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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6·25 동란과 워싱턴 - 2. 워싱턴에서의 6·25


워싱턴에서의 6·25


 
6월 25일 밤 9시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있노라니까 AP 통신사의 해리스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해리스 기자의 다급한 목소리는 “북괴군이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한다는데 아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모른다”고 대답한 다음, 혼히 있는 산발적인 전투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이윽고 UP 통신사에서 또 남침 보도가 들어왔는데 사실이냐고 확인하려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국지적인 충돌일 거라고 대답했으나 어쩐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국무성에 전화를 걸었더니 담당 직원이 없어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6월 25일(일요일)이 미국 시간으로는 24일이며, 토요일이어서 주말 여행을 떠난 모양이었다. 국무성 숙직자에게 한국으로부터 무슨 보고가 있으면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10시 30분쯤 본국 정부로부터 지급 국제 전화가 걸려 왔다. 바로 이 대통령의 육성이 들려 왔다. 이 대통령은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장 대사! 이거 큰일 났소. 북괴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서 밀고 들어오니, 장 대사가 어떻게 빨리 활동해 주어야겠소” 하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으로부터 현지 정세를 대충 듣고 나니, 곧 이어서 다시 임병직 외무 장관도 미국 대통령과 유엔에 호소하여 우리 나라를 구원해 주도록 극력 활동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임 장관은 “당신 하나의 역량에 국가의 운명이 달렸소” 하면서 목이 메어 우는 소리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임 장관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본국 정부와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되었다. 정부의 훈령을 받을 도리가 없으니 완전히 나 혼자의 판단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밤 11시,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면서 나는 국무성으로 차를 몰았다. 국무성 건물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러스크 극동 담당 차관보(현 국무 장관), 히커슨 유엔 담당 차관보, 제섭 순회 대사 등이 모여 있었다. 이날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 주의 자기 사저로 주말 여행을 떠났고 애치슨 국무 장관은 메릴랜드 주의 그의 별장에서 쉬고 있었다.

 
내가 국무성에 들어서자 모여 있던 국무성 고관들은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다그쳐 묻는 것이었다.

 
그들은 외전으로 사태의 심각함을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아직 확실한 보고는 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국제 전화를 통해 직접 들은 정보를 이야기해 주고 그것을 토대로 대책을 협의하기 시작했을 때, 무치오 주한 미 대사로부터 “오늘 아침 북괴군이 대한 민국 영토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침범해 들어왔다. 이 공격의 규모로 보나 작전 형태로 보아, 이것은 대한 민국에 대한 총공격으로 보인다”라는 내용(이 전보의 전문은 후에 입수된 것임)의 전문이 전달되었다.

 
이 자리에 모인 러스크 차관보 등은 우선 한국 사태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소하기로 합의를 보고, 곧 애치슨 국무 장관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어 이 대책을 건의했으며, 애치슨 국무 장관은 다시 장거리 전화로 트루먼 대통령의 구두 허가를 얻었다.

 
한편 이들은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 총장을 야밤중에 깨워 긴급 사태를 설명하고, 밤늦게라도 안보 이사회 11개국 맴버에게 통지해서 내일 안으로 안보 이사회의 긴급 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 총장은 북괴군의 남침 보고를 듣자 대뜸 한다는 말이 “아이쿠, 하느님! 이건 유엔에 대한 도전이구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리 총장의 주선으로 안보 이사회가 소집되기로 결정을 보고 나니 다음날 새벽 3시가 되었다. 미국은 제소자(提訴者)가 되어 철야로 제소문 작성에 바빴고 재외 각국 대사에게 이 사실을 전보로 알렸다.

