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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장면 박사 서거를 애도함 - 조재천


조재천(曺在千, 전 법무 장관)

 1966년 6월 4일 하오 4시 50분 ‘자유 민주의 별’이 또 하나 떨어진 슬픈 시각입니다. 운석 선생의 마지막 숨결을 지켜 본 재천은 옷깃을 여미며 영전에 엎드려 웁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하고, 또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지만, 막상 선생께서 운명하시고 보니 진정코 사실로 믿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 전까지도 느낄 수 있었던 따스한 호흡이 멎어지셨다니 놀랍고 슬픈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정치적 생애는 형극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시어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으시고, 자유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준행하는 정치적 선각자로서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서서 불의와 독재와 싸우셨습니다. 개인적 폄핍(貶乏)을 받거나 정치적 핍박을 당하실 때도 누구를 욕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느님의 섭리에 좇아 올바르게 사시려 했으며, 구국 제민에 전심 진력(專心盡力)해 왔습니다.


 선생은 이른바 ‘강력한 정치가’라고는 일컬어지지 않았지만,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 정치를 구현해 보자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심 성의껏 애쓰신 양심적인 정치가였음에는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타율적 힘에 의한 외형적 질서보다는 책임 있는 자유를 바탕으로 삼는 합리적인 질서 속에서 조화로운 발전을 꾀하시던 지도 이념은 때로는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피상적 관찰자로부터 무능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지만, 후일의 민주 헌정사는 그 진가를 정당하게 평가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더욱이 선생께서 이 나라 건국과 민주 발전에 기여하신 보람과 반독재 호헌 투쟁에 바치신 피눈물 나는 공적은 연면(連綿)한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제헌 국회 의원으로서, 유엔 총회 수석 대표로서, 초대 주미 대사로서, 국무 총리로서, 몸소 창건하신 민주당 대표 최고 위원으로서, 부통령으로서, 그리고 혁명의 결과로 성립된 내각 책임제 헌법하의 국무 총리로서 파란 많은 정치적 역정 속에 아로새겨진 가지가지 기쁘고 쓰라린 일들을 생각하니 당신 한 분의 인생 경로가 아니라 고달픈 민족사를 되새기는 듯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추모의 정 더욱 간절해집니다.


 민주 합헌 정부의 수반으로서 혼란의 고비를 넘어 모든 기틀을 바로잡아 갈 무렵, 불의의 정변을 만나 주어진 임기를 못다 채우고, 따라서 원대한 경륜도 못다 펴신 채 물러섰지만, 선생께서는 누구를 탓함이 없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시고 칩거와 자숙으로 불우한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온갖 비난과 공격을 받으시면서도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건만, 일체 침묵으로 일관하시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전념, 오로지 인간 영혼의 구원을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5·16 후 이른바 이주당의 반혁명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감옥으로 가실 때에 “5·16 후 많은 분들이 감옥에 가서 고생하는데 이유야 어떻든 나도 가야지. 그래야만 나의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오랜 병상에 누워 계실 때에도 나의 장래를 염려하시고, 지난날 동지들을 걱정하시면서 성경을 외우시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선생은 이제 영원히 잠드셨습니다. 비난과 박해와 음모가 없는 평화의 세계, 영생의 나라로 가셨습니다. 권력에 연연치 않고 민권 신장에 헌신한 진정한 정치 지도자 한 분이 하느님의 곁으로 가시는 이 마당에 우리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이 나라에 자유 민주주의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도록 분발할 것을 기약하는 바입니다.


 선생이여! 하느님의 곁에서 영복을 누리소서.

(1966. 6. 5. 한국 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