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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Ⅳ. 침묵의 세월 - 결언(結言), 침묵 속의 기도 능력과 덕이 없는 사람이 나라 일을 맡았다는 것에 스스로 도의적 책임을 느끼는 바이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잘해 보려고 있는 힘을 다 써 보았으나 결과가 이쯤 되고 보니 할말도 없다. 민주당의 집권 이래 모든 악조건하에서도 온 정력을 다 바쳐 가며 치적을 올리려 노력한 흔적은 1961년 초에 발표한 ‘중점적인 정부 시책 7개 항목’과 그 다음 발표된 ‘정치 백서’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와서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또 보복하려 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어떻든지 하느님이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 주시기만 바랄 뿐이다. 내가 국민 앞에 저지른 잘못은 속죄의 심정으로 사과할 뿐이다. 8개월이라는 기간 국정을 맡았다가 무능하다는 말을 들으며 물러나 앉은 나.. 더보기
Ⅳ. 침묵의 세월 - 오직 사학(史學)의 평가만이 그러면 이처럼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라 하여 이를 총칼로 전복시키고 들어선 군사 정권과 그 연장인 현 공화당 정권이 5년이란 장장 세월간에 과연 얼마나 ‘유능’하고 ‘깨끗’하게 나라를 잘 다스려 국리 민복을 가져왔는가? 그들이 처음 내걸었던 소위 ‘혁명 공약’은 그대로 잘 지켰으며, 민권의 자유가 옹호되고 만백성이 더 잘살게 되었는가? 정복을 당한 내가 말하기보다 이에 대한 가치관을 1964년 1월 5일 박순천(朴順天) 씨가 삼민회(三民會) 대표로 국회에서 발언한 정책 기조 연설에서 들어 보기로 하자. “5‧16은 일부 극소수 군인이 정권욕에 사로잡혀 헌정을 중단하고 군사적인 독재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4‧19와는 본질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독재의 재등장이라는 의미에서 5‧16은 4‧19에 대한 .. 더보기
Ⅳ. 침묵의 세월 - 5·16 비화 한때 ‘3월 위기설’이니 ‘4월 위기설’이 있었지만, 이는 장 정권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사람과 어느 기자의 추궁에 넘어간 모(某) 인사의 발언을 기자가 왜곡 보도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모든 혼란이 종식되고 의욕적인 제2 공화국이 튼튼한 기반 위에 설 준비가 끝난 때였다. 5‧16 일주일 전에 나는 군 일부에서 군사 쿠데타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전에도 2‧3차 다른 부류의 쿠데타 모의가 있다는 미확인 정보를 입수하고 비밀리에 내사케 한 일이 있었다. 내사 결과 확실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 모의가 전연 없었는지 내사가 철저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그전의 2‧3차 모의설은 불발이었다. 그러던 차 이것이 4번째의 정보였다. 나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 더보기
Ⅳ. 침묵의 세월 - 집권 18일만의 쿠데타 모의 5‧16과 함께 이날, 이때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대외적인 발언을 삼가해 왔다. 누구보다도 책임감을 느껴서 정치를 잘했느냐 못했느냐에 대한 것은 후일 사가(史家)의 비판을 받을 일이지만, 여하튼 도의적으로 보아 무거운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5‧16 정변이 일어난 동기가 ‘장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하여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혁명’이라고 널리 선전되어 왔음은 이미 구문에 속한다. 무엇이 무능하고, 무엇이 부패였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군사 혁명 비사(秘史)’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집권한 지 18일만에 정권 전복의 모의가 시작되고 있다. 집권 18일만에 대체 무엇을 어쩌자는 셈이었을까. 그동안에 부패와 무능이 나타나고 있었던가? 아니면 부패와 무능을 미리부터 예언할 수 있었다는 .. 더보기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8개월 집권 자가 비판 12년 간의 독재에서 벗어난 전국민은 새 민주당 정권에게 큰 기대를 가졌다. 자유당 치하에서 억압되었던 자유가 민주당 정권에서는 그 공약한 바를 지켜 완전히 허용될 것을 국민들은 바라고 있었다. 사실 민주당 정권은 이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를 누리려는 국민의 의욕을 막을 수 없었다. 또 막아서는 안된다. 민주당이 4월 혁명의 선도적 역할로 그 길을 닦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직접 혁명의 주체가 되어 정권을 쟁취하거나 이양받은 것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국민에게 강력한 시책을 강구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경찰은 4월 혁명 때 발포자라는 좋지 못한 인상과 부정 선거의 주구라는 누명을 벗지 못한 채, 국민으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던 관계로 처음부터 강력한 치안력을 발휘하기가 .. 