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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백사장의 유언을 따르리 - 2 (해공 선생 1주기를 맞이하여) 눈물의 선거전을 치르고 민주당 각급 지방 당부의 조직 때부터 그래 왔지만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각처에서 갖은 탄압과 테러가 더욱 치열하게 횡행하게 되어 신변 보호에 대한 세심한 주의와 방비책을 세워 왔지만 해공 선생과 나는 자신들의 건강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만치, 당과 측근에서는 여기 대하여는 별로 깊이 염려하지 않았다. 천만 뜻밖에도 이런 변을 막상 당하고 보니, 늘 해공 선생과 등도(登途)하던 나로서는 모든 부주의의 죄가 다 나에게만 있는 것 같아서 당과 국민 앞에 죄송스러운 마음 표현할 길 없었다. 그날 아침, 이리에서 앰뷸런스에 유해를 모시고 조치원까지 달려와 특별차로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나의 정신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모든 것이 꿈속 같기만 하였다. 서울역에 운집한 군중의 비.. 더보기
백사장의 유언을 따르리 - 1 (해공 선생 1주기를 맞이하여) 선거 유세차 강행군 5월 5일 고(故)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돌아가신 지 벌써 1년이 된다. 회고하면 회고할수록 그 당시의 기억이 너무나도 또렷하여 가슴이 아프다. 재작년(1955년) 9월 민주당이 결당된 이후, 해공(海公), 유석(維石), 삼연(三然), 해온(解慍)과 함께 나는 지방 당부의 결당과 유세로 근 5개월을 매일같이 기차에 흔들리고, 또 지프차로 수백 리 길을 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과로한 생활이 작년 3월의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자 지명 전국 대회를 마치고 5월이 다가오면서부터는 더욱 격심해졌다. 당에서는 5·15 정·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지방 핵심 당부의 결당을 더욱 서두르게 되었고, 선거 유세에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됨으로써 심신의 피로도 따라서 더욱 가중해졌으.. 더보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6. 교회와 신흥 국민 우리 시대는 이들 많은 비그리스도교국이 자유와 독립 정신의 강력한 부흥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부흥은 신흥 국민 사이에도 완전한 평등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다. 세계는 나날이 좁아져 가고 모든 종족과 모든 국민 사이의 접촉은 더욱 친밀하게 되어 간다.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일치, 더 큰 협동체를 원하는 마음이 뚜렷이 눈에 띈다. 더욱 밀접한 일치와 참된 평등을 구하는 소망은 당연한 것이며 정당한 것이다. 교회의 태도는 그 교육과 그 유력한 원조로 이 갈망을 채우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인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형제라는 이 교회의 가르침은 피부의 색깔, 인종, 사회적 지위의 구별 없이 인격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평등한 존엄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우리.. 더보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5. 사회봉사와 언론의 힘 가톨릭교 사회 봉사의 구실 그리스도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몇 천 명을 부르시어 귀를 기울이게 하셨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을 위한 사회 봉사의 관념도 그리스도에게 그 근원이 있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교적 사회 봉사로써 복된 말씀은 영원한 구속을 위하여 가난한 이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사회악의 주요한 원인은 유물론의 무신론적 철학, 지상 행복의 열렬한 추구, 부와 쾌락의 늘어만 가는 욕망, 권력 증대의 야심에 있는 것이며, 여기에서 자연 우리가 나날이 보는 헤아릴 수 없는 죄악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단지 성적인 면의 중대한 악만을 보아도 산아 제한, 낙태, 피임, 이혼, 축첩, 매춘 따위가 있다. 가장 슬퍼해야 할 사실은 많은 비그리스도교국에서 .. 더보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4. 근로 대중과 기술적 원조 근로 대중 사람들은 왕왕 가톨릭 교회를 귀족이나 자본주의의 ‘앞잡이’로서 가난한 이들은 돌보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이런 따위의 비난은 자주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으로 되풀이된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특히 비그리스도교국에서는 이런 비난에 귀를 기울이는 인텔리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편견은 가톨릭 교도가 노동 계급의 이익의 참된 보호자이며, 그리스도 자신이 즐거이 노동자가 되는 길을 택하였고, 교회가 여러 세기를 거쳐 온 세계에서 노동자와 가장 불우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크게 애쓴 사실을 보여주도록 힘씀으로써만 시정될 수 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인간은 동포라는 관념, 또 개개의 사람 속에는 그의 인격적 존엄과 그 영원한 운명을 시인하는 입장, 이런 것이야말로 비그리스도교 노동 사회에 참.. 