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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운석 장면 일대기 - 14. 해방 공간 속 : 정치에 투신하다 1945년 8월 15일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는 감격을 맛보았다. 해방이란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의 환희에 찬 희망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커다란 실망과 고통을 준 비극적 역사의 원점이자,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추구했던 ‘근대화’의 본격적 출발점” 이었다. 특히 남한에 있어 해방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이상과 국가적 독립·개화·자강·합리주의·실용주의·과학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근대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본격적 노력의 출발점이었다. [심훈은 1930년 3월 1일에 지은 "그날이 오면"이란 시에서 조국의 광복을 노래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3. 교육자의 길 운석 선생은 1931년 4월 1일 서울 혜화동 소재 동성 상업학교에 부임해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서무주임의 보직을 5년 반 정도를 수행했으며, 1936년 11월 19일에는 교장에 취임한 후 1947년 12월 25일 교단을 떠나기까지 17년간 교단에서 후진 양성에 오 힘을 기울였다. 동성상업학교는 선생이 부임하던 해 남대문 상업학교에서 교명을 바꾼 학교로 원래 1907년 서소문 일대의 상인들과 선각자들이 힘을 모아 설립한 민족사학인 소의(昭儀) 학교가 그 모체다. 소의 학교는 1920년 소의 상업학교로 성장하였고 1922년 천주교 교단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남대문 상업학교로 개명하였으며, 1929년부터는 학교 내에 중등과정의 신학 예비학교(소신학교)를 신설하여 상업 전공의 일반 학생을 갑조(甲組), 소..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2. 평양교구 확립을 위해 봉사한 5년 운석 선생을 비롯한 장발, 장정온, 김교임 등의 미국 유학은 미국 메리놀 전교회의 한국 진출과 밀접한 관련하에 뮈텔 주교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뮈텔 주교는 미국계 개신교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는 평안도 지방―1923년 당시 총인구는 2,441,400명, 천주교 신자 4,800명, 개신교 신자 41,500명―에 대한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위해 미국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진출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23년 5월 운석 선생이 미국 유학 시 도움을 받았던 메리놀 소속의 방(P. J. Byrne) 신부가 교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내한하는 등 본격적인 전교활동에 돌입하였다.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은 운석 선생 일가의 헌신적 도움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2대 평양 교..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1.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 참석 조국 복음화의 꿈을 펼치다 : 신앙인과 교육자로서의 활약 운석 선생은 미국 유학생활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보며 더욱 나의 언행을 종교적 양심에 비추어 보고 행동하는 습성을 길렀으며, 일제 아래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민간 교육사업이 더욱 효과적이며 첩경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고, 민족 도덕을 양성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겠다고 깨닫게 되었다”한다. 따라서 선생은 귀국 후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 장래를 위해 교육사업과 천주교 전파를 위한 교회활동에 몰두함으로써, 나라 잃은 민족의 정신적 독립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 천주교 청년회 대표로 참석 1925년 6월 20일 5년여에 걸친 미국 유..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5. 민족의 복음화를 꿈꾸다 운석 선생은 8세 되는 해(1906)에 인천 성당 부설 사립 박문학교博文學校)에 입학하였다. 선생은 여기서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4년 과정의 심상과(尋常科)와 2년 과정의 고등과(高等科)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그는 주로 한학과 지리와 산수 같은 신문학도 배웠다. 운석 선생이 회상하는 박문학교 시절을 들어보자. “내가 맨 처음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인천에 있던 사립 박문학교였는데 주로 한문〔千字文, 童蒙先習, 小學, 大學, 中庸, 通鑑〕을 배웠으며 신학문이라고 배웠다는 것은 지금의 지리, 역사, 산술(算術) 정도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관복에 제모를 쓴 순경까지도 상투를 틀고 다니는 때였으므로 우리들은 머리를 땋고 학교에 다녔다.” 2) 수원 농림학교 시절에 발아한 천주교 교리 탐구욕 박문학교..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4. 교육·종교적 배경 운석 선생은 교육자이자 문화·종교운동가이며, 외교관이자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생동안 꾸준히 집필과 번역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은 문필가이자 신학 이론가 내지는 교회사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영한교회용어집』(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 1929), 『교부들의 신앙』(1944), 『젬마 갈가니』(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62), 『성 원선시오』(1964) 등의 역서와 『구도자의 길』(1930), 『조선천주공교회약사』(1931),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1964) 같은 저서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육자, 외교관, 정치가로서 활약하면서 자신의 견해나 활동 등에 관련된 글들을 신문지상이나 잡지에 끊임없이 게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 엄친 장기빈의 영향 Ⅰ. 가족 배경 1. 엄친 장기빈의 영향 운석 선생의 선대(先代)는 인동(仁同) 장씨(張氏) 황상공파(凰顙公派)의 분파인 개옹공파(㝏翁公派)로, 8대조 장익붕(張翼鵬) 옹(翁)이 인동에서 처가가 있던 평안도 성천(成川)으로 이주했다. 고조(高祖) 장인각(張仁珏) 옹이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中和)로 이거한 이래 이 지역에서 세거(世居)한 가문이었다. 중화는 천주교 신앙이 일찍이 뿌리내린 곳이었지만, 선생의 선대는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 가보에 의하면 선생의 집안이 천주교에 구의하게 된 시점은 인천 이주 후다. 증조모(曾祖母)와 조모는 인천 이주 후 영세했으며, 증조부와 조부도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운석 선셩이 자신의 일생 중 주요사항을 일자별로 정리해 놓.. 더보기
