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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언행 일치의 인물 (한근조)

한근조(韓根祖, 전 민의원)


머리말


 장면 박사의 별세는 우리의 예상보다 빨라 많은 사람들이 더욱 슬퍼했다. 한번 더 봉공(奉公)시켜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나, 또는 왜 장면 박사와 같은 양심적인 인물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이 우리 정치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떠돌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학우의 한 사람으로서, 또 정치적 동지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장 박사의 언행을 될수록이면 많이 뽑아 기록하여, 그 전기의 말미에 붙이고자 한다.


학창 시대


 
수원 농림 학교 학생 시절의 장 박사는 홍안의 미소년이라기보다, 도리어 백안 무구(白顔無垢)의 순수한 소년이었다. 마음도 순수하고 외양도 순수하였다. 그래서 학우들은 물론 선생들까지도 한일인(韓日人)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했다.

 
그러나 장 박사 마음속 깊이에는 누구보다 호오(好惡)의 감정이 강했다. 그의 이 호오의 감정은 학생 시절, 정당 생활 시절, 집권 시절을 통하여 일관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학생 시절에는 좋은 친구를 대할 때에 마음의 기쁨과 외양의 기쁨이 한결같이 나타나고, 나쁜 친구에게는 그 마음과는 달리 외양으로만 기뻐하더니, 정당 생활 시절, 집권 시절에는 그것이 세련되었다 할까 마음의 기쁨도 감추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을 보통 ‘외유 내강’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 박사의 경우 그 내강한 줄을 아는 사람은 적다. 그래서 장 박사를 내약한 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장 박사의 이 성격은 그의 이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이 점은 다음 정당 생활 시절, 집권 시절에서 다시 언급한다).

 
전기(前記) 학교 입학 시절의 장 박사는 16세, 나는 20세였다. 그때 학교에는 상급생 일부에서 이미 조직한 비밀 결사가 있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배일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3학년생이었던 제주도 출신 김문준(金文準)이 주동이었다. 학생 시절에는 학생답게, 졸업 후에는 사회인답게 배일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함남 출신 황상해(黃尙海, 25세, 전 사립 학교 교사)와 평북 출신 이내정(李迺楨, 23세)과 함께 입학하자마자 이 결사에 가입하였다. 그 후, 약 반년 후에 장 박사는 연소하나 벌써 비밀 결사의 간부의 신임을 받아 나를 통하여 이 결사에 가입할 것을 요청받았다.

 
장 박사는 이를 쾌락하면서 하는 말이 “2학년생 김정섭(金晶燮, 19세)과 1학년생 한병기(韓秉琪, 17세)도 가입시켜 달라”고 말하고, 또 세 사람의 동시 가입을 원하는 연유를 물었더니, 장 박사는 “세 사람은 결의 형제”라고 대답하였다. 장 박사를 포함한 이 세 사람은 모두 뛰어난 미소년이며, 모두 우수한 머리의 소유자들이었다. 원래 결의 형제라는 것은 형제 아닌 사람들이 감정의 발로로, 혹은 고독감에서 서로 결합하여 형제와 같은 행세를 하자는 것인 바, 장 박사는 고독하지도 않고, 단지 감정의 호오의 발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6세밖에 되지 않은 소년 장면이 위험을 무릅쓰고 배일 결사에 가입을 승낙하는 바로 그것이 공생 공사의 정신의 발로라고 하겠다. 또 결의 형제가 동시에 가입하겠다는 것은 차원이 높은 공생 공사의 정신이겠는데, 당시 미숙한 나로서는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후일에야 깨달은 바 있었다.

 
장 박사는 학교 기숙사 안에서는 일본어로 된 영어의 강의록으로 영어만 열심히 공부하고 교실에서도 선생만 나가면 다음 선생이 들어올 때까지 한병기, 박정근(朴定根)과 더불어 칠판 위에 영어만 낙서하고 했다. 일본의 식민 정책이 죽자하고 영어란 한 자도 가르치지 않는 이 학교에서 영문만 낙서하는 것을 보기에 아주 아이러니컬하고 묘한 배일 운동으로 느껴지더니, 과연 장 박사는 졸업 후에 일반 졸업생과 행동을 달리하여 일반적인 직위에 취직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서울 종로 어떤 영어 학원에서 영어를 더 공부하는 한편, 용산 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떠나가 버렸다.


