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6.25

운석 장면 일대기 - 18. UN군의 6·25 전쟁 파병을 이끌어내다. 여기서는 운석 선생이 동서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산물로서 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전인 6·25 전쟁을 맞아, 그의 정치적 신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선생이 남긴 “우리는 자유를 수호했다―피어린 6·25 동란의 회고”라는 부제가 달린 「화부서 겪은 6·25」(1954)와 「(한국의 은인) 덜레스 씨를 추억한다: 상 」(1959), 「6·25 동란과 워싱턴」(1965)이라는 3편의 6·25 전쟁 관계 기고문과 당신의 긴박한 현장을 담은 사진과 문서들을 곁들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운석 선생은 6·25 전쟁 발발 두 달전 미국 국방장관 애치슨의 아시아지역에 있어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라인’으로 야기된 국방상의 결함을 태평양 연안국가간의 집단안보체제인 ‘태..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4. 전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전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전황은 날로 불리해 가고, 국군은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했다. 나는 유엔과 미국 정부에 매달려 7월 한 달을 바쁘게 보냈다. 소련은 최초에 꿈꾸던 안이한 한국 점령이 의외에도 유엔 궐기에 부닥쳐 안보 이사회의 보이콧이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이제는 정략을 바꿔 8월 회의에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인 소련 대표 말릭이 이사회에 출석했다. 그는 의장석에 앉더니 대뜸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이사회의 그동안의 모든 결의가 모두 무효임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인즉,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3.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유엔 안보 이사회에서 정전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던 6월 26일(미국 시간 25일) 하오에 주말 여행을 즐기던 트루먼 대통령은 예정을 앞당겨 급거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날 맥아더 장군과 주한 미 고문단에서는 한국군에 실탄이 필요하니, 급히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 국무성 당국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덜레스 씨로부터도 화급한 전문이 도착했다. 6·25가 터지기 사흘 전에 한국을 떠났던 덜레스 씨는 일본에 들러 경도 지방을 관광하다가 맥아더 장군의 급보를 받고 동경으로 돌아왔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전용기로 동경에 비래(飛來)한 덜레스 씨는 한국 사태에 관해 맥아더 장군과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눴다. 평소 한국을 아끼고 뒷받침해 주던 맥아더 장군과 유사시에는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언질을 준 ..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2. 워싱턴에서의 6·25 워싱턴에서의 6·25 6월 25일 밤 9시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있노라니까 AP 통신사의 해리스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해리스 기자의 다급한 목소리는 “북괴군이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한다는데 아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모른다”고 대답한 다음, 혼히 있는 산발적인 전투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이윽고 UP 통신사에서 또 남침 보도가 들어왔는데 사실이냐고 확인하려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국지적인 충돌일 거라고 대답했으나 어쩐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국무성에 전화를 걸었더니 담당 직원이 없어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6월 25일(일요일)이 미국 시간으로는 24일이며, 토요일이어서 주말 여행을 떠난 모양이었다. 국무성..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1.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대한 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수석 대표로 참석, 외교계에 첫발을 내어디딘 나는 1949년 1월 5일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어, 1951년 2월 3일 국무 총리 인준으로 사임하기까지 만 2년 동안을 재직했다. 이 동안에 6·25 동란을 겪은 나는 미국 및 유엔과의 외교 관계를 거의 혼자서 전담하다시피 했다. 6·25 동란과 워싱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6·25의 역사적 배경을 이룬 몇 가지 국제적 사건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6·25 한 해 앞서인 1949년 4월 4일, 워싱턴에서 나토(NATO) 조약이 체결되어 공산 침략의 위협에 대한 서방측의 집단 안전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날 조인식에 초청되어.. 더보기
세계 만방에 호소한다 - 6·25 당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의 연설 1 유엔의 보호 아래 있는 대한 민국은 지금 북한 괴뢰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 북괴의 남침이 여러 지역에서 일제히 감행되었다는 사실에 관한 정식 보고가 본인에게 있었습니다. 서울 북방 40마일 지점인 개성과 옹진 반도가 침략당했습니다. 서울 근교 김포 비행장의 우리 비행기를 기습한 적기 외에도 많은 적기들이 한국의 영공을 침입하고 있습니다. 한국 동북방 지역인 춘천과 삼척 등지는 수륙 양면의 공격을 당했습니다. 북괴는 공격 행위에 있어 전차, 6인치 포, 비행기 등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침략은 발악적인 것입니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침략의 목적은 대한 민국을 파괴하여 공산주의하의 괴뢰 영역의 손아귀에 집어 넣겠다는 심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국..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