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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 장면

운석 장면 박사 사진 모음 - 4 슬라이드쇼이므로 좌우 클릭 후 한장씩 보시기 바랍니다. 시기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50여 개 씩 묶어서 올립니다. 사진은 중복될 수 있습니다.) 사진의 저작권은 ≪운석기념회≫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진이 필요하시거나 이용할 때에는 댓글, 방명록이나 unsukcm@gmail.com 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2. 대통령이 증오하는 부통령 1957년 8월 15일, 그날은 나 개인으로서나 내가 속해 있는 민주당으로서나 또 나를 선출해 준 국민으로서 감격적인 날이면서, 한편으로는 무한히 불쾌한 날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날은 민권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관권의 승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율 배반적인 날이었다. 나는 그날 국민의 초라한 한 대표로서 정·부통령 취임 식전(式典)에 참석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그날은 결코 대통령의 취임만을 위한 날이 아니고 부통령의 취임도 동시에 행하는 정·부통령 취임의 날이었다. 그렇지만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고위층과 주한 외국 사절들의 좌석은 정중히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주인공의 한 사람인 새 부통령이 앉을 자리는 뚜렷한 위치에 놓여 있지 않았다. 이 사소한 듯한 고의적인 처사는 .. 더보기
운석 장면 박사 사진 모음 - 3 슬라이드쇼이므로 좌우 클릭 후 한장씩 보시기 바랍니다. 시기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50여 개 씩 묶어서 올립니다. (사진은 중복될 수 있습니다.) 사진의 저작권은 ≪운석기념회≫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진이 필요하시거나 이용할 때에는 댓글, 방명록이나 unsukcm@gmail.com 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더보기
나의 부통령직 4년 - 1. 4·19와 민주보루의 등대수 의로운 민주 혁명 4·19 “학원에 자유를 달라”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국민의 자유와 민권의 수호, 조국의 민주주의를 절규한 데모를 계기로 발단된 반독재 봉기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성과 부패성을 규탄하는 전국민의 음성적인 분노가 가속화되어 폭발점으로 휘몰아가던 차에, 저 몸서리치는 3·15의 살인적인 폭력 선거에 이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3·15의 제1차 마산 의거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잇따라 제2차 마산 의거, 4·18 고대생 데모로 진전하게 됨으로써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한 양성화된 공연한 전면 항쟁으로 변해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4월 19일에는 전 서울의 대학생들의 결정으로 의거가 일어나자, 무자비한 독재 정권의 일부 경찰은 이 정의에 불타는 순수한 조국애의 대.. 더보기
운석 장면 박사 사진 모음 - 2 슬라이드쇼이므로 좌우 클릭 후 한장씩 보시기 바랍니다. 시기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50여 개 씩 묶어서 올립니다. (사진은 중복될 수 있습니다.) 사진의 저작권은 ≪운석기념회≫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진이 필요하시거나 이용할 때에는 댓글, 방명록이나 unsukcm@gmail.com 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더보기
운석 장면 박사 사진 모음 - 1 슬라이드쇼이므로 좌우 클릭 후 한장씩 보시기 바랍니다. 시기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50여 개 씩 묶어서 올립니다. (사진은 중복될 수 있습니다.) 사진의 저작권은 ≪운석기념회≫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진이 필요하시거나 이용할 때에는 댓글, 방명록이나 unsukcm@gmail.com 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4. 전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전세계에 방송된 울분의 연설 전황은 날로 불리해 가고, 국군은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했다. 나는 유엔과 미국 정부에 매달려 7월 한 달을 바쁘게 보냈다. 소련은 최초에 꿈꾸던 안이한 한국 점령이 의외에도 유엔 궐기에 부닥쳐 안보 이사회의 보이콧이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이제는 정략을 바꿔 8월 회의에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인 소련 대표 말릭이 이사회에 출석했다. 그는 의장석에 앉더니 대뜸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이사회의 그동안의 모든 결의가 모두 무효임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인즉,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3.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미군 파병이 결정되기까지 유엔 안보 이사회에서 정전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던 6월 26일(미국 시간 25일) 하오에 주말 여행을 즐기던 트루먼 대통령은 예정을 앞당겨 급거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날 맥아더 장군과 주한 미 고문단에서는 한국군에 실탄이 필요하니, 급히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 국무성 당국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덜레스 씨로부터도 화급한 전문이 도착했다. 6·25가 터지기 사흘 전에 한국을 떠났던 덜레스 씨는 일본에 들러 경도 지방을 관광하다가 맥아더 장군의 급보를 받고 동경으로 돌아왔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전용기로 동경에 비래(飛來)한 덜레스 씨는 한국 사태에 관해 맥아더 장군과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눴다. 평소 한국을 아끼고 뒷받침해 주던 맥아더 장군과 유사시에는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언질을 준 ..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2. 워싱턴에서의 6·25 워싱턴에서의 6·25 6월 25일 밤 9시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있노라니까 AP 통신사의 해리스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해리스 기자의 다급한 목소리는 “북괴군이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한다는데 아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모른다”고 대답한 다음, 혼히 있는 산발적인 전투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이윽고 UP 통신사에서 또 남침 보도가 들어왔는데 사실이냐고 확인하려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국지적인 충돌일 거라고 대답했으나 어쩐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국무성에 전화를 걸었더니 담당 직원이 없어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6월 25일(일요일)이 미국 시간으로는 24일이며, 토요일이어서 주말 여행을 떠난 모양이었다. 국무성.. 더보기