부산 피난 시대


 우리 나라는 해방 후 정·부통령 선거, 국회 의원 선거 등 10여 차례의 총선거를 겪었으나 그중에서 보람직한 공명 선거는 오직 5·10 총선거와 7·29 선거뿐이라고 하겠다. 5·10 선거는 해방 후 처음 겪는 감격의 공명 선거였고, 7·29 선거는 4월 혁명 후 반성의 그것이었다. 이 두 선거 기간 중, 즉 13년 간 헌정상 클로즈업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승만 박사와 장면 박사는 서로 참으로 대차적이었다. 그들의 성벽의 차이도 그러하려니와 그 지위, 그 성망(聲望), 그 업적 등 모두가 그러하였다.

 
이 박사는 해방 전 벌써 노혁명 투사요, 민족의 거성이요, 또 미국풍의 자유 민주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 박사가 감격의 공명 선거에 뒤이어 집권하게 됨에 잘 안될 것이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박사는 유아 독존을 일삼고 알맹이 없는 고집을 국정에 나타내고, 민의를 날조하고 국민의 의표의 인사 행정을 좋아했다. 부패와 사치를 금할 줄 모르고, 근면과 절약과 궐할 줄도 몰랐다. 헌법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의도 의욕에 맞도록 헌법을 고치곤 하였다.

 
이렇게 하기 12년, 모든 국가 기본법은 공문화되고 국정의 원칙은 문란해지고 국고는 탕진되었다.

 
그러므로 국민은 이 박사와 정반대의 인물을 택하게 된 바로 그것이 장 박사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장 박사는 해방 전 종교인, 교육가로서 활약하다가 5·10 선거에 당선, 의사당 안에서 이 박사와 가까이 앉게 되었다. 장 박사의 젠틀한 점과 유창한 영어는 우선 이 박사의 마음에 들었던지, 장 박사는 파리 제3차 유엔 총회에 수석 대표로 뽑히어, 한국 독립의 승인을 얻은 혁혁한 공로자가 되었다. 그 승인도 아슬아슬한 것으로 총회를 하루 연기하여, 유엔 회원국 대표들의 출석을 독려하여, 폐회 5분 전에 한국 독립의 승인을 얻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이것은 천우 신조인데 이 천우 신조는 장 박사가 매일 아침 5시면 반드시 기상 단좌하여, 혼신 기도한 성의의 소치라고 동행했던 대표 단원들은 감탄하였던 것이다. 나는 장 박사가 파리로 떠날 때 나의 사무실인 사법 차장실에서 두 가지를 말하였다.

 
하나는 5·10 선거가 자유, 공명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전규홍(全奎弘) 중앙 선거 사무 총장을 동행할 것과 또 하나는 돈을 많이 가지고 갈 것을 의논하였다. 그랬더니 장 박사는 첫째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 하면서 쾌락하였으나, 다음 돈 문제는 “돈은 주는 대로 쓰지 더 소용없다”고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때 벌컥 생각나는 것이 중국과 일본이 파리에 보내는 외교관은 외교 기능보다 얼굴 잘생기고 돈 많은 사람을 보내던 것이 생각나서, 장 박사의 얼굴은 잘생겨서 그저 돈 말만 하였더니, 장 박사는 “그러한 것은 전전(戰前)의 구식 외교요, 지금의 외교는 현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말해서 혼신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해 1949년 장 박사는 주미 대사로 부임하여 워싱턴 외교계에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50년 6·25 동란 때 큰 공을 세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그러나 세상이 다 안다는 것은 동란이 발발한 후 대사로서의 장 박사가 동분 서주했다는 것이지, 그동란 발발 직전의 특기할 만한 또 하나의 큰 노력이 있으니, 즉 미 국무성 고문 덜레스가 한국을 방문하고 38선을 시찰하게 된 것이 장 박사의 권유라는 것이다. 덜레스의 처음 방한 스케줄에는 38선 시찰이 들어 있지 않았는데, 친교가 특별히 두터웠던 장 박사의 권유에 의하여 38선을 시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덜레스는 38선을 보고 난 다음, 한국 국회에 나와 “한국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고 명언했다.

 이 명언은 보통 명언이 아니고 미국의 정책 전환이라 할 수 있는 명언이다. 왜냐하면 당시 미 국무 장관 애치슨이 호주와 뉴질랜드를 연결하는 ‘앤저스’를 결성해 놓고, 그해 1월경 성명서를 통하여 “대만과 한국은 반공권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여, 우리 나라를 반공권 외에 둔 바 있고, 또 북한의 김일성도 그것을 믿은 나머지 남침을 감행하여 “3주일이면 해치울 수 있다”고 장담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애치슨 정책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덜레스가 “한국은 고립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고 동경에 가 있는 동안 자기의 혀끝도 마르기 전에 38선이 터지지 아니했던가.

