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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나의 부통령직 4년 - 1. 4·19와 민주보루의 등대수


의로운 민주 혁명 4·19


 
“학원에 자유를 달라”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국민의 자유와 민권의 수호, 조국의 민주주의를 절규한 데모를 계기로 발단된 반독재 봉기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성과 부패성을 규탄하는 전국민의 음성적인 분노가 가속화되어 폭발점으로 휘몰아가던 차에, 저 몸서리치는 3·15의 살인적인 폭력 선거에 이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3·15의 제1차 마산 의거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잇따라 제2차 마산 의거, 4·18 고대생 데모로 진전하게 됨으로써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한 양성화된 공연한 전면 항쟁으로 변해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4월 19일에는 전 서울의 대학생들의 결정으로 의거가 일어나자, 무자비한 독재 정권의 일부 경찰은 이 정의에 불타는 순수한 조국애의 대열에 발포를 감행하여, 수백의 어린 생명을 살해하면서까지 독재배(獨裁輩)들은 부패 정권을 집요하게 연명시키려고 헌법에 위배되는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최후 발악적인 탄압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절정에 달한 전 학생, 전국민의 민권 수호의 함성은 총검을 무서워하지 않고 독재 정권의 최후적 붕괴를 재촉하였고, 25일 밤의 대학 교수단의 데모를 앞장 세운 전시민의 철야 데모는 마침내 12년 간의 이승만 독재 정권 파멸의 마지막 마무리를 맺고 말았던 것이다.

 
수천의 희생자를 내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하여 세계 사상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평화로운 민주 혁명은 이루어졌고, 국민은 책임 정치가 기약될 희망에 가득 찬 내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진실로 4·26의 민주 혁명은 현대 민주주의의 승리요, 민권의 승리요, 조국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 민주 혁명을 전기로 한 민주 세력의 집결로써 우리는 공산 전체주의를 괴멸시키고 남북한을 통일시켜 조국을 세계의 어느 강대국에 못지 않은 복된 나라로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민주 혁명을 주도한 전국의 학생 제군과 그들의 사기를 고무하는데 항상 용감하였던 언론 기관과 음으로 양으로 그들에게 정의의 투쟁을 격려한 교육자, 문화인 그리고 이 혁명 사업에 과감하게 가담했던 시민에게 영광이 있기를 빌며, 한편 반독재 투쟁에 있어서 오랜 동안 용맹한 항쟁을 계속해 온 민주당 당원 동지와 야당 동지들의 수난의 경력을 찬양한다.

 
민주 혁명은 이루어졌다. 이제는 독재 요소를 제거하고 오로지 국민의 복지와 시민의 자유와 문화의 발전만을 위한 새롭고 참다운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누구나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기 맡은 바 직책을 다할 임무만이 남은 것이다.

 
권력이나 금력이나 모략이나 중상으로 불의를 감행할 자도 있을 수 없으며, 누가 누구를 불법으로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일도 없는 조국을 이룩하는 사업만이 남은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이 주권을 가지는 현대적인 대의정치, 내각 책임 정치, 민주 정치가 이루어질 것이 틀림없다.

 이제 이 영광스럽고 광명에 가득 찬 내일을 생각하면서 나는 부통령으로서 또 민주당의 최고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지난 4년 간의 괴로웠던 기억을 애국적인 국민 여러분과 더불어 간단히 더듬어 보려고 한다.


민주 보루의 등대수로서


 
정부의 부원수인 부통령의 직책을 국민으로부터 수임받고서 4년 간 엄격히 말해서 3년 8개월 간에, 나는 먼저 국민의 고난의 승리로써 주어진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국민의 생활 향상을 위해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한편, 조국의 민주화와 민권 수호, 정치악의 제거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는 하였으나, 이승만 독재 정치로 말미암아 이렇다 할 만한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던 것을 쓸쓸하게 생각한다.

 
민주주의 정치 제도하에서는 의당 그래야 할 것이긴 하지만, 나는 그동안 행정부의 한 요인이기보다는 민권 수호 투쟁에 있어서의 선봉대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명단은 정부 구성의 일원으로 끼어 있기는 하지만 항상 국민과 더불어 싸워 왔음을 자부하고 있음을 국민도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고 자위하는 바다.

 
실로 내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독재 정권의 붕괴를 결정화시키는 혁명 사업에 도움이 되고자, 지난 4월 23일 부통령직을 사임할 때까지의 재임 기간은 민주 보루를 사수하기 위한 병사로서의 민권 수호를 위한 한 시민으로서의 고난과 울분의 기록으로 새겨졌을 뿐이다.