더보기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세칭 청와대 4자 회담 민주당의 분당으로 국민의 신망을 잃어간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책을 면할 길이 없었다. 계속되는 사회적 혼란과 정국의 긴장 상태를 미력으로나마 시정해 보고자 발버둥치고 있었을 무렵, 곽상훈 민의원 의장의 제의가 있어 내가 몇 차례 대통령을 방문한 적이 있다. 때는 1961년 3월 23일이다. 말썽 많은 정계에도 새로운 도약대가 마련되기를 바란 것은 청와대 윤보선 대통령이나, 민‧참의원 양의장이나, 국무 총리나 다 똑같았을 것이다. 내가 청와대에 도착해 보니, 윤 대통령을 비롯하여 곽 의장과 참의원 의장 백락준 씨 외에도 민주당 구파측의 중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날 논제도 내가 연락받고 온 것은 반공을 위한 국민 운동을 전개해 보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화기 애애한 가운데 그런 얘기가 교환되었다. 그.. 더보기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일반의 의혹을 해명하며 8개월 간의 민주당 집권을 통하여 일반 국민에게 남긴 인상이 반드시 소위 ‘무능’과 ‘부패’일까? 혹자는 감투 싸움이 빚어 놓은 추태로 말미암아 국민의 신망을 잃고 말았다는 말도 한다. 당내 신‧구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감투 싸움이라는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부패하지는 않았다. 소위 중석 사건이 장 정권 부패의 일면이라면, 세상에 알려진 얘기야말로 터무니없는 허위 날조였다. 국회에서 특별 조사 위원회까지 구성해 가지고 여러 모로 파헤쳐 보았으나 결국 ‘태산 명동(泰山鳴動)에 서일 필격(鼠一匹格)’도 안되고 말았다. 원래 꼬투리가 없는데 무엇이 나오겠는가. 한국의 광산을, 나중에는 땅덩어리 전부를 팔아먹은 듯한 의혹을 받게 만든 이 사건은 정말 허무 맹랑한 얘기였다. 당시의 대한 중석 사장.. 더보기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경제 제일주의 정책 1961년 3월 8일 국무원 사무국에서 이 법안을 성안했을 때 범야 세력은 반공법 반대에 극한 투쟁을 선언하고 나왔다. 이것은 3월 11일이었다. 3월 22일에는 혁신계가 서울, 대구 등지에서 반공법, 데모 규제법 등 소위 2대 악법이라 하여 반대 데모를 벌려 정국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정부의 새로운 조처에 반대한 세력에는 물론 일부 좌익계가 혼란 조성을 위해 가담했지만 3월 30일 보안법 개정안, 데모 규제법이 국회에 제출되었을 때 당시의 야당 세력은 물론, 민주당 구파측에서도 심한 반발을 일으켰다. 그들의 대다수는 이 법안이 자신들을 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 성안한 것이라고 비난하게 되었으니 협조를 바랄 수도 없었다. 물론 이 법안이 관대한 내용이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거니와 양식.. 더보기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자유하의 갖가지 시련 지나간 얘기지만, 제2 공화국 초창기에 고개를 든 민주당 자체 내의 보이지 않는 세력 다툼을 제1선에서 당하는 나로서는 지긋지긋한 시련이었다. 내각 책임제라면 연대 책임하에 생사라도 같이할 정치적인 기본 자세가 요청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이미 분당되어 버려 협조는커녕 비난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특히 청와대는 신민당 인사들을 끼고 장 정권의 타도를 공공연히 주장하기에까지 사태가 돌아가니 나라가 잘되어 갈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자기네 구파에 장관 자리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 하여 몇 주일 만에 개각까지 단행해 놓으니까, 이번에는 모두 시시한 자리만 골라 주었다고 트집을 하며 일각에선 계속하여 장 정권 타도를 모의하니, 제2 공화국은 어디로 갈 것이란 말이냐. 국민들의 주시를 받아 가며 신‧구 세력.. 더보기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조각의 참담한 진통 국무 총리가 된 후 내게 닥친 어려운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조각에 임하여 특히 큰 고뇌를 맛보았다. 제2 공화국 초대 내각에 있어서 이번 내각은 내각 책임제하의 첫 내각인 만큼, 각원(閣員) 전원이 똑같은 연대 책임을 지고 생사라도 같이할 동지들의 굳은 단결로 안정 세력을 이룩해야겠다고 생각되어 인물 본위로 엄선하기로 하되, 신‧구 일색으로만 하지 않고 각계를 망라할 계획으로 널리 교섭을 벌여 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구파 인사들은 신파 총리하에서 생사라도 같이할 동지적 협조의 기색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헌주(鄭憲柱) 씨 한 분만이 우선 동조하여 주었을 뿐이다. 그외 당원이 아닌 외부 인사 중에서 오 문교(吳文敎), 박 농림(朴農林)을 비롯하여, 국방, 법무 차관들도 무소속 인사들을 등용했다.. 더보기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국무총리 인준 경위 4‧19 학생 혁명으로 12년 독재의 아성이 무너지고, 제2 공화국을 수립해야 할 무거운 과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야당인 민주당에 의하여 독재와 투쟁하는 민중의 열도가 높아졌고, 부정 선거에 일대 충격을 받은 민주 대열의 선봉인 이 나라 학생들은 생명을 내걸고 불의에 항거하여 잃어버린 민권을 찾는 데 역사적인 기여를 하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우리 야당은 지속적인 대여 투쟁을 통하여 일반 국민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정권이 무너짐과 동시에 개헌을 먼저 하느냐, 총선거를 먼저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논란이 거듭되다가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민‧참 양의원 총선거에 들어갔던 것이다. 5월 5일 국회에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 제출되어 즉일로 공고되었으며, 6.. 더보기
