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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1.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 1952년 8월 이 대통령은 발췌개헌에 의해 직선으로 치루어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의도한 대로 다시 당선되었다. 이후 이 대통령은 외생 정당인 자유당을 중심으로 해 독재의 아성을 더욱더 굳건히 쌓아나가기 시작하면서 종신집권의 포석을 놓고 있었다. 1954년 11월 27일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아여 중임(重任)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중심제 개헌안이 재석 203명 중 135명만이 찬성하여 개헌선인 3분의 2선에 이르지 못해 부결되자 이틀 뒤인 29일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를 내세워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의 헌정유린과 폭압통치가 연이어 자행되자 민국당을 비롯한 보수야당 계열은 점차 반독재 투쟁을 위해 힘을 합치기 시작하였다. 1955년 초 민국당과 무소속동지회 소..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0. 제2대 국무총리 시절 운석 선생은 주미대사로 근무 중이던 1950년 11월 23일 제2대 국회에서 148대 6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대한민국 제2대 국무총리로 인준·통과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6·25 전쟁 개입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에 따라 대 유엔 업무를 수행하느라고 귀국을 늦추었으며, 1·4 후퇴 이후 정부가 부산으로 옮긴 뒤인 1951년 월 28일 귀국해 2월 3일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11월 6일에는 맥아더 원수가 중공의 월경을 발표하고, 28일에는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본국으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인준되었으니 곧 귀국하라는 것이다. 나는 귀국할 수 없다는 뜻을 이 박사에게 전했다. 중..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4. 해방 공간 속 : 정치에 투신하다 1945년 8월 15일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는 감격을 맛보았다. 해방이란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의 환희에 찬 희망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커다란 실망과 고통을 준 비극적 역사의 원점이자,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추구했던 ‘근대화’의 본격적 출발점” 이었다. 특히 남한에 있어 해방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이상과 국가적 독립·개화·자강·합리주의·실용주의·과학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근대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본격적 노력의 출발점이었다. [심훈은 1930년 3월 1일에 지은 "그날이 오면"이란 시에서 조국의 광복을 노래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3. 교육자의 길 운석 선생은 1931년 4월 1일 서울 혜화동 소재 동성 상업학교에 부임해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서무주임의 보직을 5년 반 정도를 수행했으며, 1936년 11월 19일에는 교장에 취임한 후 1947년 12월 25일 교단을 떠나기까지 17년간 교단에서 후진 양성에 오 힘을 기울였다. 동성상업학교는 선생이 부임하던 해 남대문 상업학교에서 교명을 바꾼 학교로 원래 1907년 서소문 일대의 상인들과 선각자들이 힘을 모아 설립한 민족사학인 소의(昭儀) 학교가 그 모체다. 소의 학교는 1920년 소의 상업학교로 성장하였고 1922년 천주교 교단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남대문 상업학교로 개명하였으며, 1929년부터는 학교 내에 중등과정의 신학 예비학교(소신학교)를 신설하여 상업 전공의 일반 학생을 갑조(甲組), 소..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2. 평양교구 확립을 위해 봉사한 5년 운석 선생을 비롯한 장발, 장정온, 김교임 등의 미국 유학은 미국 메리놀 전교회의 한국 진출과 밀접한 관련하에 뮈텔 주교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뮈텔 주교는 미국계 개신교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는 평안도 지방―1923년 당시 총인구는 2,441,400명, 천주교 신자 4,800명, 개신교 신자 41,500명―에 대한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위해 미국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진출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23년 5월 운석 선생이 미국 유학 시 도움을 받았던 메리놀 소속의 방(P. J. Byrne) 신부가 교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내한하는 등 본격적인 전교활동에 돌입하였다.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은 운석 선생 일가의 헌신적 도움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2대 평양 교..