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통령

나의 부통령직 4년 - 5. 민주혁명과 사임의 이유 절망을 뚫고 일어서는 국민 국민과 우리 당은 이 절망적인 기분 속에서 그래도 한 가닥의 희망을 가졌다. 그것은 정·부통령 선거를 연기하는 정치 아량이 이 정권과 자유당에게 생겨나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야당으로서 새로운 정·부통령 입후보자를 내세울 수 있으며, 민주주의가 조금이라도 지탱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온 국민의 대표자들로 조직된 공명 선거 추진 위원회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재자는 언제나 무자비하였다. 추호의 아량도 보여주지 않고 예견한 대로 3월 15일 선거를 강행하였던 것이다. 여수에서 민주당 시당부 간부가 살해된 것을 비롯하여 이미 꾸며진 대로 살인과 부정과 4할 사전 투입과 3인조, 5인조의 공개 투표를 자행하였고, 드디어는 너무 많은 ..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4. 더해가는 부패와 보안법 부패는 더해 가고 그러는 동안에 이 정권의 부패는 더욱 조장되고 불안은 더욱더 높아갔다. 악질 집권자는 조국의 경제 부흥을 돕기 위한 외국 원조의 막대한 액수를 합법을 가장하면서 특권층에 횡류했고, 사욕과 정권 유지를 위해 거침없이 소비했다. 공무원은 극도로 썩어 매관 매직에 공정 가격까지 호가하게 되고, 경제 정책의 졸렬은 마침내 국민을 빈곤으로 몰아넣었으니 농촌은 더욱 황폐해져 농촌 경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궁핍해지고, 국가의 간성인 군인들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고, 중소 기업자와 소시민의 실직자가 늘고, 노동자들도 응당의 임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에 허덕이는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4대 민의원 선거 때의 용서할 수 없는 부정과 횡포의 도가 막심함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3. 공관에서의 민주 투쟁 4월 혁명으로 인해 암흑 속에 잠겨 버렸던 모든 정치적 음모와 이 정권의 탄압 각본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백일 천하에 그 전모가 드러난 나에 대한 저격 사건도 과연 어떤 정치적 흉계로써 꾸며진 살인극이었던가를 확인하게 되었지만, 실은 그 당시에도 국민 전체가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 배후의 인물들이 오늘날 드러난 그들인 것도 거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른바 하수인들로서 사형을 언도 받은 자들의 몰지각을 서러워했을 뿐, 그들이 나나 민주당에 어떤 원한이나 정치적 신념으로서의 행위가 아님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감형을 이 대통령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처형당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테러 행동이 중지될 리는 만무하여 결국 가련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밖에 안되는 것이기도 하..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2. 대통령이 증오하는 부통령 1957년 8월 15일, 그날은 나 개인으로서나 내가 속해 있는 민주당으로서나 또 나를 선출해 준 국민으로서 감격적인 날이면서, 한편으로는 무한히 불쾌한 날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날은 민권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관권의 승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율 배반적인 날이었다. 나는 그날 국민의 초라한 한 대표로서 정·부통령 취임 식전(式典)에 참석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그날은 결코 대통령의 취임만을 위한 날이 아니고 부통령의 취임도 동시에 행하는 정·부통령 취임의 날이었다. 그렇지만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고위층과 주한 외국 사절들의 좌석은 정중히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주인공의 한 사람인 새 부통령이 앉을 자리는 뚜렷한 위치에 놓여 있지 않았다. 이 사소한 듯한 고의적인 처사는 ..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1. 4·19와 민주보루의 등대수 의로운 민주 혁명 4·19 “학원에 자유를 달라”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국민의 자유와 민권의 수호, 조국의 민주주의를 절규한 데모를 계기로 발단된 반독재 봉기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성과 부패성을 규탄하는 전국민의 음성적인 분노가 가속화되어 폭발점으로 휘몰아가던 차에, 저 몸서리치는 3·15의 살인적인 폭력 선거에 이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3·15의 제1차 마산 의거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잇따라 제2차 마산 의거, 4·18 고대생 데모로 진전하게 됨으로써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한 양성화된 공연한 전면 항쟁으로 변해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4월 19일에는 전 서울의 대학생들의 결정으로 의거가 일어나자, 무자비한 독재 정권의 일부 경찰은 이 정의에 불타는 순수한 조국애의 대.. 더보기
김성수 부통령 취임식 더보기