 
특히 부통령 당선 직전에 존경하는 선배 해공(海公) 선생을 여의고, 또 마지막 판가리 싸움의 결승 직전에 민주당의 양쪽 수레바퀴로서 맹약했던 유석(維石) 선생을 잃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과 난관만이 계속되었었다.

 
국민들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부통령에게는 헌법으로 명문화된 세 가지 중요한 직무가 있다.

 
첫째는, 참의원 의장으로서 국민의 복지를 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입법을 담당한 기관의 장으로 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둘째는, 탄핵 재판소의 장으로서 행정부의 모든 요인의 비위를 규탄하고 그것을 견책할 권한이 있는 것이다.

 
셋째는, 헌법 위원회 위원장의 직책을 가지고 행정부의 위헌적인 처사를 심판하고 법의 준수와 헌법의 수호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헌을 예사로 할 뿐 아니라, 자기의 독단 정치를 강행하는 데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헌법을 자의로 뜯어고치던 이승만 정권은 고의로 참의원의 구성을 천연시켜 야당 출신 부통령의 권한을 박탈하고 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예로서도 경향 신문 폐·정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헌법 위원회 구성이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방법으로 그 구성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참의원 제도도 실은 이 정권이 국민 절대 다수의 의사를 무시하고, 법으로 보호되어 있는 국회 의원을 불법 감금까지 해 가면서 살벌한 맹위를 휘두르던 저 8년 전의 5·26 정치 파동 시에 강제 통과시킨 이른바 발췌 개헌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그 참의원의 구성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은 다만 폭력으로 독재 정권을 차지하려는 저의를 위장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웠을 뿐이며, 국민을 정치적으로 기만하는 술책법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네가 강제로 제정하고서도 자기네가 고의로 그 제도를 파괴하는 모순의 연속이 곧 이 정권의 포악스러운 독재 정치의 전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참의원의 구성이 불가능하게 되어 그나마도 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봉사할 기회는 전적으로 박탈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정말 부통령이란 유명 무실한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명색상으로나마 행정부의 부수뇌로서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에게 충언과 진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 이도 있을지 모르나, 나 역시 기회 있었을 때마다 또 어떻게 해서라도 기회를 만들어서 그러고자 부단히 시도해 왔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해명을 할 필요도 없이 국민들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도로(徒勞)에 그칠 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소로운 경고까지 받으면서 정부 밖에서의 투쟁을 결심하고 야당의 입장에서 싸워 왔던 것이다.
이미 나는 고(故)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고(故)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그리고 함태영(咸台永) 선생 등 부통령직을 맡아 보았던 여러 선배에게서 충언이나 건의가 한 푼의 가치도 없이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누누히 들어오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있어서 그러한 되풀이를 시도하였음에는 나대로의 각오와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국민의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표정으로이기는 하지만, 불초한 내가 부통령으로 당선된 데는 여러 가지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의의는 진정한 민의로 선출됐다는 것이다.

 
적어도 100만 표 이상을 도난당하고도 관권의 부통령 입후보자를 물리쳤을 뿐 아니라, 최종 개표에 있어서의 대구 시민들의 결사적인 민권 수호 투쟁의 귀결로 이루어진 승리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으로써 이승만 대통령도 국민의 의사가 나변(那邊)에 있는가를 조금쯤은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므로 그 무위한 충성을 감행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기한 바와 같이 나의 충언을 묵살해 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반대당 출신이란 것으로써 까닭없는 증오의 감정으로 대해 주었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부통령은 한낱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고, 그러한 독재 정권의 행정부에 한 요인으로 이름을 걸고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 항시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은 언제든 파멸할 것이 틀림없고, 또 민주주의는 기어코 승리하고, 또 국민의 자유는 쟁취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독재적인 정치 협잡의 환경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보루를 끝까지 지켜 나갈 것을 끝내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의 야당 의원 동지들이 극한 투쟁을 한 그 뜻과 바로 일치되는 것이다.

 
모든 정책 면에 있어서 소수는 다수를 좇아야 함은 민주주의의 원칙이요 정신이기는 하지만, 국회에 있어서의 야당 의원의 투쟁은 독재적 관권에 대한 민권의 투쟁이었음과 같이, 나 역시 행정부에 끝내 있으면서 행정부의 처사를 질정(叱正)함으로써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고 항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