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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5 -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 결론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 한국 경제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개발계획의 수립은 외국기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유엔한국부흥단(UNKRA)은 네이산(Nathan)협회에 용역을 주었는데, 네이산협회에서는 1953년 3월 「한국경제재건계획」(일명 「네이산보고서」)을 발표했다. 한국인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은 1958년 3월 송인상 부흥부 장관의 발의로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수립 작업이 시작되었다.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장은 부흥부 장관이 당연직 위원장이었으며, 朱源 정위원이 위원장 서리를 맡아 실무작업 책임을 맡았다. 이 위원회에서 「경제개발 7개년계획」의 전반기인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을 완성한 것이 1959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계획’ 의미를 사회주의적 .. 더보기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4 - 국토건설사업의 시행 장면 정권의 국토건설사업 구상은 1960년 10월경부터 이루어졌으며, 미국의 대략적인 지원의사를 타진한 후에 본격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11월 28일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발표하고, 계획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어 12월에는 추가경정예산에 국토건설사업비로 280억환을 계상하기로 결정하고, 12월 28일 국무원 제147호로 국토건설본부 설치 규정을 공포했다. 1961년 2월 10일에는 제149호로 개정하여 국토건설본부를 설치하였으며, 협조기관을 중앙과 지방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어 4월 10일에는 ‘국토건설사업특별회계법’을 제정하여 재정적 뒷받침을 확고히 하였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2월 9일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국토건설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더보기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3 - 경제정책의 기조 (2) 민주당 정권이 경제제일주의를 지침으로 삼고 추진한 일련의 경제정책이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1961년 2월 장면 국무총리는 제1회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자신이 추진하는 경제정책의 기조를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이상 경정예산에 관련하여 중요 시책의 몇가지를 말씀드렸거니와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기조는 질서와 발전이라는 2대 명제에 귀착됩니다. 이 2대 명제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창안이 결코 아니고 다만 질서의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업의 지상명령이라고 하겠습니다. 장면 총리가 말하는 ‘질서와 발전’이라는 2대 명제의 의미는 정치․사회적 안정을 통한 경제 발전의 추구를 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있어서 정치적․사회적 안정보.. 더보기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2 - 경제정책의 기조 (1) 1) 경제제일주의의 천명 민주당 정권은 출발 직후부터 경제문제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경제제일주의’를 정책의 지표로 내세웠다.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9월 30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의 기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제부문 행정에 있어서는 사회복지의 증진을 대목표로 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경제제일주의를 실천하려 합니다. 신정부가 기도하는 바는 첫째로, 과거 부패정권이 취해온 관권경제와 불균형한 산업구조 등을 지양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 둘째로 농어촌 중심의 투융자계획을 증대하고 소득증가를 도모해서 위축된 중소기업의 건전한 운영을 조장함으로써 균형적 산업구조의 형성을 촉진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1961년도 예산편성 지침에서는 경제제일주의 정책의 목표를 다음.. 더보기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1 - 서론 (김기승) 1. 서론 민주당 정권은 1960년 8월 19일 장면 총리가 국회로부터 인준을 받은 때부터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까지 9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이에 비해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군사정권은 30여년 이상 지속되었다. 군사정권은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민주당 정권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각인시켰다. 이런 까닭에 민주당 정권은 파벌투쟁으로 시종한 부패 무능한 정권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되었다. 민주당 정권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경제정책 분야에 대한 부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예를 들면 장면 정권이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했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실천의지도 없었고, 지도력도 없는 정부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경제개발은 군사정권에 의해 처음.. 더보기
제5회 신문 주간 기념 연설 (1961.04.06.) 4‧19는 민주의 가능성 한국 신문인 협회가 제5회 ‘신문의 날’을 맞아 오늘 새로이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다짐하는 이 자리에서, 평소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고 또 국민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의 일단을 피력하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 나라의 흥망 성쇠는 물론, 세계 정세와 역사의 방향까지도 정치가들에게 못지 않게 여러분이 움직이는 ‘매스컴’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는 것은 천하 공지의 사실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그토록 중대한 사명과 책임을 지닌 여러분이 과거 독재 정권과의 과감한 투쟁을 통하여 나이 어린 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사수하고, 억압된 민권을 펴는 데 절대적 공헌이 있는 우리 나라 언론계 대표들이 4‧19 이후의 새로운 정세 속에서 새로운 수평선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보다.. 더보기
회고 - 자유의 고귀한 시련 - 곽상훈(郭尙勳, 전 민의원 의장) 자유의 고귀한 시련 - 곽상훈(郭尙勳, 전 민의원 의장) 하늘이 주지 않는 기회 운석(雲石)과 나와는 인천이 동향인지라 나는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그의 춘부장께서는 인천에서 손꼽히는 어른이었고 나는 젊어서부터 그분의 자제인 운석을 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상면하기는 제헌 국회 의원 시절이다. 나는 진작부터 그의 이름을 알고 있기는 했었지만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훤칠한 인물에 무척 호감이 갔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를 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한결같았다. 사람은 첫인상이 좋아야 한다고 한다. 아마 운석 같은 이를 두고 말한 것 같다. 제헌 국회 시절에 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기생들이 동석한 연회였었다. “장 박사님은 사진에도 미남이신데 사진보다 인물이 더 잘나셨네요.” 기생들이 하는 말이었.. 더보기
운석 시대 7대 사건 - Ⅵ. 민주당 단명 내각 운석 장면 박사 생존 시에는 하고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장 박사가 몸소 체험했던 가장 벅찬 정치적인 사건들을 사건별로 간추려 드라마틱하게 엮어 본다. 픽션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실 위주임은 물론이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허위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기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치 비화를 추적하면서 해명키로 한다. 이 운석 시대의 대사건은 원칙적으로 사건 발생의 순위이며,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운석 기념 출판회에 있음을 밝혀 둔다. 1 참의원 의장 백낙준(白樂濬) 박사는 제2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윤보선 씨에게 무궁화 대훈장을 목에 걸어 주었다. 박수가 터졌다. 민·참 양 의원들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더보기
민주당 부통령 후보 시절 지방 유세 연설 (1960.02.26) 내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간명하고 자연스러운 정치 이념 하나뿐입니다. 즉 정치라는 것은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백성이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 다 같이 평등하게 나라의 보호를 받고, 다 같이 하느님께 받은 기본권, 즉 자유를 자연스럽게 아무 거침없이 쓸 수 있도록 국민을 인도해 나가고 보호해 나가는 이것이 정치인 것입니다. 여기 여러 가지 학설을 붙여서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근본 원인은 그것뿐입니다. 백성을 잘살게 만들어 주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밖에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요. 잘살게 해주면 왈, 이것을 ‘선정’이라 하고, 잘못하면 그것을 ‘악정’이라 그러고, 국민 앞에 좀 잘해 달라는 수임을 맡은 행정부가 책임을 지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