 그래서 미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에서는 장 대사의 말을 듣고, 동경에서의 덜레스의 전화 요청에 의하여 출병을 단행, 7월 2일에는 보병 부대까지 착한(着韓)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부산 피난처에 당시 뉴욕 타임스의 동경 특파원이라는 모씨(전 경전 사장 이태환 씨의 동창)가 이씨를 찾아와서 “한국에 보배가 있는데 당신은 알고 있는가?”라고 묻는 말에 이씨가 대답을 주저하고 있었더니, 그 특파원은 다시 말하기를 “그 보배는 물건이 아니라, 인간 장면이다”라고 하며, 장면은 워싱턴 외교계에서 어떤 선진 국가의 외교관일지라도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정부 수립 후 수년 동안에 국부적인 존재였던 이승만 박사는 그 성망, 그 업적이 점점 떨어지는 반면에 장 박사는 그 성망과 업적이 욱일 충천으로 상승만 하였다.

 
그래서 1951년 국무 총리 지명을 받고 국회는 183석 중 2, 3표를 제외한 절대 다수로 인준하였다. 국무 총리의 인준을 받고 돌아오는 장 박사는 도중 일본에 들렀더니 당시 요시다(吉田) 수상이 공식으로 서로 만나자고 하므로 “나는 아직 국무 총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다시 “그러면 비공식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만나자”고 한 일도 있다는 얘기가 있다.

 
귀국 즉시 장 박사는 대통령에게 몸소 헌법을 잘 지켜 줄 것을 당부하고, 언약을 받은 다음에야 국무 총리에 취임했다는 것이다.

 
장 박사는 취임한 후 3주일도 못 되어 국무 총리이면서 벌써 요시찰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장 박사가 야간의 무의미한 연회를 스스로 피하고 있다가 간혹 야간 연회에 나가면 이상한 차가 미행한다는 것이었다.

 
거창 사건에 책임지고 나간 국방 장관 신모(申某)를 열흘도 못 되어 주일 대사로 다시 임명하는 바람에 장면 총리와 조병옥 내무 장관은 사임을 결심하고, 인촌 김성수 부통령은 졸도하기에 이르렀다.

 
사의를 결심하고 있는 장 총리에게 대통령은 갑자기 제6차 유엔 총회 한국 수석 대표로 임명하였다. 장 총리는 외국에 떠날 때 적산 기업체 불하 신청 수십 건 중(총리는 자동적으로 적산 관리 위원회 위원장이었음) 허가해야 마땅한 것은 모두 일시에 허가해 주고, 나머지 허가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은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그냥 두어 두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는데, 막상 돌아와 보니 그것이 그렇게 되어 있지 않더라고 개탄하였다. 적산이 이런 식으로 마구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국회의 간접 선거로 초대 대통령은 되었으나, 그것으로 재선은 결단코 되지 못할 것을 알아차린 이 박사는 2, 3년 간을 두고두고 요로 고관들에게 대통령 선거를 국민의 직접 선거로 헌법을 개정할 것을 집요하게 종용해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유당을 조직해 보았지만 원외 자유당은 이 박사를 지지하고, 원내 자유당은 대체로 이 박사를 반대하였다. 이 망측한 정당으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함에 난데없는 ‘백골단’과 ‘땃벌레’가 난무하여 전쟁의 소란보다 정치 소동이 더욱 심했다.

 
그러나 선거기는 점점 다가오고, 1952년 선거가 임박해지자 이 박사는 부득이 정치 파동을 일으켜, 소위 발췌 개헌으로 그 뜻을 이루었다.

 
이렇게 해서 이 박사는 재선은 되었으나, 그 재선에 있어서도 선거 방식이 괴상하였다. 처음에는 ‘이범석 장군 지지’라는 벽보가 여기저기 나붙고, 이 박사와 이범석 씨가 러닝 메이트로 출마하였다. 그러더니 웬일인지 선거 4, 5일 전 하룻밤 사이에 통금 시간을 이용하여 이 박사와 이범석의 러닝 메이트 사진이 싹 없어지고, 대신에 ‘함태영(咸台榮) 부통령 입후보’라는 벽보가 붙었다. 선거의 결과가 무사히 그대로 되었다. 즉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이었다.

