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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6·25 동란과 워싱턴 - 3.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유엔 안보 이사회에서 정전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던 6월 26일(미국 시간 25일) 하오에 주말 여행을 즐기던 트루먼 대통령은 예정을 앞당겨 급거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날 맥아더 장군과 주한 미 고문단에서는 한국군에 실탄이 필요하니, 급히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 국무성 당국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덜레스 씨로부터도 화급한 전문이 도착했다. 6·25가 터지기 사흘 전에 한국을 떠났던 덜레스 씨는 일본에 들러 경도 지방을 관광하다가 맥아더 장군의 급보를 받고 동경으로 돌아왔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전용기로 동경에 비래(飛來)한 덜레스 씨는 한국 사태에 관해 맥아더 장군과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눴다. 평소 한국을 아끼고 뒷받침해 주던 맥아더 장군과 유사시에는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언질을 준 바 있는 덜레스 씨는 북괴군을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미군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덜레스 씨가 미국 정부에 보낸 전문 내용을 보면 “한국군이 침략자를 자력으로 물리칠 수만 있다면 제일 좋은 일이지만,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미군을 투입해야 한다. 이런 불의의 침략을 미국이 좌시하고만 있다면 불행한 사태의 연쇄적 계기로 종국에는 제3차 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처음 한국 사태에 대해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덜레스 씨의 이 전문이 결정적 작용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에 귀환하자, 곧 존슨 국방 장관과 3군 참모 총장, 그리고 애치슨 국무 장관, 웹 차관, 러스크 차관보 등을 블레어 하우스로 불러 긴급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애치슨 국무 장관의 제의로 맥아더 장군에게 다량의 탄약 공급을 결의했고, 비행기와 선박으로 재한 미국인을 철수할 것과 필리핀에 있던 미 제7 함대를 북상시켜 대만을 보호할 것을 결정했다. 이튿날인 27일(현지 시간 26일)에도 2차 연석 회의가 열렸고, 이날 오전에는 트루먼 대통령의 “유엔 결의를 지지한다”는 간단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날 하오 4시쯤 나는 한표욱(韓豹頊) 1등 서기관을 대동하고 백악관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면회하러 들어갔다. 미국 태도 여하에 우리 국운이 달려 있는지라,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하고 단호한 결정이 내려져야 할 순간이었다.

 
나는 침통한 심정으로 트루먼 대통령 앞에 섰다. 너무도 황급해서 국가 원수에 대한 예모도 차릴 겨를도 없이 “한국의 비극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들이댔다.

 
“6개월 전에 내가 이 자리에 와서 38선 경비를 위해 무기 원조를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그 후 소총 한 자루라도 한국에 보냈습니까? 그때 우리 요구를 들었더라면 오늘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나라 운명이 당신 손에 달렸으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마구 항변했다.

 
내가 너무 흥분한 어조로 말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던 한표욱 1등 서기관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아무 대꾸도 없이 한참 동안 조용히 내 말을 듣고만 있더니 “장 대사의 초조한 심정은 잘 알겠소. 그러나 유엔이 적절히 조처할 것이니 지금 앞이 아무리 캄캄해 보이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라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파병에 대해서는 아무 확실한 언질을 해주지는 않았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의 암시적인 이야기에 만족할 수 없어 “당신의 역량으로 꼭 한국을 구해 주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함축성 있는 말에 일루의 희망을 두기도 했다.

 
내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니 기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대통령과의 회담 내용을 질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외교 예의상 회담 내용을 그대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가 유엔과의 협조하에 반드시 한국을 지원해 줄 것을 확신한다고 답하고, 기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절대적인 협조를 요망했다. 또 전미국인에게 공산 도배의 불법 침범을 당한 우리 한국을 지원해 달라는 나의 간청을 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전항이 날로 한국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인 27일, 미국 정부의 태도도 점점 한국 지원으로 기울어졌다. 맥아더 장군과 덜레스 씨의 노력이 결정적으로 주효했고, 한국을 방위권에서 제외한다고 선언한 까닭에 북괴군을 불러들인 결과를 빚어낸 애치슨 장관도 앞장서서 한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앞서 대한 무기 즉송(對韓武器 卽送)을 명령한 트루먼 대통령은 27일 상오에 상하 양원 중진들을 관저로 불러 한국의 긴급 사태를 설명한 후, 한국에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 낮 12시 30분 미 해·공군의 한국 파병을 전세계에 공표했다.

