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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운석 장면 박사 묘비문


박종화(朴鍾和)

 형산(荊山)의 흰 옥(玉)은 그 빛깔이 본시 조촐하고 깨끗하거니와 부서질 때 그 소리 더 한층 맑고, 깨끗하고, 여수(麗水)의 황금(黃金)은 그 광채(光彩) 본디 찬란(燦爛)하거니 떨어질 때 그 음향(音響)이 더욱 쟁연(錚然)하게 세상을 진동하는 법(法)이다. 전(前) 국무 총리(國務總理) 운석(雲石) 장면(張勉) 요한 박사(博士)가 서기(西紀) 1966년(一九六六年) 6월(六月) 4일(四日)에 홀연 명륜동(明倫洞) 자택(自宅)에서 세상을 떠나니 가족(家族)들의 슬픔은 말할 것 없고,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슬퍼했다. 공(公)의 백옥(白玉) 같은 몸가짐을 아까워하고, 공(公)의 황금(黃金)같이 빛난 업적을 돌이켜 생각했던 것이다. 정부(政府)와 국회(國會)는 공(公)의 장의(葬儀)를 국민장(國民葬)으로 받들 것을 결정(決定)하고, 6월(六月) 12일(十二日) 상오(上午) 11시(十一時) 서울 운동장(運動場)에서 십만 조객(十萬弔客)의 오열(嗚咽)하는 울음 속에 영결식(永訣式)을 거행(擧行)한 후, 포천(抱川) 천보산(天寶山)에 안장(安葬)하니 향년(享年)이 68세(六十八歲)다.

 공(公)의 본관(本貫)은 인동(仁同), 부친(父親)은 구한국(舊韓國) 부산 세관장(釜山稅關長) 장기빈 씨(張箕彬氏)요, 모친(母親)은 장수(長水) 황씨(黃氏) 황(黃) 누시아 여사(女史)다. 서기(西紀) 1899년(一八九九年) 8월(八月) 28일(二八日)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출생(出生)하니 공(公)은 장자(長子)다. 아우 발(勃)과 극(剋)이 있다. 1916년(一九一六年) 5월(五月) 20일(二十日) 경주(慶州) 김상집 씨(金尙集氏)의 장녀(長女) 옥윤(玉允)과 결혼(結婚)하여 이학 박사(理學博士) 진(震), 건(建), 익(益), 순(純), 흥(興)의 五남(男)과 의숙(義淑), 명자(明子) 두 딸을 두었다. 공(公)은 소년(少年) 때 벌써 큰 뜻을 품고, 1917년(一九一七年)에는 수원 농림 학교(水原農林學校)를 졸업(卒業)한 후, 곧 도미(渡美)하여 뉴욕 맨해튼 대학(大學)에서 교육학(敎育學)을 전공(專攻)했다. 나라에 돌아와서는 인재 양성(人材養成)이 큰 임무(任務)라 생각하고, 힘을 후생(後生) 교육(敎育)에 기울였다. 나라가 광복(光復)되자, 공(公)은 민주 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 입법 의원 의원(立法議院議員), 제헌 국회 의원(制憲國會議員)에 선출(選出)되어 건국 대업(建國大業)에 참획(參劃)하였고, 대한 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가 수립(樹立)되자, 1948년(一九四八年) 12월(十二月) 파리에서 개최(開催)된 제3차(第三次) 유엔 총회(總會)에 한국(韓國) 수석 대표(首席代表)로 참석(參席)하여 공산 진영(共産陣營)의 맹렬(猛烈)한 반대(反對)를 물리치고, 대한 민국(大韓民國) 승인(承認)을 얻어 찬란(燦爛)한 공적(功績)을 거두었다.