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1.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 참석 조국 복음화의 꿈을 펼치다 : 신앙인과 교육자로서의 활약 운석 선생은 미국 유학생활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보며 더욱 나의 언행을 종교적 양심에 비추어 보고 행동하는 습성을 길렀으며, 일제 아래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민간 교육사업이 더욱 효과적이며 첩경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고, 민족 도덕을 양성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겠다고 깨닫게 되었다”한다. 따라서 선생은 귀국 후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 장래를 위해 교육사업과 천주교 전파를 위한 교회활동에 몰두함으로써, 나라 잃은 민족의 정신적 독립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 천주교 청년회 대표로 참석 1925년 6월 20일 5년여에 걸친 미국 유..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0. 맨해튼 대학 입학 구한말 이래 1920년대까지 미국에 유학했던 한국 학생은 100명에 미달하였으며, 운석 선생이 유학한 당시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은 10명 미만이었다. 선생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측 성직자들의 조언을 받아 미국 내에서 교육을 사명으로 하는 유명한 남자수도회(Christian Brothers) 소속 수사들이 경영하는 규모는 작지만 내실 있기로 정평이 난 뉴욕 소재 맨해튼 대학(Manhattan College)에 1921년 9월 19일에 입학해 1925년 6월 4일 학사학위(B.A.)를 받았다. 당시 선생은 일종의 “근로장학생”으로 학비 일부를 지원 받았지만, 모자라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간을 쪼개 육체노동에 나서야 했다. 선생은 언어장벽과 고학의 어려움으로 인해 1923년 8월에는 성 빈..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9. 신앙의 실천 : 성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운석 선생의 미국 유학은 세족적 지식의 습득을 통한 일신의 영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타는 신앙에 대한 갈구에서 단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가톨릭 신앙생활, 즉 사도적 생활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완덕(完德)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베나드 스쿨에 재학 중이던 1921년 8월 28일 운석 선생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했으며, 다음해 9월 24일 세자 요한(St. John Baptist) 성당에서 프란치스코를 수도 명으로 서원(誓願)하였다. 교회의 정의에 따르면, 수도회의 제3회는 “세속생활에 적합한 방법으로 일반 신자들보다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더 추구하기 위하여 서약한 가톨릭 신자들의 단체”로서 회원들은 “재속신분으로 있으면서, 성령으로 ..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8. 메리놀 외방 전교회와의 만남 운석 선생이 유학을 꿈꾼 이유는 세속적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을 좀 더 연구하고 자신의 수련을 쌓는 한편 일제의 피압박민족인 된 이 나라 국민들에게 참된 교육을 시켜 후일에 천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톨릭을 전교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운석 선생은 1920년 3월 21일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같은 해 미국 유학 길 오른다. 일제는 식민통치 전기간에 걸쳐 한국인이 서구에 유학하여 수준 높은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인이 일본 이외의 다른 선진국으로 유학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특히 선생이 회고하는 바와 같이 그가 유학을 결행한 1920년은 삼일운동 직후였던 관계로 더더욱 미국행이 어려웠다. “평소에 바라고 기다리든 도미는 드디어 1920년에 실현되었다..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7. 최초의 교육 경험 :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강사 1918년 4월 운석 선생은 용산 예수 성심(聖心) 신학교에 강사로 취직함으로 인해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에는 야간부로 적을 옮겨 계속 수학하였다. 운석 선생은 이 신학교에서 1918년 4월부터 약 2년 이상 근무하면서 주로 예과(豫科)의 보통과목을 교수하였다. 선생은 약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배가 불과 3~4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 신학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선생이었다 한다. 다음은 당시 선생에게 배운 노기남 대주교의 회상. “그는 국어, 수학 등 세속 과목을 담당하여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는 그때 수원고등 농림학교를 갓 졸업한 약관의 청년이었지만, 이미 신학교에 초빙교수로 초대될 만큼 신앙이 깊고 인격이 높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개화기였던 당시라 새 학문을 배운..