 
유엔 본부 구내 식당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발표를 들은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심경으로 이날 하오 3시부터 열리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제2차 긴급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이 파병 성명은 그날 열리는 안보 이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오 3시부터 열린 안보 이사회는 밤 11시까지 회의를 강행한 끝에 북괴군에 대한 군사적인 제재를 가할 것과, 모든 유엔 회원국에 대해 한국에 원조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의 이와 같은 결의에 따라 50여 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 혹은 경제적인 원조를 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엔의 모든 긴급 결의를 진행시키는 데 있어 리 총장의 숨은 공로가 지대한 것이었다. 또 미국 수석 대표 오스턴 상원 의원의 한국을 위한 눈부신 활약, 자유 중국의 장 박사, 필리핀의 로물로 장군 등 몇 분의 특별한 공로를 우리 국민이 두고두고 감사해야 할 줄 안다. 이날 회의에도 소련 대표는 참석치 않아 한국에 유리한 결의가 무난히 통과될 수 있었다. 소련은 안보 이사회에서 무슨 결의안이 채택되든, 2주일만 지나면 부산까지 석권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 때문에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 파병을 결정하고 유엔이 이를 뒷받침하자, 나는 비로소 어느 정도 안도감을 갖고 하느님께 감사드려 마지않았다. 나는 해·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까지를 파견해야 이 전쟁은 속히 끝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요로 인사들을 역방하고 또 기자 회견을 통해 이 점을 특히 강조했다.

 
불행히도 서울이 28일 북괴군에게 함락되고 곳곳에서 국군이 패주하게 되자, 맥아더 장군은 30일 한국을 직접 방문, 이 대통령과 회담하고 돌아갔다. 덜레스 씨도 워싱턴으로 돌아와 한국 전선에 해·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까지도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지상군에 대해서도 한국 출동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한편, 나는 6월 26일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국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미군 파병과 유엔 결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고, 지금은 국군이 후퇴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서울을 탈환할 것이니 적치하에서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달라고 매일 호소했다. 특히 나는 방송을 통해 북괴군에게 협조하거나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면 수복 후 극형에 처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찌는 여름에 이불을 쓰고 몰래 내 육성 방송을 듣고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는 동포가 많았으며, 나는 이 일로 하여 북괴군에게 더욱 미움을 받아 여동생 정온(貞溫: 평양에서 수녀원장으로 있었음)을 잃기까지 했다(평원군(平原郡) 촌가에 피신 중 지명 수배로 10월 4일 체포되어 처형된 것으로 안다). 이렇게 바쁘고 초조한 가운데 6월이 가고 7월이 되었다. 나는 7월에 들어서도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활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본국 정부와 연락이 끊어진데다가 국내에 있는 가족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고, 대미·대유엔 외교는 나 혼자서 전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우리 주미 대사관은 조국의 운명을 짊어진 유일한 외교 기관이었다.

 
유엔 안보 이사회는 매달 의장국이 윤번제로 바뀐다. 7월에는 소련이 불참했기 때문에 한국에 유리한 모든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으나, 8월에는 소련이 안보 이사회의 의장국이 되므로 소련이 출석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모든 안건을 소련이 불참하는 7월 중에 모조리 처리해 달라고 간청하며 여러 대표들을 순방했다. 그래서 나는 7월 한 달을 또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7월 7일에 유엔 안보 이사회는 유엔군 총사령부 설치안을 가결시키고, 유엔군 총사령관에 맥아더 원수를 임명했다. 영국·프랑스 등 자유 우방 국가가 미국의 뒤를 이어 유엔군에 참여하고, 의료품과 물자의 원조가 잇따라 들어와 한국 전쟁은 소련·북괴 대 자유 진영 국가의 싸움으로 그 양상이 바뀌어졌다. 나는 7월 중에 외교 활동의 여가를 이용하여 한국의 전재민(戰災民)에 대한 구원 대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유엔 경제 사회 이사회와 미국 정부, 그리고 각종 구호 단체를 통한 전재민 구호는 크나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특히 뉴욕의 스펠만 대주교 등에 의한 재미 종교 단체의 활약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나는 틈틈이(주로 일요일) 각지의 민간 단체 회합을 찾아 다니며, 한국 동란의 유래와 현황과 전망에 대하여 연설을 하는 가운데 미국 우방인들의 올바른 이해와 협조를 얻기에 전력을 기울여 보았다. 가는 곳마다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