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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6·25 동란과 워싱턴 - 2. 워싱턴에서의 6·25 워싱턴에서의 6·25 6월 25일 밤 9시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있노라니까 AP 통신사의 해리스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해리스 기자의 다급한 목소리는 “북괴군이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한다는데 아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모른다”고 대답한 다음, 혼히 있는 산발적인 전투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이윽고 UP 통신사에서 또 남침 보도가 들어왔는데 사실이냐고 확인하려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국지적인 충돌일 거라고 대답했으나 어쩐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국무성에 전화를 걸었더니 담당 직원이 없어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6월 25일(일요일)이 미국 시간으로는 24일이며, 토요일이어서 주말 여행을 떠난 모양이었다. 국무성..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1.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대한 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수석 대표로 참석, 외교계에 첫발을 내어디딘 나는 1949년 1월 5일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어, 1951년 2월 3일 국무 총리 인준으로 사임하기까지 만 2년 동안을 재직했다. 이 동안에 6·25 동란을 겪은 나는 미국 및 유엔과의 외교 관계를 거의 혼자서 전담하다시피 했다. 6·25 동란과 워싱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6·25의 역사적 배경을 이룬 몇 가지 국제적 사건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6·25 한 해 앞서인 1949년 4월 4일, 워싱턴에서 나토(NATO) 조약이 체결되어 공산 침략의 위협에 대한 서방측의 집단 안전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날 조인식에 초청되어.. 더보기
Ⅰ. 서장 - 서두에 서두(序頭)에 나는 이미 끝난 사람이다. 정계에서 물러선 지 어언 6년, 이날 이때까지 침묵의 세월로 살아왔을 따름이다. 이미 끝나 버린 사람을 두고 세상은 그동안 지나친 관심과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특히 군사 정권은 부패와 무능과 구악의 대명사로 우리 민주당을 해치웠거니와 우리는 그것이 허위든 사실이든, 어떠한 악선전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켰다. 역사는 일시적인 승자를 위한 것만은 아니며, 장구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사실(史實)의 진실성을 가려내고야 마는 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괴로움을 되씹으면서도,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정작 왜 할말이 없었겠는가. 말할 때가 아니고, 말해서 우리 국민에 대한 과오나 역사에 대한 책임이 속죄되리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운명적인 침묵을 지켰.. 더보기
간행사 초판 간행사 지난해 6월 4일 요한 장면 박사의 파란많은 생애가 그 위대한 종언(終焉)을 고하였다. 이날 오후 명륜동 자택에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 각하를 비롯한 유수철(柳秀撤) 신부님, 가족 및 측근자 여러분이 최후의 선종을 기구하는 가운데 운석(雲石) 선생은 하느님의 품으로 영생의 길을 떠난 것이다. 그리하여 장 박사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측근자들과 유가족측에서는 5일장으로 가족장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던 차 정계 주요 인사들과 그분의 동지들이 국회 의장실에 모여 국민장으로 모시자는 결정을 보아 이를 유족측에 통고해 왔으며 결국 성대한 국민장을 6월 12일 서울 운동장에서 엄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운석 국민장의 위원회의 이효상(李孝祥) 위원장을 비롯한 양일동(梁一東), 최동극(崔東克.. 더보기
회고록 -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표지 장면 박사의 회고록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표지 이미지입니다. 회고록은 '증보판'의 내용을 나누어 올립니다. 1. 초판 표지 2. 증보판 표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