더보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3. 가톨릭 정치가의 감화와 교육가로서의 사도적 사명 가톨릭 정치가의 감화 오늘의 세계를 소란스럽게 하는 가장 중요한 싸움은 ‘자유에 대한 압제에 대한’ 싸움이다. 이 압제는 여러 모로의 가면을 쓰고 인간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릇된 철학을 지지하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세계를 제 것으로 만들려고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데, 많은 성실한 사람들은 그 해로운 적의 행동을 슬퍼할 뿐, 이와 저항하기 위하여 하는 일이 없다. 우리의 나날의 생활은 크게 정부의 행동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정치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불리한 사정으로 하여 정치에 관여할 수 없으므로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관심과 냉담한 태도가 관리의 타락을 낳는 것이다. 민주 정치가 주는 권리를 소홀히 하거나 이에 무관심한 결과는 당.. 더보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2. 종교와 사회 및 정치 생활 “인간 생활은 개인에게도 그리스도의 계명과 정신이 접촉하고 있다. 그 결과로 저절로 되어 가는 일은 종교적 사도 생활과 서로 교류하게 마련인 것이다. 이 말의 가장 높은 뜻에 있어서 정치란 국가(Polis)의 이익을 위한 협력이란 뜻에 지나지 않는다”(비오 12세의 말씀). 나라와 나라의 번영에는 도덕적이며, 종교적으로 몹시 중요한 많은 문제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교황은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사도적 활동가는 무관심 혹은 냉담하게 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가톨릭 운동은 당파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당파 싸움이 더 격화하는 우발적인 투쟁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찬양되어야 한다면, 그만큼 더 나라 일을 맡은 관리를 가치없는 이 또는 무능한 이의 자유에 맡기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고 교황.. 더보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1. 그리스도교의 영향력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 비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 사회와 정치 생활에 대한그리스도교의 공헌 그리스도교의 영향력 얼핏보면 그리스도교의 나라와 정치의 사회 생활에 대하여 소수의 그리스도교의 공헌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현실을 떠난 일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그리스도교와 제(諸) 나라에서 감화를 줄 수 있는 범위 사이에는 너무나 명백하고 뚜렷한 불균형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 수에 있어서 미약할 뿐만 아니라 더 큰 불리한 면이 있다. 그것은 교육의 부족이다. 특히 그리스도 사회는 거의 이러한 사명에 대하여 준비가 모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랑은 많은 나라에 있어서 특히 극동의 여러 지역에서 인정할 수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이러한 사태를 본다면, 우리 작은 그리스..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5. 민주혁명과 사임의 이유 절망을 뚫고 일어서는 국민 국민과 우리 당은 이 절망적인 기분 속에서 그래도 한 가닥의 희망을 가졌다. 그것은 정·부통령 선거를 연기하는 정치 아량이 이 정권과 자유당에게 생겨나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야당으로서 새로운 정·부통령 입후보자를 내세울 수 있으며, 민주주의가 조금이라도 지탱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온 국민의 대표자들로 조직된 공명 선거 추진 위원회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재자는 언제나 무자비하였다. 추호의 아량도 보여주지 않고 예견한 대로 3월 15일 선거를 강행하였던 것이다. 여수에서 민주당 시당부 간부가 살해된 것을 비롯하여 이미 꾸며진 대로 살인과 부정과 4할 사전 투입과 3인조, 5인조의 공개 투표를 자행하였고, 드디어는 너무 많은 ..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4. 더해가는 부패와 보안법 부패는 더해 가고 그러는 동안에 이 정권의 부패는 더욱 조장되고 불안은 더욱더 높아갔다. 악질 집권자는 조국의 경제 부흥을 돕기 위한 외국 원조의 막대한 액수를 합법을 가장하면서 특권층에 횡류했고, 사욕과 정권 유지를 위해 거침없이 소비했다. 공무원은 극도로 썩어 매관 매직에 공정 가격까지 호가하게 되고, 경제 정책의 졸렬은 마침내 국민을 빈곤으로 몰아넣었으니 농촌은 더욱 황폐해져 농촌 경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궁핍해지고, 국가의 간성인 군인들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고, 중소 기업자와 소시민의 실직자가 늘고, 노동자들도 응당의 임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에 허덕이는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4대 민의원 선거 때의 용서할 수 없는 부정과 횡포의 도가 막심함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3. 