 
그러나 이범석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이 조용하였다. 선거인지, 장난인지, 목불인견이었다. 1948~1953년 4, 5년 동안에는 한국 동란으로 국민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거니와 이 박사의 정치 풍파 조성에 의하여 정치인의 고통은 동란의 고통에 못지 않게 괴로웠다.

 
이러한 정치 정세에 처하여 국내 정치인과 엽관배(獵官輩) 대소인의 태도는 대략 이렇다 하겠다. 즉 대부분의 인물들이 친이파(親李派)요, 반대파로는 부통령직을 내놓은 김성수, 이 박사의 비정을 비난하고 내무 장관을 사임한 조병옥을 비롯한 한민당, 김시현(金始顯)을 비롯한 한독당과 국무 총리를 용퇴한 장 박사 등이었다.

 
그리하여 국민간에는 이 박사를 제거해야만 나라가 잘되어 나가겠다는 소리가 자자하였다. 그 제거에는 물론 폭력과 선거의 두 가지 수단이 있게 마련이다.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의 김시현 권총 발사 사건과 조병옥 주동의 국제 구락부 사건이 그것들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장 박사에게 한국인 L 장군은 모 중대 기관의 결정이라면서 “대통령을 제거할 것이니, 곧 차기 정권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장 박사는 너무나 졸지여서 반신 반의하였다. 그러나 L 장군의 지위와 인품으로 보아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L 장군은 이 대통령 제거 방법까지 말하더라는 것이다. 즉 이 박사는 노인이니까 서울 내왕의 비행기에 태워서 쇼크로 사망하였다고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 박사와 나는 의논하여 이용설(李容卨) 박사를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와 사법부도 대충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후, L 장군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에 대하여 장 박사도 L 장군 차후 소식을 묻지도 않고 우물쭈물 넘겨 버렸다. 나는 이 사건에 관하여 장 박사의 품격의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조각할 때의 장 박사는 오색 교사(五色巧詐)하지 않고 진실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L 장군에게 그 후 소식을 묻지 않음으로써 정권 획득에는 적극적으로 폭력을 쓰지 않겠다는 그 태도였다.


민주당 시대


 
민주당 창당 시절, 부통령 시절, 민주당 집권 시절에 대하여는 내가 특기할 것이 많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몇 가지만 기록하겠다.

 첫째, 민주당 창당 때 조병옥 박사는 몹시 장 박사를 칭찬하였다. 장 박사의 인기와 능력을 격찬하는 것이었다. 민주당을 창당하는 데는 어느 누구가 없어도 좋으나, 오직 장 박사만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민주당과 조선 민주당과 장 박사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조 박사의 이러한 주장을 나로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시의 정세로서, 독자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둘째,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때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누구로 하느냐, 즉 대표 최고 위원 신익희로 하느냐, 최고 위원 장면으로 하느냐에 대해 내부적 이론이 구구하였다. 일부에서는 장 박사를 내세우고 일부에서는 신익희 씨를 내세워 그 의견의 차이가 심각하였다. 피차에 일리는 있었으나, 나는 당의 서열과 당의 인화를 위하여 장 박사의 양보를 권고하였던 바, 결국 그렇게 되어 장 박사가 부통령에 입후보하여 저 유명한 대구 개표 중단 사건의 어려운 고비를 겪고 훌륭히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때에 장 박사의 표현의 걸작이라 할까, 인격의 고상이라 할까 하는 일이 있는데, 즉 장 박사는 내게 누구누구라고 지명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귀하를 대통령 후보로 하려는데 한근조(韓根祖)는 부통령 후보로 하여야 한다고 지껄이고 있으니 귀하가 그것을 허락한 것인가? 나는 그것은 그의 의견일 것이고, 당신들도 아다시피 나로서는 그 일에 대하여 의견과 희망을 말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이며, 믿음직한 인격이냐 말이다. 부통령에 당선한 때에는 “‘그것’이 원칙이요, ‘이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이라는 것은 순위의 양보를 말하는 것이요, 이것이라는 것은 부통령 당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확한 판단으로 나를 다시금 감격케 하였다.

 셋째, 늙은 대통령 밑에 부통령 직위를 얻음으로써 정권 획득상 유력한 거점을 획득한 민주당은 후일에 대비하기 위하여 정책의 발견, 책정에 여념이 없어야 하겠는데 민주당은 그렇지를 못하고 분파만 일삼았다. 그 분파는 정책의 엇갈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장차 있을 정·부통령 선거에 장 박사와 조 박사의 대립의 다툼인 것이다. 민주당의 정·부통령의 순위는 당의 서열로 보나, 경과로 보나, 또는 도리로 보나 자명한 것으로서 이정래(李晶來)와 나는 그 순위 조정에 대하여 노력한 바 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실패는 결국 민주당의 실패를 초래하고, 나아가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큰 지연을 가져오게 하였다.