6·25 동란과 워싱턴 - 1.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6·25 사흘 전 덜레스의 언약 대한 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수석 대표로 참석, 외교계에 첫발을 내어디딘 나는 1949년 1월 5일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어, 1951년 2월 3일 국무 총리 인준으로 사임하기까지 만 2년 동안을 재직했다. 이 동안에 6·25 동란을 겪은 나는 미국 및 유엔과의 외교 관계를 거의 혼자서 전담하다시피 했다. 6·25 동란과 워싱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6·25의 역사적 배경을 이룬 몇 가지 국제적 사건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6·25 한 해 앞서인 1949년 4월 4일, 워싱턴에서 나토(NATO) 조약이 체결되어 공산 침략의 위협에 대한 서방측의 집단 안전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날 조인식에 초청되어.. 더보기
회고 - 민주주의의 씨앗 (현석호) 현석호(玄錫虎, 전 국방 장관) 국제 신사의 면모 장 박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어느 미국인이 인물평을 한 것을 먼저 적으려 한다. 그것은 장 박사가 서거한 후 외국인이 베푼 어느 파티에서였다. “닥터 장의 정치적 역량은 외국인인 나로서는 어떻다 평하기 어려우나,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한국에도 그런 젠틀맨이 있는가 하고 놀랐습니다. 우리 미국에서도 그런 젠틀맨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 미국인은 짧은 말로써 정확히 표현했다. 사실 장 박사는 국제적인 젠틀맨이었다. 그분이 서거한 후 많은 인사들이 “점잖은 분”, “인격자”라고 평했다. 나도 더없이 훌륭한 분이라고 한마디하고 싶다. 내가 장 박사를 안 것은 민주당을 창당할 무렵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알기는 했었지만 직접 교분은 없었고, 다만 외교관으로서.. 더보기
회고 - 언행 일치의 인물 (한근조) 한근조(韓根祖, 전 민의원) 머리말 장면 박사의 별세는 우리의 예상보다 빨라 많은 사람들이 더욱 슬퍼했다. 한번 더 봉공(奉公)시켜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나, 또는 왜 장면 박사와 같은 양심적인 인물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이 우리 정치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떠돌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학우의 한 사람으로서, 또 정치적 동지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장 박사의 언행을 될수록이면 많이 뽑아 기록하여, 그 전기의 말미에 붙이고자 한다. 학창 시대 수원 농림 학교 학생 시절의 장 박사는 홍안의 미소년이라기보다, 도리어 백안 무구(白顔無垢)의 순수한 소년이었다. 마음도 순수하고 외양도 순수하였다. 그래서 학우들은 물론 선생들까지도 한일인(韓日人)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했다. 그러나 장 박사.. 더보기
회고 - 성실을 지킨 정치인, 장 박사와 나 (주요한) 주요한(전 부흥부 장관) 부통령 개인 성명서 도맡아 장면 박사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이 1951년 겨울인가, 부산 임시 수도에서였다. 국무 총리로 임명되어 미국서 귀임한 장 박사를 상공 회의소 주최로 환영하는 석상에서였고, 첫인상이 세련된 신사형이요, 성실한 인격자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마는 비서를 시켜서 전해 오기를 영문으로 한국 정부의 정책 노선과 대미 외교에 관한 각서 형식의 글을 써 보라는 부탁이 있었고, 무어라고 썼는지 지금 기억이 잘 안되나, 하여간 몇 조목 써서 보냈는데 잘되었다고 만족하게 생각한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그러나 그 후 부산서는 장 박사와는 다시 접할 기회가 없었고, 1952년 여름 서울 환도 후 나는 경향 신문 논설 위원으로 일보고.. 더보기
회고 - 외유 내강한 신념의 인간 (조재천) 조재천(曺在千, 전 법무부 장관) 존경과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분 그것은 1950년의 일이다. 6·25 동란으로 전세가 한참 불리하여 정부가 대구에 와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피난해 간 뒤의 일이었다. 당시 대한 민국의 사실상 영토는 경상 남북도의 각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경상 북도 지사로 있었는데 장 박사는 국무 총리로서 초도 순시차 대구에 왔으므로 비로소 뵈옵게 되었다. 장 박사에 대한 첫인상은 말이 적고,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첫눈에 신사이면서도 성실한 인간됨을 알 수 있었다. 눈부신 외교 활동을 해 온 분이란 것을 나도 알고 있었고, 신앙에 철저한 분이라는 것도 들어서 짐작은 했으나, 막상 그분을 직접 만나 뵈었을 때 존경심과 친근감을 느꼈던 것이다. 몇 해 후, 내가.. 더보기
회고 - 초인적인 외교 역량 (장기영) 장기영(張基永, 전 대한 중석 사장) 유엔의 한국 승인 1948년은 우리 나라가 유사 이래 처음 국회를 연 해이지만, 밖으로는 한국이 유엔에서 독립 정부로 승인받은 중요한 해이기도 하다. 당시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 한국 대표로 수석에 장면 박사, 차석에 나, 그리고 위원에는 조병옥, 정일형, 김활란, 모윤숙, 김우평, 전규홍, 김준구 등 제씨로 구성되어 참석하였다. 12월 12일, 소련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엔 한위(韓委)를 1년 간 존속할 것이 결의되고, 한국의 승인안이 제출되기는 이보다 앞선 12월의 일이었다. 그동안 한국 승인안이 상정되기까지 장면 박사의 활약은 눈부신 것인 동시에 눈물겨웠다. 유엔 정치 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많은 대표로부터 박수 갈채와 지지를 받았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