 아깝게도 서거했다는 비보는 그의 가족, 친지, 측근자는 물론 많은 시민들의 마음을 슬픔 속에 잠기게 하고 있다. 교육자로서, 정치가로서, 그리고 종교인으로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해방 이후 격정과 술책과 부패로 가득 찼던 우리 나라 정계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순결성을 견지해 온 지도자였음은 극단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도 시인하는 사실이리라. 입법 의원에 선출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정사에 투신했던 그는 유엔 총회 대표, 주미 대사, 부통령, 국무 총리 등의 중책을 역임하는 동안 신생 대한 민국의 국권과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특히 6·25 동란 당시 주미 대사로서 유엔에서의 활약을 통.. 더보기
장면 박사의 서거를 애도 - 서울신문 서울신문 전 부통령이며 제2 공화국의 국무 총리였던 장면 박사가 지난 4일 숙환인 간장염으로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67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그의 영결 미사는 내일 아침 명동 성당에서 올려질 예정이다. 우리는 먼저 장 박사의 서거에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해 마지않는다. 교육자로서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장 박사의 생애는 실로 봉사와 헌신의 일생이었다 하겠다. 높은 인격과 깊은 신앙심을 갖춘 그는 이 나라에서 찾기 힘든 착실한 지도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일찍이 미국에 유학, 현대의 지성과 교양을 몸에 익힌 그는 오랫동안을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미 군정 때 입법 의원에 피선됨으로써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 후로도 그는 줄곧 때 묻지 않은 격조 높은 봉사 정신으로 헌신해 왔다. 그가.. 더보기
장면 박사의 국민장 - 동아일보 동아일보 지난 4일에 지병인 간장염으로 세상을 떠난 전 국무 총리 장면 박사의 장례는 12일에 국민의 이름으로 거행하게 되었다. 5·16 이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오로지 종교적인 신앙 생활만으로 그 마음을 달래 오던 이 실의의 정치인은 끝내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장 박사의 말년은 참으로 불우하였던 것이지만,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는 그가 남긴 혁혁한 업적에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특히 정부 수립 직후에 그는 유엔 총회 한국 수석 대표로서 파견되어 한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얻어 오는 데 공이 컸었고, 더구나 6·25 당시에는 주미 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군을 한국 동란에 참전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