공관에서의 민주 투쟁 4월 혁명으로 인해 암흑 속에 잠겨 버렸던 모든 정치적 음모와 이 정권의 탄압 각본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백일 천하에 그 전모가 드러난 나에 대한 저격 사건도 과연 어떤 정치적 흉계로써 꾸며진 살인극이었던가를 확인하게 되었지만, 실은 그 당시에도 국민 전체가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 배후의 인물들이 오늘날 드러난 그들인 것도 거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른바 하수인들로서 사형을 언도 받은 자들의 몰지각을 서러워했을 뿐, 그들이 나나 민주당에 어떤 원한이나 정치적 신념으로서의 행위가 아님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감형을 이 대통령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처형당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테러 행동이 중지될 리는 만무하여 결국 가련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밖에 안되는 것이기도 하..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2. 대통령이 증오하는 부통령 1957년 8월 15일, 그날은 나 개인으로서나 내가 속해 있는 민주당으로서나 또 나를 선출해 준 국민으로서 감격적인 날이면서, 한편으로는 무한히 불쾌한 날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날은 민권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관권의 승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율 배반적인 날이었다. 나는 그날 국민의 초라한 한 대표로서 정·부통령 취임 식전(式典)에 참석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그날은 결코 대통령의 취임만을 위한 날이 아니고 부통령의 취임도 동시에 행하는 정·부통령 취임의 날이었다. 그렇지만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고위층과 주한 외국 사절들의 좌석은 정중히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주인공의 한 사람인 새 부통령이 앉을 자리는 뚜렷한 위치에 놓여 있지 않았다. 이 사소한 듯한 고의적인 처사는 ..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1. 4·19와 민주보루의 등대수 의로운 민주 혁명 4·19 “학원에 자유를 달라”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국민의 자유와 민권의 수호, 조국의 민주주의를 절규한 데모를 계기로 발단된 반독재 봉기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성과 부패성을 규탄하는 전국민의 음성적인 분노가 가속화되어 폭발점으로 휘몰아가던 차에, 저 몸서리치는 3·15의 살인적인 폭력 선거에 이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3·15의 제1차 마산 의거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잇따라 제2차 마산 의거, 4·18 고대생 데모로 진전하게 됨으로써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한 양성화된 공연한 전면 항쟁으로 변해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4월 19일에는 전 서울의 대학생들의 결정으로 의거가 일어나자, 무자비한 독재 정권의 일부 경찰은 이 정의에 불타는 순수한 조국애의 대..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4. 전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전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전황은 날로 불리해 가고, 국군은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했다. 나는 유엔과 미국 정부에 매달려 7월 한 달을 바쁘게 보냈다. 소련은 최초에 꿈꾸던 안이한 한국 점령이 의외에도 유엔 궐기에 부닥쳐 안보 이사회의 보이콧이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이제는 정략을 바꿔 8월 회의에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인 소련 대표 말릭이 이사회에 출석했다. 그는 의장석에 앉더니 대뜸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이사회의 그동안의 모든 결의가 모두 무효임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인즉,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3.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유엔 안보 이사회에서 정전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던 6월 26일(미국 시간 25일) 하오에 주말 여행을 즐기던 트루먼 대통령은 예정을 앞당겨 급거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날 맥아더 장군과 주한 미 고문단에서는 한국군에 실탄이 필요하니, 급히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 국무성 당국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덜레스 씨로부터도 화급한 전문이 도착했다. 6·25가 터지기 사흘 전에 한국을 떠났던 덜레스 씨는 일본에 들러 경도 지방을 관광하다가 맥아더 장군의 급보를 받고 동경으로 돌아왔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전용기로 동경에 비래(飛來)한 덜레스 씨는 한국 사태에 관해 맥아더 장군과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눴다. 평소 한국을 아끼고 뒷받침해 주던 맥아더 장군과 유사시에는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언질을 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