 
넷째, 1960년 7월 28일 밤 두 명이 서명한 구파측의 민주당 분당 선언은 그들 당파의 책임이요, 결코 장 박사의 책임은 아니다. 7·29 총선거의 결과는 참으로 우리 헌정사상 다시 없을 훌륭한 우리 국민의 의사 표시였다. 민주당 조재천 선전 부장이 어떤 강연회에서 “우리는 자유당과의 원내 투쟁에서 손 아닌 발까지 들어도 모자라서 항상 진다”고 한, 그 애절 통절한 읍소를 유권자들이 명심하고 있다가, 7·29 총선거에서는 그 뜻을 발휘하여 민주당은 손을 다 들지 않아도 능히 정치할 수 있게 해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7·29 총선거는 참으로 귀중한 국민의 심판이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 라이 박사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본의 그것보다 앞설 것이다. 일본에는 민주주의 발전의 장애물이 많으나 한국에는 그것이 없다”고 찬탄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런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당을 두 갈래로 쪼개 놓고 한 갈래로만은 손이 부족하다 하여 무소속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마치 책상이 작아서 공부를 못하겠다 하므로 큰 책상을 마련해 주었더니, 책상이 너무 커서 거추장스러워 공부를 못하겠다 하여 그것을 절반 잘라 버리고 다시 그 부족을 느껴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덧조각을 대는 것과 같은 미욱한 짓이다. 그러므로 이런 짓을 피하고 민주당 신·구파를 망라하여 진정한 의미의 정당 내각을 조직하여 국민의 훌륭한 의사에 보답하고,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도모했어야 할 것이다. 민주당 구파에 상당한 자리를 줌으로써 당원의 무슨 불평이 있든지, 또는 탈당 소동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총리로서의 장 박사는 “나는 국민의 의사에 따라서 정당 내각을 조직했을 뿐이다”라고 우겨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당 기구상 총재의 의사대로만 할 수가 없어서 당의 일부는 분열돼 나가고, 무소속이 들어와 우스꽝스러운 명목만의 정당 내각이었다.

 
그러므로 당 총재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하여 당의 중론이 당헌 개정을 주장한 바 나는 당헌 개정 위원장으로서 총재의 권한을 강화하는 당헌을 1961년 5월 초 여행을 떠나기 전 4월 중에 갖은 애로를 무릅쓰고 통과를 강행했던 일도 지금까지 기억에 새롭다.

 
그리하여 총재의 당에서의 강권을 어느 정도 보장하였다.

 
다섯째, 장 박사 집권 기간 중에 나는 장 박사에게 세 가지 정책을 제의했다. 그 하나는 질서 회복의 강경책이요, 그 둘은 정당 내각의 견지요, 그 셋은 소급법이 불필요하니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첫째는 장 박사 집권 초기에 질서가 극도로 문란하여 부정 부패와 범죄가 만연되어 공무원의 책상에는 먼지가 펄펄 날아 그 집무 자세가 말이 아니니 우선 기강을 세우기로 하고, 민주당의 소위 국토 개발 정책은 뒤로 미루고 예산을 그 당시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보다 한 5백억 환 정도 삭감함으로써 민주당이 재야 시절에 자유당더러 예산을 낭비한다고 비난하던 그 공약도 철저히 지켜 가면서, 처음 1년 동안은 질서 회복에 힘쓰자는 것이었다. 그 질서 회복 방법에 있어서도 숱한 범죄자를 한꺼번에 다스릴 수는 없으므로 그중에서 우선적으로 하층 계급 아닌 상층 계급, 그 상층 계급 중에서도 자유당원과 그 동조자 아닌 도리어 민주당원 및 민주당 동조자들 가운데서 실업계, 관계, 정계 할 것 없이 가장 악질적인 수명을 발견 포착하여 혹형에 처하자 했다. 나는 법률가답지 않은 ‘정책적 형사 정책’, 즉 형사 정책보다도 더 정책적인 편의주의를 제의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행함으로써 일반에게는 일벌 백계가 되고 장 박사의 입장에서는 읍참 마속으로 장 박사는 자기의 팔다리를 스스로 베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자는 것이었다.

