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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장면 박사의 국민장 - 동아일보

 

동아일보



 지난 4일에 지병인 간장염으로 세상을 떠난 전 국무 총리 장면 박사의 장례는 12일에 국민의 이름으로 거행하게 되었다. 5·16 이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오로지 종교적인 신앙 생활만으로 그 마음을 달래 오던 이 실의의 정치인은 끝내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장 박사의 말년은 참으로 불우하였던 것이지만,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는 그가 남긴 혁혁한 업적에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특히 정부 수립 직후에 그는 유엔 총회 한국 수석 대표로서 파견되어 한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얻어 오는 데 공이 컸었고, 더구나 6·25 당시에는 주미 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군을 한국 동란에 참전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리하여 한국 동란도 한 고비를 넘었을 무렵에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국무 총리의 중책을 맡게 되었던 것이지만, 때마침 있은 부산 정치 파동을 계기로 야당 정치인으로서의 투쟁 생활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그 후 4·19에 이르기까지 줄곧 야당의 영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 생활의 공덕으로 장 박사는 4·19 이후에 숙원이던 정권의 자리에 올라앉을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러나 민주당이 신·구파로 갈라져서 서로 정권 싸움에만 여념이 없는 데다가 민주 정치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이해도 또한 부족하였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지 1년도 못 되어 그는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 박사는 인품이 너무 고결하여 정치가로서보다도 학자나 교육가로서 시종하였던 편이 도리어 그분 자신을 위해서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오가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장면 내각을 보통은 약체 내각이라고도 부르면서 웃음거리로 삼는 층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4·19 이후의 장면 내각이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아직 좀더 시일을 두고서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손댈 수 없이 썩어 빠진 소위 구정객들을 바탕으로 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한 허물이, 정부는 좀더 강력하게 이러한 난동을 단속해야 한다는 건의가 빗발치듯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총리는 국민이 자각하여 선도될 것을 기다릴 뿐 민주 원리에 어긋나게 강권 발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장 박사의 이러한 태도는 앞으로 모든 민주 지도자에게 하나의 교훈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당 치하에서 그처럼 아끼고 의지하던 민주 정치가 장면 박사는 이제 모든 세속에서의 욕망을 단념해 버리고 조용히 하느님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충심으로 그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이 땅에서의 그의 생애가 이 겨레에게 많은 교훈을 주게 되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1966.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