허동현 著 - 건국·외교·민주의 선구자 장면 허동현 著 ≪건국·외교·민주의 선구자 장면≫ 게재합니다. 목차까지는 이미지 파일로 대체하며, 본문 내용은 텍스로트 작업해서 올립니다. 본문 내용에 가감되는 것은 없습니다. 텍스트를 한글 작업으로 하기 때문에 오타나 띄어쓰기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댓글이나 방명록에 글을 남기시면 확인 후 수정하겠습니다. ≪건국·외교·민주의 선구자 장면≫ 저자 : 허동현 (경희대 교양학부장) 1999년 초판 기획·주관 : 운석기념회 ISBN : 89-419-9916-2 분도출판사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7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1시간 3분 2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1시간 3분 20여 초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 :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셨었죠? 강 : 예. 허 : 그 때 군사영어학교의 교과목들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강 : 군사영어. 군사영어만 합니다. 허 : 미군하고 어떻게 같이 전술을 같이 하느냐 그런 것도 아니고, 의사소통 가능한 거 여부만 하는 겁니까? 강 : 그렇죠. 허 : 그러니까 미군이 작전을 이렇게..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6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39분 4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39분 40여 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 : 그리고 그 전에 말씀하셨던 육당선생님에 관한 회고 좀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강 : 뭐 회고는 이제 몇가지 분야에서 말씀드리면, 우선 처음에 41년에 학교에 들어갔어요. 예과 2학년에 들어갔는데, 우리가 처음에 가서 인사를 드리니까 우리는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때 내선일체론자니 이런 그게 한참..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5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21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21분 여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동현 (이하 허) : 2공화국 시절에 관해서 더 말씀해 주실게 있으시면... 강영훈 (이하 강) : 무슨 시절? 허 : 2공화국시절에 대해서.... 강 : 지금 대체로 다 내가 관여했다든가 알고 있는 범위는 얘기를 한 줄 압니다만은, 그 때는 사실 뭐, 사관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군대도 무슨 어떠한 그... 액션을 갖다가 매일같이..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4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1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10 여 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강영훈 (이하 강) : 장면 선생님이 총리가 되셔가지고서 이끌어간 그 당시에 정국을 생각하면서 기억나는 점은, 우선 군부에 관한 관점에서의 말씀은, 그때 가만 보니까 우리 동료를 중에 또는 정계에서의 또 우리 친구들하고 가까운 사람들, 소위 새로운 장면 정권에서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해가지고 활발하게 총리하고 접촉이 있었던 걸로 압니..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3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상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44분 1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44분 여를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동현 (이하 허) : 그리고 당시 군대내에서 민주당정권에 대해서 일반적인 장교들이나 이런 분들이 어떤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증언을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영훈 (이하 강) : 4.19학생의거가 일어난 후에 허정임시내각이 3개월동안 있었고 그후에 이제 민주당정권이 들어섰습니다만은, 민주당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위 신파 구파 ..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2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상 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 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22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재생시간에서 22분을 빼면 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동현 (이하 허) : 예. 그리고 조갑재 기자의 박정희 회고록에 대한 책 나온 거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보면 처남이신 김흥수장군하고 그 때 두분하고 또 몇분이 쿠테타를 반대하는 쪽에 서서 활동하고 있는 걸 저지할려고 하는, 라이언군단장하고 연결돼 있던 걸로 얘기를 해가지고.. 강영훈 (이하 강) : 모르는데... 예컨데... 누구?.. 더보기
강영훈 전 총리 증언 - 1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 동영상으로, 녹취는 블로그 관리자가 직접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괄호 안의 시간은 녹취하지 못한 재생시간입니다만, 블로그 내첨부된 동영상은 편집본으로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10초 정도 차이가 납니다) 추후 수정의 용이를 위해 그대로 남겨둡니다. 허동현 (이하 허) : 장면총리를 처음 만나시게 된 게 미국에서 만나시게 된거죠? 강영훈 (이하 강) : 그렇습니다. 허 : 그 때의 그 장총리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얘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강 : 장총리님을 처음 만난 것은 물론 뉴욕인데 1950년 입니다. 1950년 10월달에 내가 뉴욕엘 갔어요. 뉴욕에 뉴욕 해럴드 트리비언이라는 신문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연례 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