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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오호(嗚呼) 운석 장면 선생 - 최석호


최석호(崔奭浩, 신부)

 운석 장면 박사가 서거하였다. 마치 믿음직스럽게 튼튼한 바위와도 같이 우리 교회 생활권 내에 우뚝 솟아 있던 존재라 이미 장례까지 끝난 오늘날에도 그분의 죽음은 선뜻 곧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분은 결코 전면에 떠들썩하게 나서지 않는다. 항상 은근히 뒤에 숨어서 어떤 때는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겸손하게 저 만큼 후면에 나가 앉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 겸손하고, 성실하고, 품위 높고, 부드럽고, 근엄한 시선은 잠시도 끊이지 않고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각에도 운석 선생은 아직 명륜동 자택에 앉아서 사랑과 근심으로 우리 교회를 바라보고 계신 것만 같다. 그러나 운석 선생은 가시었다. 그 근심과 사랑에 사무치는 시선은 우리에게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허전하다. 그러한 분은 그냥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의지가 되었건만, 우리는 불행히도 신앙 생활 주변에 큰 봉우리 하나를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편에서 생각한 것이지, 운석 선생 편에서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운석 선생은 생활의 목표가 이 세상이 아니고 저 세상 하느님 대전이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부통령을 지내고 국무 총리직에 취임한 것도 모두가 하느님을 위하고 저 세상을 위한 것이지 이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비록 선을 위한다는 구실하에서도 악을 행하지 않으셨고, 하느님을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아까운 것 그리운 것이 하나도 없으시었다.


 그러한 분이 이제 이 세상 공로가 차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이 오매 불망하시던 하느님 대전으로 가시었으니 그분이야 무슨 불만이 있으시랴.


 운석 선생이 교회를 위해서 헌신 진력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겠지만, 그분이 어떻게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은 세상에서 잘 모른다. 왜냐하면 그분은 언제나 뒤에 숨어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먼저 운석 선생은 ‘가톨릭 청년’지의 창간 공로자이시다. 그분은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33년 가톨릭 청년회장으로 계셨고, 그때 그분의 발기로 ‘가톨릭 청년’지가 발간된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운석 선생은 ‘가톨릭 청년’지와는 밀접한 사이였고, 그분은 그만큼 본지를 아끼고 사랑하시어 바쁘신 중에도 기고를 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시종 일관 음으로 양으로 협조 격려해 주시었다. 이 점에 있어서 본 가톨릭 청년사로서는 남달리 사의와 애도를 금할 수 없다.


 다음으로 교육자로서의 운석 선생을 살펴보면 우리 나라 사제(司祭)의 거의 3분의 2 이상이 선생의 제자라고 한다. 그리고 평신도까지 넣으면 얼마나 많은 인재가 선생의 증후한 인격의 그늘에서 자라났는가.


 그분의 깊은 신덕과 높은 교양은 우리 교회 구석구석에 숨어서 지금도 강력한 선의 작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업적은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여기에 최근 만년에 하시던 일만 들어 보아도, 상류층의 성소(聖召) 운동을 목표로 하는 ‘세라 클럽’의 미국 책임자 커프랜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시며 이 조직을 한국에도 조직해 보려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활약하셨고, 학생 회관 건립, 순교 백주년 기념 사업 등 순시(瞬時)도 그분의 진심은 교회 사업에서 떠나는 때가 없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본당인 혜화동 성당 운영 위원장으로 병구를 이끌고 와병 직전까지 회의에 나가 여러 가지로 남김 없는 성의를 기울이셨다.

 운석 선생은 평신도의 표양일 뿐 아니라, 전 교회의 사표이셨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죽음을 서러워하기보다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계승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 다난한 시기에 운석 선생 같은 분을 잃는다는 것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그러나 그분이 이 땅에 뿌린 씨는 너무도 풍성하니 제2, 제3의 운석 선생이 반드시 나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사표이신 운석 선생이여!


 부디 고이 잠드소서.

(1966. 7. 가톨릭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