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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장면 박사의 서거 - 중앙일보


중앙 일보

 제2 공화국의 국무 총리였던 장면 박사가 지난 4일 지병인 간장염으로 자택에서 운명했다. 그는 5·16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나날을 조용한 신앙 생활로 지내다가 끝내 서거했기 때문에, 그의 지난날의 화려했던 정치적 생애는 세인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 민국을 수립하고 육성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 민주 정치를 신장하는 데 있어서 그가 남긴 업적은 불후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건국 초 유엔 총회 수석 대표로 파견되어 유엔으로부터 한국의 승인을 얻는 데 크게 활약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에는 주미 대사로서, 혹은 국무 총리로서 국가 방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후에는 재야 보수 세력의 지도자로서 민권 투쟁과 자유 수호에 앞장섰었다. 제2 공화국 내각 책임제하의 국무 총리로서 정권을 맡았다가 5·16으로 정계에서 물러나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정치적인 불우 속에서 운명하게 된 것이다.

장 박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성실하게, 청렴 결백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것은 세인 공지(共知)의 사실이다. 그는 민주 정치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반독재 투쟁과 민권 신장에 앞장서서 싸웠으며, 우리 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바 컸다.

 그는 4월 혁명에 이어 제2 공화정이 수립되자, 내각 책임제하의 정권의 톱 리더가 되었었지만, 1년도 채 못 되어 정권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었고, 이것이 동시에 제2 공화정의 종식을 가져왔었다.


 장 정권의 단명 붕괴는 4월 혁명으로 국민이 쟁취한 자유와 권리의 폭이 전례 없이 넓어졌는데 적지 않은 국민이 욕구 불만을 폭력 충동으로 노출시키는 환경 속에서 민주 정치를 원리 원칙대로 집행해 나가기는 심히 어려웠었다는 것, 우리 사회에 내각 책임제를 제대로 운영할 만한 정치적 역량이 축적되어 있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민주당이 그처럼 혼란했던 정세하에서 신·구 양파로 갈리어 파쟁에만 영일이 없었다는 것 등에 기인한다. 장 정권의 단명 붕괴를 보고 장 박사의 지도력이 약한 탓이었다고 비난하는 논도 있으나, 상호 대립하는 제 사회 세력간에 심각한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여건에서는 제아무리 강한 지도력을 갖고 있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이를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그처럼 혼란한 사회 환경 속에서 일체의 강권 발동을 삼가고 국민의 자각과 올바른 권리 행사를 인내로써 기다렸다는 점에 민주 정치의 지도자로서의 그 진면목이 있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년 미달의 단명으로 끝난 제2 공화정은 그것을 좋게 평하든 나쁘게 평하든 간에 우리 민족사상 자유와 민주주의의 황금 시대로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수한 환경 속에서 정권을 영도했던 장 박사는 비록 그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길이 기록될 것이다.


 양심적이고, 청렴 결백하고, 교양과 학식이 뛰어났던 장 박사와 같은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는 그의 운명을 애도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고인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1966.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