민주당 부통령 후보 지방 유세 2 - (부산 1960. 02. 26.) 나의 정치 이념 “자유” 내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간명하고 자연스러운 정치 이념 하나뿐입니다. 즉 정치라는 것은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백성이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 다 같이 평등하게 나라의 보호를 받고, 다 같이 하느님께 받은 기본권, 즉 자유를 자연스럽게 아무 거침없이 쓸 수 있도록 국민을 인도해 나가고 보호해 나가는 이것이 정치인 것입니다. 여기 여러 가지 학설을 붙여서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근본 원인은 그것뿐입니다. 백성을 잘살게 만들어 주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밖에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요. 잘살게 해주면 왈, 이것을 ‘선정’이라 하고, 잘못하면 그것을 ‘악정’이라 그러고, 국민 앞에 좀 잘해 달라는 수임을 .. 더보기
민주당 부통령 후보 지방 유세 1 (대구 1960. 2. 28.) 짝 잃은 외기러기의 비애 나의 친애하는 대구 시민 여러분! 이 사람이 4년 전에 고(故) 해공 신익희 선생님을 모시고, 정‧부통령 입후보자로서 강연을 하러 바로 이 자리에 왔을 때에 여기 운집하셨던 시민 여러분의 모습을 오늘 다시 뵙게 되니 지극히 감개 무량합니다. 해공 선생을 선거 10일 전에 잃은 저는 국민 여러분들의 뜨거운 동정과 성원에 의해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자유당에서 부정과 불법으로 바로 이 대구의 개표를 중단시키고, 민의를 뒤엎으려는 것을 대구 시민 여러분의 열렬하신 성원과 그 투표함을 사수한 우리 민주당 동지 여러분의 과감한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당이 스스로 항복한 것은 오로지 대구 시민 여러분의 높은 정치 의식과 과감하신 투쟁 .. 더보기
운석 시대 7대 사건 - Ⅳ. 부통령 피격 사건 운석 장면 박사 생존 시에는 하고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장 박사가 몸소 체험했던 가장 벅찬 정치적인 사건들을 사건별로 간추려 드라마틱하게 엮어 본다. 픽션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실 위주임은 물론이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허위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기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치 비화를 추적하면서 해명키로 한다. 이 운석 시대의 대사건은 원칙적으로 사건 발생의 순위이며,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운석 기념 출판회에 있음을 밝혀 둔다. 1 1956년 9월 28일. 서울 시내 명동 시공관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의 인파가 들끓었다. 이날 하오 2시 38분쯤이다. 페인트가 벗겨져 얼룩진 동편 비상구가 슬며시 열리는 듯하면서 .. 더보기
부통령 광복절 기념 연설 정치 도의심의 확립 우리 민족이 해방된 지 12년, 우리 정부가 수립된 지 9년이 되는 뜻 깊은 광복절을 맞이해서 먼저 우리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신 선열 여러분과 조국의 수호를 위해 일선에서 전사한 순국 장병 영령께 심심한 경의와 감사를 표하며, 국민 여러분 앞에서 내 소감의 일단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나는 과거 1년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침묵을 지키는 동안에 몇 가지의 생각과 심지어 번민에 잠겨 있었습니다. 즉 우리 나라 오늘날의 현실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수시로 지방을 순시하기로 하며 민정을 시찰하기도 해서 그 파악되는 바를 정부 시책에 반영시키고 싶었고, 혹은 널리 우방을 역방하여 한국의 국제적 위치와 대공 투쟁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일층 명백하게 인식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 더보기
부통령 당선에 감격하여 나의 소신을 피력한다 이번 5‧15 선거는 우리 나라 역사상 기념될 만한 하나의 진전이다. 우리가 해방 이후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하여 무한한 노력을 경주해 왔으나, 그동안의 형편은 여러 가지 주‧객관적 사정으로 인하여 우리의 민주 건설을 저해해 왔던 것이며, 따라서 대한 민국의 생명이라고 할 민주주의는 한낱 간판에 불과한 처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 빈사 상태의 민주주의는 이번 5‧15 선거에 있어서 민족의 사활의 기로를 자각한 모든 민중들이 용감히 일어서서 반민주 세력의 침투를 막아 내고 강압과 금권의 홍수를 과감하게 막아 냈을 뿐 아니라, 드디어는 민중의 참된 힘을 과시하게 되었으니 이번 선거의 의의야말로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금반 불초 본인이 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된 것은 결국 전술한 바와.. 더보기
Ⅱ. 부통령 시절 - 청천 벽력 해공 급서(急逝) 5월 5일 5시경 5호 침대에서 해공 선생은 불의의 변을 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날 새벽 5시경 해공 선생은 일어나신 기척을 내며 “창현아, 뒤지 어디 있냐?” 하고 신창현 비서를 부르는 소리가 나더니 곧 화장실에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상단 침대에 있던 나도 일어났고, 해공 선생과 마주보는 하단 침대에서 자던 조재천 씨도 잠을 깨서 서로 아침 인사를 나눴다. 나는 세수를 하려고 세면소에 갔으나 물이 안 나와서 돌아와 물이 없어 세수를 못하였다고 하니, 이때 해공 선생이 “아침 세수는 진주에 가서 합시다” 하기에 “그러지요”라고 대답하고, 얼마 안 있어 보니 해공 선생의 몸 자세가 이상했다. 앞으로 푹 수그린 채 일어나지 못하였다. 나는 무심히 “아이구, 해공 선생 왜 이러십니까?” 하고 해공 선생 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