 
나는 새벽 4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왔으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유엔 안보 이사회에서 당사국 입장으로 발언하게 될 연설문을 작성하느라고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아침 9시, 성당에 들러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유엔 본부가 있는 롱 아일랜드의 레이크 석세스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날 아침 조간들에 주먹 같은 활자로 실린 ‘한국에 전쟁유발’이라는 톱기사를 보고, 긴장과 흥분에 휩쓸려 안보 이사회가 열리는 유엔 본부로 가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도저히 비행기표를 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든지 오후 3시 안에는 꼭 레이크 석세스에 도착해야 하므로 급한 대로 군용기를 내달라고 해서 그것을 얻어 타고 유엔 본부로 달려갔다.

 
유엔 본부에는 안보 이사회 긴급 회의를 구경하러 온 수천 명의 사람이 들끓고 있었다. 마이크를 야외에 장치해 놓고 회의가 개최되었다. 안보 이사회에는 상임 이사국인 미국·영국·프랑스·자유 중국과 비상임 이사국인 쿠바·에콰도르·노르웨이·이집트·인도·유고슬라비아 등이 참석했다.

 
이날 중요한 상임 이사국의 하나인 소련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 무렵 소련은 자유 중국 대신 중공을 안보 이사회에 앉히자는 주장을 내세우고 안보 이사회의 출석을 보이콧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날 회의는 물론 한국 사태를 결정하는 모든 회의에도 참석치 않았다. 생각하면 소련의 회의 불참은 그야말로 천우 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소련이 안보 이사회에 출석해서 사사 건건 거부권을 행사했던들 정전 요구 결의안이고 무엇이고 하나도 통과되지 못했을 것은 뻔한 일이었고, 우리 조국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모골(毛骨)이 송연하다.

 
오후 3시, 안보 이사회가 열리자 리 총장은 “한국 사태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중대 사건인 만큼, 안보 이사회는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적절하고 신속한 방도가 강구되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뒤이어 미국의 그로스 대표는 당사국인 한국 대표를 참석시키자고 제의하여 내가 안보 이사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미 안보 이사회에는 유엔 한위(韓委) 등에서 각종 보고 전문이 들어와 있어 그것들을 토대로 진지한 수습책이 논의되었다.

 
미국은 제소국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북괴군의 대한 민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지대한 관심으로 주목하며, 이 행동이 평화 파괴를 조성함을 단정하고, ① 전쟁 행위의 즉시 정지를 요구하고, 북괴군을 즉시 38선 이북까지 철수시킬 것을 북괴 당국에 요구한다. ② 유엔 한위에게는 ㉠ 이 사태에 관하여 충분히 검토된 모든 건의를 가능한 한 지체없이 통고할 것, ㉡ 38선까지의 북괴군의 철수를 감시할 것, ㉢ 본 결의 이행에 관하여 부단히 안보 이사회에 보고할 것을 통고한다. ③ 본 결의를 이행함에 있어서 유엔에게 모든 협조를 제공할 것과 북괴 당국에 대한 원조 제공을 하지 말 것을 전 회원국에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제안 설명이 끝나자 이어 당사국을 대표해서 나에게 발언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밤을 세워 초안해 둔 연설을 행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엔 승인을 받은 대한 민국은 현재 북한 괴뢰군의 불법 공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여 고전 분투하고 있다. 북괴군의 대규모 침공은 우리 대한 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북한 괴뢰 정권 치하에 몰락시키려는 야망에서임이 분명하다. 이런 불법 공격은 인도와 민심을 거스르는 죄악일 뿐 아니라,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니 만큼 귀 안보 이사회에서 침략자들로 하여금 일체 공격을 즉각 중지케 하고,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도록 강력히 조처해 줄 것을 호소한다.”

 
나의 연설이 끝나자 미국 제안을 둘러싸고 갑론 을박이 벌어진 끝에 하오 6시쯤 표결에 붙여졌다. 10개 참가국 중 미·영·프·중·쿠바·에콰도르·노르웨이가 찬성하고, 이집트와 인도는 투표 불참 후에 찬성, 유고는 기권함으로써 이 정전 요구 결의안은 가결되었다. 이로써 일단 유엔으로서는 제1 단계의 급한 조처를 취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