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모의 글

운석 장 박사를 애도함 - 김도연


김도연(金度演, 전 국회 의원)


 이제 존경하는 외우(畏友) 장면 박사의 부음에 접하고 보니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나는 그가 오래 살아서 이 나라를 위해 좀더 일을 해주기를 바랐는데, 이제 그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허전한 마음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고(故) 장 박사와 나의 교분은 해방 후 그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 때에도 교육가, 종교가로서의 그의 명망은 지실(知悉)하고 있었으나, 그때는 직접적인 교분은 없었다.


 해방 후 고하(古下), 설산(雪山), 인촌(仁村) 선생 등과 한민당(韓民黨)을 창당할 때 장 박사에게도 입당을 교섭했으나, 그는 교회 일 관계로 입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 박사는 민주 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 과도 입법 의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우리와 함께 반탁 운동을 비롯한 반공 투쟁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내가 장 박사와 두터운 교분을 쌓은 것은 입법 의원 때였다. 그 후 제헌 국회에서도 같이 일을 했고, 민주당 창당 후에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당무에 관해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민주당에 신·구파가 생겨 가끔 말썽이 있곤 했지만, 장 박사는 언제나 온화한 인품으로 당의 인화를 도모했다.


 7·29 총선거 후 민주당은 신·구파로 사실상 분당되어, 국무 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장 박사와 내가 라이벌로 대결하여 내가 3표 차로 고배를 마셨지만, 나는 제일 먼저 장 박사에게 총리 인준을 축하했다. 나는 지금도 그 당시의 국무 총리 지명을 둘러싼 대결 때문에 그와 나와의 교분에 금이 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고(故) 장 박사는 민주주의 정치관에 투철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온후하고 관용한 성격은 동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 왔었다.


 민주당이 신·구파로 갈려 여러 번 어려운 고비를 겪었지만, 반독재 투쟁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힘을 결속해 나아간 데는 장 박사의 탁월한 정치 역량과 관후한 성품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장 박사는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교육가, 외교가, 종교가로서도 이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일제 때 장 박사는 동성 상업 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켰고, 종교인으로서도 우리 나라 천주교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6·25 사변 발발 당시 주미 대사이던 장 박사가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로, 유엔 등으로 동분 서주하면서 유엔군을 출병케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장 박사가 외교가로서도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잘 입증하는 것이다.


 장 박사는 해방 후 제헌 국회 의원, 주미 대사, 국무 총리, 부통령, 민주당 대표 최고 위원, 내각 책임제 국무 총리 등 찬란한 이력을 가졌지만, 그의 탁월한 정치 역량과 포부를 마음껏 정책 면에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못 가졌다는 것은 불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장 박사는 뛰어난 정치 역량과 경륜을 지녔지만 부통령으로 있을 때는 이(李) 정권의 푸대접으로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4·19 후 국무 총리가 되었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역량과 경륜을 마음껏 펴지 못하고 물러난 것은 고인 자신도 유한으로 생각하겠지만 우리도 애석하게 생각한다.


 고하, 설산, 인촌, 해공, 유석 등에 뒤이어 이제 운석마저 가니 나의 심정은 삭막하기만 하다. 오늘날 이와 같이 정국이 불안하고 국민 도의가 퇴폐된 이때, 운석같이 인격이 훌륭하고 정치 역량이 풍부한 정치 지도자가 간 것을 생각하니 애통한 마음 그지없다. 끝으로 삼가 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1966. 6. 6. 대한 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