 1949년(一九四九年) 1월(一月)에는 초대(初代) 주미(駐美) 전권 대사(全權大使)가 되어, 건국(建國) 초기(初期) 국제 외교(國際外交)의 기초(基礎)를 닦았고, 1950년(一九五○年) 6·25(六·二五) 남침(南侵)을 당(當)하자, 불면 불휴(不眠不休) 동분 서주(東奔西走) 기민 과감(機敏果敢) 외교 활동(外交活動)을 전개(展開)하여, 유엔군(軍)의 급속(急速)한 출동(出動)을 얻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던 조국(祖國)의 위기(危機)를 모면한 것은 대한 민국(大韓民國) 역사상(歷史上) 불멸(不滅)의 금자탑(金子塔)을 세운 것이라 하겠다.


 공(公)은 다시 1951년(一九五一年) 가열(苛烈)한 전쟁(戰爭) 속에서 국무 총리(國務總理)에 임명(任命)되어, 난마(亂麻)와 같이 어지러운 국정(國政)을 수습(收拾)하여 전쟁(戰爭)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1952년(一九五二年)에 한때 야인(野人)이 된 공(公)은 민주주의(民主主義)가 위기(危機)에 떨어지고, 일당 독재(一黨獨裁)가 형성(形成)되어 가는 것을 앉아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유석(維石) 조병옥 박사(曺炳玉博士) 등(等) 동지(同志)와 함께 민주당(民主黨)을 창건(創建)하여 국민(國民)의 열광적(熱狂的)인 지지(支持)를 받아 부통령(副統領)에 당선(當選)되었다.


 슬프다. 1960년(一九六○年)에 3·15(三·一五) 부정 선거(不正選擧)가 감행(敢行)되자, 공(公)은 국민(國民)의 선두(先頭)에 서서 항거(抗拒) 분투(奮鬪)하였고, 4·19(四·一九) 혁명(革命) 후(後)에는 7월(七月) 29일(二九日) 총선거(總選擧)를 거행(擧行)하여 내각 책임제(內閣責任制) 국무 총리(國務總理)로 민국(民國)의 정권(政權)을 장악(掌握)하였다. 공(公)은 민주 정치(民主政治)를 수립(樹立)하고, 경제 제일주의(經濟第一主義)를 표방(標榜)하여 불철 주야(不撤晝夜) 심혈(心血)을 경주(傾注)하던 도중(途中), 뜻밖인 5·16(五·一六) 사태(事態)로 큰 경륜(經綸)을 펴지 못한 채 정치(政治)에서 물러나, 두문 불출(杜門不出) 민족(民族)의 번영(繁榮)을 위(爲)하여 옥(玉) 같은 마음으로 기도(祈禱)와 신앙(信仰)에 살다가 병환(病患)으로 장서(長逝)하니, 깨끗한 교육자(敎育者)요, 근엄(謹嚴)한 종교인(宗敎人)이요, 불굴(不屈)의 정치가(政治家)의 생애(生涯)는 천주(天主)의 부름을 받아 하늘 높이 흰 구름을 탔던 것이다.


 공(公)은 1921년(一九二一年) 8월(八月) 28일(二八日) 성(聖) 프란치스코 제삼회(第三會)에 입회(入會)하여 1922년(一九二二年) 9월(九月) 24일(二四日) 회원명(會員名) 프란치스코가 되고, 1925년(一九二五年) 7월(七月) 한국(韓國) 천주교(天主敎) 청년 대표(靑年代表)로 로마에서 있었던 한국 순교자(韓國殉敎者) 시복식(諡福式) 참열(參列), 교황(敎皇) 알현(謁見), 1963년(一九六三年) 9월(九月) 1일(一日)에 교황청(敎皇廳) 훈장(勳章)을 수령(受領)하였고, 1963년(一九六三年) 9월(九月) 19일(十九日) 한국(韓國) 프란치스코 제삼회(第三會) 총회장(總會長)에 피선(被選)되고, 1966년(一九六六年) 4월(四月) 16일(十六日)에 프란치스코 회(會) 제일 회원(第一會員) 특전(特典)을 수령(受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