Ⅱ. 부통령 시절 - 민권 승리를 위한 부통령직 사임 4월 18일 데모를 끝내고 귀교하는 학생들을 깡패들이 습격한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고, 연일 데모가 발생하게 된 것은 자연적인 울분의 폭발이었던 만큼 아무도 이를 막을 자가 없었다.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는 외침은 끊임없었다. 4월 22일 나는 기자 회견을 가지고 비상 사태를 타개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재선거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전국의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원에 따라 선거를 다시 실시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자유당측에서는 이를 응낙할 리 만무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우리가 내각 책임제를 주장하며, 원내에서의 간접 선거를 실시하자고 하는데 다시 돈 들여 총선거를 할 필요가 어디 있오?”라는 주로 한민계 인사들의 반대 의사도 있었다. 정치적인 복선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끝.. 더보기
Ⅱ. 부통령 시절 - 유석 서거와 3‧15 부정 선거 1960년 2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을 한달 앞두고 나는 또 기구한 운명을 맞이했다. 복부 수술차 도미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서거(逝去)했다는 비보였다. 선거전이 한창 치열할 무렵인 1월 19일 유석은 기자 회견에서 “앞으로 입원할 생각은 없으며,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선거 유세에서 한 시간 반 정도는 연설할 자신이 있다. 장(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입원할 생각은 없으며, 수술 진단 운운은 모르는 일이고, 의사로부터 통고받은 바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1월 22일 조 박사의 주치의는 기자들과 회견하고 “조 박사의 그 위장에 관한 X선 시현(示現)으로 인하여 개복 수술을 즉시 실시할 것을 요한다”는 요지의 진단서가 발표되어, 1.. 더보기
Ⅱ. 부통령 시절 - 잇따른 부통령 후보의 액운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 실권 없는 부통령직에 앉아 있기가 바늘 방석이었다. 이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59년 10월 26일, 민주당으로서는 입후보자 지명 대회를 열게 되었다.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와 함께 러닝 메이트로 선출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잡음이 당내에서 떠돌았다. 소위 신‧구파의 세력 다툼이 조금씩 고개를 들게 된 슬픈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민주당 내의 신‧구파 문제는 창당 시에 이미 그 씨가 배태(胚胎)되었던 것이다. 민주당이 결성될 무렵에 한국 민주당의 후신인 민주 국민당은 국회에서 15석밖에 차지하지 못하여, 당시 그대로는 도저히 야당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 민주 국민당이 발전하여, 대(大)야당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신진들과 합세하여 신당을 결성해야 할 운명이었다. .. 더보기
Ⅱ. 부통령 시절 - ‘죄없는 죄인’ 부통령 부통령에 당선된 후에 받은 구박과 설움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8월 15일에 있은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내외 귀빈을 소개하던 이 박사가 그 좌석의 말단까지 모두 소개하면서도 부통령인 내 소개는 빼놓았다. 남산의 국회 의사당 기공식에 내외 귀빈들의 좌석은 모두 준비되었는데 부통령에게는 청첩까지 보내고도 막상 가 보니 좌석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시청 앞에서 부통령 공판까지의 도로 포장만 제외되는가 하면, 외국 귀빈들의 부통령 면회는 여러 가지로 방해까지 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고, 아시아 반공 연맹 회의 때 왔던 외빈들이 나를 예방하려 할 때에 관례적으로 제공해 주기로 된 자동차도 내주지 않아, 그들이 스스로 자동차를 구하거나, 호텔에서 순화동 공관 까지 걸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나마 부통령 공관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