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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나의 부통령직 4년 - 3. 공관에서의 민주 투쟁


 4월 혁명으로 인해 암흑 속에 잠겨 버렸던 모든 정치적 음모와 이 정권의 탄압 각본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백일 천하에 그 전모가 드러난 나에 대한 저격 사건도 과연 어떤 정치적 흉계로써 꾸며진 살인극이었던가를 확인하게 되었지만, 실은 그 당시에도 국민 전체가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 배후의 인물들이 오늘날 드러난 그들인 것도 거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른바 하수인들로서 사형을 언도 받은 자들의 몰지각을 서러워했을 뿐, 그들이 나나 민주당에 어떤 원한이나 정치적 신념으로서의 행위가 아님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감형을 이 대통령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처형당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테러 행동이 중지될 리는 만무하여 결국 가련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밖에 안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흉모가 가일층 악랄한 수법으로 꾸며지고 있다는 확실한 정보가 끊임없이 나에게 전해 왔다.

 
그 한 예로서, 지난번 동소문 로타리에서 김선태(金善太) 의원이 정체 불명의 자동차에 의한 고의적 충돌로 생명의 위험을 느꼈던 사실을 들 수 있는데, 시공관에서의 저격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음모자들은 나의 집 모퉁이에 트럭을 대기시켜 놓았다가 내가 탄 차를 밀어버려 자동차 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악질적이고 소연해지는 음모가 계속적으로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여러 가지를 심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명감이나 진실된 신념을 떠나서 다만 인간적인 욕망만으로써 정계에 투신하였다고 하며는 모르되, 민주주의의 전진을 위한 하나의 병사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바에는, 그리고 국민들이 모든 탄압과 싸우면서 나를 선출해 준 것을 생각해서, 그러한 암살 음모 따위에는 개의치 않고 항상 민중의 대열의 앞장에 서서 독재 정권과 싸워야 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제일 먼저 앞섰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공개 집회장에 나타남으로써 민중을 고무하고 민중과 더불어 행동하려고 하였다.

 
한편, 또 생각할 때 국민이 나를 부통령으로 선출하고 민주당을 지지해 준 것은 정부 내에 민주 거점을 확보해 놓아야 한다는 신념에서인 것이 틀림없으며, 불초한 이 사람이나마 하나의 상징으로 해서 조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상실치 않으려는 간절한 염원의 표시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력이나마 정부 내 투쟁을 통하여 동포를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빈곤으로부터 구출하는 데 바치기 위해 부통령직에 취임한 바에는, 이 사명을 완수하는 데 전력을 다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은 나로 하여금 결코 행동에 있어서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고 암살에 대한 정보가 계속적으로 날아들게 되자 민주당 동지들은 나에게 더욱 신중히 움직이도록 충고해 주었다.

 
고(故) 유석(維石)이 나를 가장 아껴 준 동지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에 있어서 지상에도 수차 보도된 바이지만, 정부가 개최하는 집회 석상에는 나의 자리가 마련되지도 않곤 하였다.

 
그런 경우에 당면했을 때 나는 자연인 장면으로서가 아니라 정부의 부통령으로서, 또한 최대의 야당인 민주당의 최고 위원이라는 공적인 입장에서 그지없는 모욕을 느껴 두문 불출하고 싶은 충동도 생겼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종합해서 결론 지을 때 나는 끝내 이 불의와 싸우기 위해서 값없는 죽음을 회피하는 동시에 민주 대열의 정비에 더 한층 힘쓰기를 결의하고, 정부 청사인 부통령 공관을 민주당의 공식적인 중요 회담 장소로 정하여서 반독재 투쟁의 본거지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독재 정권이 그 최후 발악으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살인 선거를 감행하려고 갖은 악랄한 폭력을 자행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공관으로부터 나와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 집회 군중 속에 들어가 선거 유세를 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나를 암살하기에는 가장 좋은 기회이며 나의 생명 위기에는 최악의 경우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사실상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던 것이다.

 
어떻든 근 4년 간 순화동 공관을 민주 투쟁의 본거지로 하여 꾸준히 민주당의 성장과 민권의 수호를 위한 일에만 전념하였던 것인데,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그동안 이 정권은 부통령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권한까지도 박탈하기 위해 참의원의 구성을 고의로 지연시켰을 뿐 아니라 탄핵재판소와 헌법 위원회의 설치까지도 저해하였다.

 
이런 기관이 만들어져서 부통령이 그 장(長)이 되면 야당인 민주당에 의해 독재 정치가 조금이라도 견제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민중의 의사가 뭉쳐서 표현될까 봐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참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미워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할 만큼, 또 정적이라면 그렇게도 무자비하게 제거하려고 한 놀라울 만한 이 박사의 편협성을, 나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예로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자신을 봉건 군주적인 지존(至尊)의 존재로 착각하고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적대하는 사람은 완전히 역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둘째, 민주당이 국민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기 시작하므로 자신이 선정한 후계자가 국민에게 멸시당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함으로써 반동 감정에 사로잡혀 있거나, 셋째, 노령으로 인해 모든 사물을 반사적인 감정으로 보거나, 이 세 가지 중의 어느 하나이거나 또는 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박사 자신이 자기의 충동적 감정과 독선적 고집으로 일관하였는데, 그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소위 ‘인의 장막’의 주인공들이 공명심과 질투심과 사욕만으로써 이 박사의 그런 성정(性情)을 더욱 조장시켜, 드디어 옳은 판단을 하나도 내릴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