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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레스

운석 장면 일대기 - 19. 주미대사 시절의 업적 평가 주미대사로서 운석 장면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전제가 되는 것은 해방 후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다. 즉 해방전후의 현대사를 해방을 기해 남북한에 각각 친미 보수정권과 친소 공산정권이 대두하여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 발전의 기회를 압살해 버린 암울했던 역사로 보거나, 남한의 경우 분단의 고착화를 배경으로 우익 독재정권이 반공을 내세우면서 그 기득권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대외적으로 미국의 종속국가로 전락해간 시기라고 본다면, 운석의 역할은 비극의 민족사를 이끈 주역 중의 한명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퇴영, 침체, 죄절의 늪이 아니고 한국인이 자유·평등·민주주의 동 보편적 이상을 향해 전진을 재촉”했던 시기로 보는 발전적 입장에서 조망할 때, 그리고 당시의 한..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8. UN군의 6·25 전쟁 파병을 이끌어내다. 여기서는 운석 선생이 동서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산물로서 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전인 6·25 전쟁을 맞아, 그의 정치적 신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선생이 남긴 “우리는 자유를 수호했다―피어린 6·25 동란의 회고”라는 부제가 달린 「화부서 겪은 6·25」(1954)와 「(한국의 은인) 덜레스 씨를 추억한다: 상 」(1959), 「6·25 동란과 워싱턴」(1965)이라는 3편의 6·25 전쟁 관계 기고문과 당신의 긴박한 현장을 담은 사진과 문서들을 곁들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운석 선생은 6·25 전쟁 발발 두 달전 미국 국방장관 애치슨의 아시아지역에 있어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라인’으로 야기된 국방상의 결함을 태평양 연안국가간의 집단안보체제인 ‘태..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5.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1948년 6월 25일 UN 한국 임시위원단은 “한국 인구의 거의 3분지 2 이상이 거주하며,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었던 한국내 지역에서 선거권자의 자유의사를 유효하게 표현한 1948년 5월 10일의 투표결과”를 선언하였다. 1948년 7월 12일 국회에서 헌법이 채택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李始榮)이 선출되었으며, 8월 15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전세계에 공표되었다. 한편 9월 3일 북한정부의 수립도 선포되었다.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건국의 일등 공신으로 부상한 운석 선생은 자신이 수행한 과업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파한다. "이제 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당선되고 정부가 수립되어 8월 15일 해방일을 기하여 대한..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1.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대한 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수석 대표로 참석, 외교계에 첫발을 내어디딘 나는 1949년 1월 5일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어, 1951년 2월 3일 국무 총리 인준으로 사임하기까지 만 2년 동안을 재직했다. 이 동안에 6·25 동란을 겪은 나는 미국 및 유엔과의 외교 관계를 거의 혼자서 전담하다시피 했다. 6·25 동란과 워싱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6·25의 역사적 배경을 이룬 몇 가지 국제적 사건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6·25 한 해 앞서인 1949년 4월 4일, 워싱턴에서 나토(NATO) 조약이 체결되어 공산 침략의 위협에 대한 서방측의 집단 안전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날 조인식에 초청되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