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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Ⅰ. 서장 - 민주당 창당 1954년 11월 27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한하여 몇 번이라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 할 수 있다는 조문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이 찬성 135표, 반대 60표로 일단 부결되었던 것이 29일 개헌안 부결을 번복하고, 세칭 사사 오입 개헌이 공포된 후 한국의 정국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적어도 이때부터 ‘독재 정치’라는 말이 야당 정치가는 물론 일반 국민의 입에서까지 공공연히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이 이상의 혼란과 무법(無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민중의 의사 표시인 동시에 독재 정치에 반항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민중이 점점 인식하여 자신과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헌법 개정안의 찬부 투표의 차가 한 표 이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이 대통령의 강압적인 수단이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증.. 더보기
Ⅰ. 서장 - 중책 맡은 유엔 대표 이러한 정황 속에서 1951년 11월 파리에서 제6차 유엔 총회가 개최되었다. 수석 대표 선정이 논의되다가 결국은 내가 대표단을 인솔하고 파리로 가게 되었다. “대한 민국을 새로 수립하고 유엔의 승인을 받을 때에도 임자가 활약했고, 유엔 사정에도 다른 사람보다 정통하니, 이번에도 국무 총리 현직을 가진 채 수석 대표로 유엔 총회에 참석하라”는 이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다. 나도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건강은 좋지 않았으나, 일행과 함께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10월이었다. 파리에 도착하여 2개월 간 머무르는 동안 나는 간염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와병 속에서 동행했던 대표들과 매일 협의하여 유엔 활동을 계속했으나, 불행히도 6차 유엔 총회에서는 한국 문제가 상정되지 못한 채.. 더보기
Ⅰ. 서장 - 제2대 국무총리 취임 내가 귀국했을 때는 국회와 이 대통령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어 거의 수화 상극(水火相剋)이었다. 평화시에도 물론이거니와 전쟁 수행 도상에 있는 국가에서 입법부와 행정부가 의견과 감정의 대립으로 행동의 일치점을 갖지 못하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나는 중간에서 양자의 조정 역할을 하느라고 무한한 애를 써 보았으나 갈라진 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귀국 즉시 총리직에 취임하지 않고, 1주일 간의 여유를 얻어 요인들을 만나 의논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이 박사에 대한 평이 좋지 많아 총리직을 맡을 생각이 간절하지 않았으나, ‘이왕 인준도 받았으니 하는 데까지 하다가 할 수 없으면 그만두라’는 의견이 다수여서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 이것이 2월 3일의 일이다. 총리직을 수락하고 국사를 담당한 후에는 어긋난 국회와.. 더보기
Ⅰ. 서장 - 초대 주미대사 시절 그러나 대사라고는 처음하는 일이라 다음날부터 각국 대사 중 아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솔직하게 대사직의 공부를 시작하여 서식(書式) 편제(編制) 등을 습득하면서 차근차근 대사관의 기초를 세워 나갔다. 1년 반 동안을 두고 대사관 청사도 증축하여, 직원도 정비하고 운영도 본궤도에 올려놓아 대사관의 기초는 튼튼해지고 나의 마음도 안정 되었을 무렵, 1950년 6월 25일 밤 느닷없이 UPI 기자에게서 전화가 오고 뒤이어 이 대통령으로부터 국제 전화가 왔는데 “북한 공산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오는 중이니 속히 미국 정부와 유엔에 호소하고 활동을 개시하라”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의 음성은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즉시로 나는 미 국무성 고위층과 대통령을 순방하면서 구원을 요청하고, 대(對) 유엔 활동을 개시.. 더보기
Ⅰ. 서장 - 해방정계 나는 해방된 우리 민족의 최대 당면 과업은 우선 정치 면에서 우리 조국을 완전 독립 국가로 재건하고, 경제의 자주 자립을 확립하며 문화, 교육의 정책과 체계를 재편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정계에 투신하여 민주 의원(民主議院)의 의원이 되고, 연달아 입법 의원(立法議院)의 의원이 되었다. 과도기 입법 의원으로서 나는 주로 좌익 계열과의 투쟁, 군정 당국과의 절충, 미‧소 공동 위원회에 대한 대책 수립 등으로 정계의 말석에서 일해 오면서 혼란의 정계를 수습하여 독립 국가 체제의 완비와 정권 이양 단계로 지향시키는 데 모든 정성을 기울여 노력하였다. 때마침 제2차 유엔 총회의 결의로 한국 초유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나는 서울 종로 을구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고, 제헌 국회 의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더보기
Ⅰ. 서장 - 교육계 20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는 미국 유학 시 은사이며 천주교 평양 교구장인 방 주교를 보좌하고자 평양 교구로 가서 교구 일을 맡아 보면서, 교구 재단의 확립 등으로 약 5년 간을 지내고 서울로 올라와 동성(東星) 상업 학교의 일을 보게 되었다. 동성 학교에서 나는 17년 간 교육 사업에 종사하면서 그동안 강당도 세우고, 불타 버린 본교사도 재건하여 그 건물과 함께 나도 늙으며 매년 배출되는 대견한 제자들을 사회 각 방면으로 보내는 것으로 낙을 삼으며 살아왔다. 제2차 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우리 한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되면서 나도 동성 학교를 떠났다. 더보기
Ⅰ. 서장 - 어린시절 1899년 나는 서울 적선동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옛날의 삼군부(三軍部)가 있던 뒷골목인데, 중앙청 서남쪽이다. 어머니는 제물포(인천)에서 가마를 타고 친정 댁에서 오셔서 나를 낳으시고, 돌아가실 때에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경인(京仁) 철도의 기차를 타고 가셨다고 하니,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 맨 처음 문명의 이기(利器)를 이용한 셈이다. 나의 가정은 그리 군색하지도 않았고, 내가 장남인 만큼 부모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셔서, 나는 남부러울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덟 살 되던 해, 나는 그 당시 인천에 있는 박문 학교에 입학하여 머리를 땋고 다니면서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 ‘대학(大學)’, ‘통감(通鑑)’을 배우고 신.. 더보기
Ⅰ. 서장 - 서두에 서두(序頭)에 나는 이미 끝난 사람이다. 정계에서 물러선 지 어언 6년, 이날 이때까지 침묵의 세월로 살아왔을 따름이다. 이미 끝나 버린 사람을 두고 세상은 그동안 지나친 관심과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특히 군사 정권은 부패와 무능과 구악의 대명사로 우리 민주당을 해치웠거니와 우리는 그것이 허위든 사실이든, 어떠한 악선전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켰다. 역사는 일시적인 승자를 위한 것만은 아니며, 장구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사실(史實)의 진실성을 가려내고야 마는 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괴로움을 되씹으면서도,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정작 왜 할말이 없었겠는가. 말할 때가 아니고, 말해서 우리 국민에 대한 과오나 역사에 대한 책임이 속죄되리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운명적인 침묵을 지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