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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백사장의 유언을 따르리 - 1 (해공 선생 1주기를 맞이하여)


선거 유세차 강행군


 
5월 5일 고(故)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돌아가신 지 벌써 1년이 된다. 회고하면 회고할수록 그 당시의 기억이 너무나도 또렷하여 가슴이 아프다. 재작년(1955년) 9월 민주당이 결당된 이후, 해공(海公), 유석(維石), 삼연(三然), 해온(解慍)과 함께 나는 지방 당부의 결당과 유세로 근 5개월을 매일같이 기차에 흔들리고, 또 지프차로 수백 리 길을 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과로한 생활이 작년 3월의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자 지명 전국 대회를 마치고 5월이 다가오면서부터는 더욱 격심해졌다.

 
당에서는 5·15 정·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지방 핵심 당부의 결당을 더욱 서두르게 되었고, 선거 유세에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됨으로써 심신의 피로도 따라서 더욱 가중해졌으나, 해공 선생은 여전히 건장한 편이었고 나도 별로 몸의 지장을 느끼지는 않고 있었다.

 
4월에 들어서 선거 운동이 본격화하여 가면서도 해공 선생은 더욱 건강에 조심하여 약간의 위산 과다증이 있다고 담배를 끊으시고, 기름이 많은 육류나 또는 자극성이 심한 음식물은 피하였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해공 선생이 그처럼 좋아하시던 술도 갑자기 끊으시고 지방질 또는 자극성이 있는 음식을 피하시던 것이 도리어 영양 부족 또는 신진 대사 촉진 등에 불리한 영향을 준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백사장에서의 흥분과 호남선 열차


 
그리고 또 선생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해공 선생과 나의 정견 발표 강연회가 가뜩이나 과로해 내려오신 선생의 신심에 크나큰 충통과 긴장을 주어 그것이 불행하게 된 원인의 일부분이 되지나 않았는가도 생각된다.

 
그날(5월 3일)은 사실 우리의 예측보다도 엄청나게 더 많은 시민이 운집하여 유사 이래의 기록을 이루었던 만큼, 선생은 고맙고도 기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벅찬 흥분과 책임감에 눌리는 것 같았다. 그날 선생은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연단 주변의 까마득한 청중들을 둘러보던 중, 인도교 위와 강 건너 흑석동 강 안쪽의 새까만 군중을 뒤돌아보며,

 
“운석(雲石), 저기까지도 저렇게 많이 모여 있구려! 이 파도 치는 진짜 민의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단 말이오!” 하시며,

 
그날은 유달리 더 감격적인 장시간의 강연을 하였다.

 
그 다음날 5월 4일 밤차로 우리는 호남 지방으로 떠나야 했으니, 그때 우리는 선거 강연 차 부산, 대구, 대전은 벌써 먼저 둘러 왔던 바, 전주, 광주 지방에도 불가불 한번 내려가서 선거민의 사기를 올려야 할 참이었고, 또 그 지방 인사들이 일부러 상경하여 간곡히 요청하는 바도 있어 4일 밤차로 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전주에 내려가다가 차 안에서 천만몽외(千萬夢外)에도 불과 수분간에 작고하고 마시니, 종이 한 장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가시는 듯 한없이 야속하였다. 해공 선생께서 돌아가시던 날, 선생은 새벽 일찍이 열차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변소에 다녀와서,

 
“세수와 식사는 전주에 가서 합니다” 하시면서,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시다가 침대 위에 앉은 채 갑자기 의식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조재천(曺在千) 의원과 비서들은 손발을 주무르고, 나는 가슴에 귀를 대고 맥박이나 있나 들어 보려고 애썼고, 수행원들은 열차 내에서 의사를 부르러 소리치며 뛰어다녀, 당황한 가운데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고 몸부림치는 동안 선생은 맥박과 호흡이 끊어지고 몸은 점점 식어 갔다. 약 20여 분 후, 이리역에 도착하여 역전 호남 병원으로 모셨을 때는 벌써 완전히 운명하셨던 때였다. 의사는 청진기를 내던지며 침묵에 잠겨 버리고, 선생의 유해를 둘러싸고 우리 일행과 이리 당원들의 오열과 통곡 소리는 금시에 이리시를 뒤덮었고 전국 방방 곡곡을 휩쓸었다. 그처럼 전국민의 열광적인 지지와 기대를 한몸에 짊어지고 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선생은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시고, 오직 차디찬 유해만을 남겨 놓고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은 채 선거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영영 가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