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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백사장의 유언을 따르리 - 2 (해공 선생 1주기를 맞이하여)


눈물의 선거전을 치르고


 민주당 각급 지방 당부의 조직 때부터 그래 왔지만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각처에서 갖은 탄압과 테러가 더욱 치열하게 횡행하게 되어 신변 보호에 대한 세심한 주의와 방비책을 세워 왔지만 해공 선생과 나는 자신들의 건강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만치, 당과 측근에서는 여기 대하여는 별로 깊이 염려하지 않았다. 천만 뜻밖에도 이런 변을 막상 당하고 보니, 늘 해공 선생과 등도(登途)하던 나로서는 모든 부주의의 죄가 다 나에게만 있는 것 같아서 당과 국민 앞에 죄송스러운 마음 표현할 길 없었다.

 
그날 아침, 이리에서 앰뷸런스에 유해를 모시고 조치원까지 달려와 특별차로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나의 정신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모든 것이 꿈속 같기만 하였다.

 
서울역에 운집한 군중의 비통한 흐느낌과 격앙, 앰뷸런스를 둘러싼 청년 학도들의 울부짖음과 몸부림 가운데 선생을 여러 시간만에야 겨우 효자동 자택으로 모시게 되었다. 당에서는 벌써 부통령만의 선거 운동일지라도 이것을 계속 강행할 것을 결정 발표할 만치 나의 심정은 몹시 괴로웠지만 당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눈물의 선거전을 계속하려고 입술을 악물고 비통한 투쟁을 다시 전개하는 청년 당원들의 씩씩한 모습을 보고 나는 말없이 흐느껴 울어야 했었다.

 
그리하여 5·15 선거의 날은 드디어 왔고 모든 유권자는 묵묵히 투표장으로 나갔다. 개표 결과 서울을 위시한 전국 여러 주요 도시에서는 고(故) 해공 선생에 대한 추모 투표가 다른 생존하고 있는 입후보자에 대한 투표 수보다도 더 많았으니, 세계 선거 사상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새 사실이 나타났다.

 
이것은 해공 선생이 얼마나 국민의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었던가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최후의 개표구였던 대구의 개표 중단 사건에 대하여 이제 새삼스러이 하등 비판을 가하고 싶지는 않지만, 단 한 가지 해공 선생과 관련하여 다시 상기되는 것은 처음에 해공 선생의 장례를 선거가 끝나는 대로 거행하기로 하고, 5월 17·18일까지는 선거 결과가 완전히 발표될 것으로 예측하여 5월 19일로 결정하였던 것이 난데없는 대구 개표 중단 사건으로 해공 선생의 국민장까지도 연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공 선생의 유해가 서울에 도착하던 날의 정경으로 보아 대구 개표가 중단된 채로 장례를 거행하게 되면 흥분된 군중이 어떻게 격동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중대한 사태에 직면하여 당과 유가족과 장례 위원회는 수차 회합을 거듭한 결과, 18일 저녁 해공 선생의 장례를 무기 연기할 것을 결정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결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태를 염려하고 있던 국민들에게도 커다란 안도감을 주었고 일방으로 대구 개표 중단 사건에는 그 사건을 일으킨 편에 커다란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백사장 유언 어찌 잊으랴


 
고 해공 선생께 대하여는 너무나 죄송스러운 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장례가 일시 연기되고 대구 개표가 정당하게 완료된 후, 5월 24일에 선생의 국민장이 수십만 동포의 참례와 전국민의 애도 속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는 것은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실로 해공 선생은 잠드신 후에도 5·15 정·부통령 선거 최종 최대의 위기를 침묵의 위압으로 막아 내어 쓰러지려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기둥을 부등켜 잡으셨다. 선생은 그의 전생애에서 30여 년 간을 고난의 민족 독립 투쟁에, 10여 년 간을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분투에 바치셨고, 최후의 순간을 이틀 앞두고 한강 백사장에서 수십만 군중 앞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장시간의 역사적 강연으로 전국민에게 유언하셨다.

 
해공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1주년을 맞이하여 이제 우리는 다시금 선생이 보여주신 모범을 본받고, 그분이 한강 백사장에서 남기신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자주 독립과 자유 민주주의를 위하여 전심 전력을 바쳐 싸워 나갈 것을 굳게 맹세하는 바이다.

(195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