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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오직 양심의 자유를 추구 - 김영선


곡(哭) 장면 박사 -
김영선(金永善, 전 재무부 장관)

 운석 장면 박사가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그분과 고락을 함께 했던 나의 슬픔은 말할 길이 없다.

 그분은 분명히 위대한 인격을 소유자였다. 국내에서 농학을 공부하다가 미국에서 철학을 연구한 그분의 가장 큰 염원은 인간의 영혼을 구령하는 데 있었다. 또 하느님이 주신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있었다.


 그분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살아오셨으며, 이를 토대로 인간 사회에 민주 질서를 확립하고 민주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생애를 바친 분이다. 때문에 그분은 결단성이 없는 유약한 인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분처럼 강한 이가 드물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인간이 갑옷 입고 투구를 써야만 강한 것인가? 너그럽고 부드럽게, 화를 입어도 결코 보복을 않는 아량을 갖는 이도 강한 자이고, 깊은 신앙을 갖고 모든 사물에 대해 초연할 수 있는 이는 더욱 강한 인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은 오직 하느님만을 인정하며, 하늘의 뜻과 자기와를 연결하려는 신앙적인 강점을 지니고 있었던 분이다. 이분이야말로 정말 강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나는 부산 정치 파동, 민주당 창당, 5·15 정·부통령 선거, 4·19 의거, 5·16 군사 쿠데타를 그분과 함께 겪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내가 그분을 말하자면, 그분이야말로 민족사에 크게 기여한 분이다.


 미 군정 때 입법 의원으로 계시면서 오로지 민주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염원에서 사상적인 중간 세력을 타파하고, 이승만 박사와 손잡아 이 나라 헌법 제정에 공헌하면서 대한 민국의 건국에 이바지했다. 6·25 동란 때 주미 대사로 있으면서 통신이 두절되는 등의 악조건 밑에서 미국과 적극적으로 교섭하여 미군을 한국전에 출병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라를 지키는 데 그만큼 공이 컸던 셈이다. 51년 유엔 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로 참석해서는 한국을 국제적으로 승인받는 데 이바지했다.


 그 후 정계에 투신해서는 민주 원칙에 의한 민주 국가를 수호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오셨다. 대(對)독재 투쟁을 벌여 온 그분의 과거는 국민들이 너무도 잘 알 것이다.


 말하자면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게 하고, 나라에 민주주의를 뿌리 박기 위해 헌신해 온 그분의 이름은 이 나라 역사와 더불어 길이 빛날 것이다.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해 그분은 할말이 많다. 나에게 들려준 말도 많다. 그러나 그분 생전의 부탁도 있고 해서 나는 말하지 않겠다. 또 아직은 이야기할 때도 아니다. 아마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어 10년, 15년 후면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때문에 나는 그분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여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그분의 인격과 역사적 위치에 대해서만 소감을 밝혔다.


 다만 그분 생전의 염원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추구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다룬 정치의 과정에서 약한 인상을 준 것 같으나, 남을 용서할 줄 알고 모든 일을 부드럽게 처리하는 그분이야말로 정말 강한 분이란 것을 국민들은 알 것이라 믿는다.


 품은 꿈을 펼쳐 나가지 못한 채 중도에서 좌절되어 고달픈 나날을 보낸 그분의 만년을 생각할 때 그분의 영전에서 그분을 따르던 동지들의 가슴은 메어지도록 슬프다.


 영웅도 위인도 되기를 원치 않던 선생님! 평생의 기원대로 하늘 나라에 가서 편히 쉬시옵소서.

(1966. 6. 7. 조선 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