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6. 유학을 위해 들어간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 운석 선생이 영어학습에 열중하였고 미국 유학을 단행한 이유는 농림학교 재학 시절 한 사건을 계기로 세속적 출세욕에서 벗어나 일제의 지배하에 고통받는 민족의 영혼 구제를 위한 천주교 신앙 전파에 자신을 바칠 결심을 하게 된 데 있었다. 그러면 선생의 일생을 가른 사건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선생은 태어나자마 영세를 받고 10세 되던 1908년 인천 답동(沓洞)성당에서 뮈텔(閔德孝, Gustave Mutel, 1854~1933) 주교에게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은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렸을 때부터 “천주교가 골수에 배인” 신자였다. 그러나 농림학교 생도 중 유일한 천주교 신자였던 선생은 개신교 신자인 상급생의 해박한 성경 지식에 자극 받아 천주교 교리에 정통해 볼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 발단은 ..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5. 민족의 복음화를 꿈꾸다 운석 선생은 8세 되는 해(1906)에 인천 성당 부설 사립 박문학교博文學校)에 입학하였다. 선생은 여기서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4년 과정의 심상과(尋常科)와 2년 과정의 고등과(高等科)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그는 주로 한학과 지리와 산수 같은 신문학도 배웠다. 운석 선생이 회상하는 박문학교 시절을 들어보자. “내가 맨 처음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인천에 있던 사립 박문학교였는데 주로 한문〔千字文, 童蒙先習, 小學, 大學, 中庸, 通鑑〕을 배웠으며 신학문이라고 배웠다는 것은 지금의 지리, 역사, 산술(算術) 정도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관복에 제모를 쓴 순경까지도 상투를 틀고 다니는 때였으므로 우리들은 머리를 땋고 학교에 다녔다.” 2) 수원 농림학교 시절에 발아한 천주교 교리 탐구욕 박문학교..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4. 교육·종교적 배경 운석 선생은 교육자이자 문화·종교운동가이며, 외교관이자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생동안 꾸준히 집필과 번역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은 문필가이자 신학 이론가 내지는 교회사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영한교회용어집』(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 1929), 『교부들의 신앙』(1944), 『젬마 갈가니』(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62), 『성 원선시오』(1964) 등의 역서와 『구도자의 길』(1930), 『조선천주공교회약사』(1931),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1964) 같은 저서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육자, 외교관, 정치가로서 활약하면서 자신의 견해나 활동 등에 관련된 글들을 신문지상이나 잡지에 끊임없이 게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3. 아버지로서의 운석 선생 [위의 사진은 어린 시절 운석 선생의 모습으로 직접 오려서 붙여 놓으신 것이다. 운석 선생 부부는 1918년 첫 딸 명숙(明淑)을, 그리고 1920년에 아들 영(英)을 얻었으나, 둘 다 돌과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잃고 말았다. 이후로 운석 선생은 진(震, 1927), 건(建, 1932), 익(益, 1933), 순(純, 1935), 흥(興, 1939) 5남과 의숙(義淑, 1930), 명자(明子, 1941) 2녀를 얻어 무사히 길러 내었다.] 운석 선생은 선각한 부친의 지도하에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는 신지식을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독신한 신앙생환을 바탕으로 안정된 내면세계를 영위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운석 선생은 이러한 자신을 바탕으로 자기 수양과 자녀 양육 및 부부생활 즉, 수신과 제가에 .. 더보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 일생의 반려, 김옥윤 여사와의 만남 선생의 가족은 1907년 인천 화촌동(花村洞 8통 6호)으로, 그리고 1915년에 서울 정동(貞洞 20번지)으로 이사하였다. 선생의 나이 18세 되던 1916년 서울 중림동(中林洞) 성당에서 부친이 간택한 천주교 집안인 김상집(金商集) 씨의 막내딸로 당시 16살의 김옥윤(金玉允, 1901~1990)여사와 결혼하였다. 선생이 회고하듯이 평생의 반려를 맞은 것이었다. “내가 걸어온 길 가운데 그 중 중요한 하나가 나의 결혼이라고도 하겠다. 아내를 맞음으로써 내가 입신하는 데 있어서 합심하여 같이 노력할 수 있는, 즉 다시 말하면 나의 모든 일을 돌보아 줄 사람을 구한다는 데서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김옥윤 여사는 중림동 성당 부속 가명학교(加明學校)를 나온 것 이외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않..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