 
둘째로 정당 내각 견지의 문제는 이러하다. 윤보선 대통령이 당의 서열과 경과와 공로를 무시한 김도연 박사의 총리 지명으로 장 박사는 어렵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겪어 총리가 되었다. 장 박사는 그것에 대한 감정도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국가적으로 이것을 볼 때에는 그 감정이라는 것은 사소한 것이요, 또 장 박사는 여하튼 어김없이 총리가 되었으니, 총리의 권위로써 이미 깨어진 민주당이라 할지라도 실질상으로 보철(補綴) 공작을 해보자는 것이다. 민주당 조각 당시 1960년 8월 하순 어느 날, 정일형 박사는 맹장 수술을 받고 누워 있는 나를 찾아와 답답한 사정을 말하면서 “지금 조각 본부에서는 무소속 의원을 전부 포섭하기 위하여 법무·국방 및 농림의 3부 장관을 주려고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곧 붓을 잡고, 민주당이 정말 집권하여 정치를 하겠거든 법무와 국방은 무소속에 주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총리에게 보냈더니, 그래서인지 법무에는 조재천, 국방에는 현석호로 결정하고 무소속에는 주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소급법 문제에 있어서는 법률상 좀처럼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고, 또 그 제정 후에는 소급법 제정이 결국 민주당 출신 국회 의원의 라이벌 퇴치밖에 되지 않으니, 조속히 그 수습책을 강구하자는 것이었다.

 
장 박사는 나의 이상 세 가지 제의가 모두 옳다고는 하였지만, 첫째의 질서 회복책에 대하여는 그다지 성의를 보이지 않았고, 둘째의 정당 내각 견지는 장 박사도 유의하여 실천해 보았으나 방법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 빗나간 방법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1961년 4월 초의 어느 날 오후 1시경, 오위영(吳緯泳), 홍익표(洪翼杓) 등 각료 네 사람이 사표를 내어 그것이 수리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때 이것이 깨어진 민주당 보철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곧 총리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으나 비서실을 통하여 오후 7시에 반도 호텔 총리 숙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받고, 나는 7시 5분에 총리 숙소에 도착하여 7시 50분까지 기다려도 들어오라는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비서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선생님께서 오시기 5분 전에 유진산 의원이 들어갔다”고 하였다.

 
나는 그때에 아연하였다. 아마 유 의원의 용건과 나의 용건이 같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8시에야 비로소 허락되어 총리실에 들어갔더니 유 의원은 딴 문으로 나갔는지 총리 혼자만 있었다. 그때 총리는 피곤하여 기진 맥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총리가 쓰러져 누우면서 “그대가 말하는 것을 들을 터이니 용서하라”고 하자, 옆방에 있던 총리 부인이 갑자기 나와 총리 옆에 앉았다. 그것은 총리가 피곤해 하니까 내 말을 견제하려고 하는 것인지 총리와 나와의 대화를 들으려고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여하튼 나는 각료 보충에 대하여 “김도연 의원, 백남훈(白南薰) 의원…” 하고 말을 꺼내자마자 총리는 벌써 그 말을 알아치리고 “그 문제는 지금 유 의원과 의논하여 구파에서 열 명을 선출하여 보내면 그 가운데서 총리가 다섯 명을 선정하기로 약속하였다”고 말하였다.

 
조금 전의 그대로였다. 과연 유 의원과 나의 안건은 동일한 것이었다. 5분 지각으로 나는 실패하였다. 실은 나는 수개월 전부터 민주당 신·구파 합작 공작을 벌여 김도연 의원과 백남훈 의원을 각각 두 번(백 의원의 경우 한번은 간접적) 만나 그 의견을 타진한 적이 있어, 민주당의 신·구파 합작이 자신 만만하던 나로서는 천만 낙담이었다. 그 자리에서 도리어 내가 쓰러지고 싶었다. 그때의 광경은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총리의 이와 같은 결정은 총리가 평소 호오(好惡)의 감정이 심한 분이어서 그 열 명 중에서 좋은 다섯 명을 쓰고, 나머지 다섯 명은 버리자는 뜻일 텐데 그러면 그 버림받은 다섯 명의 반발은 그전보다 더욱 심할 것이 뻔하고, 또 유 의원 이상의 구파 수뇌부인 김도연 의원과 백남훈 의원의 소극적인 반발이 여전할 것은 또한 뻔한 일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만사 휴의(萬事休矣)라,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울고 싶은 심경이었다…. 총리실을 나서니 시간은 벌써 9시였다.

 
이보다 좀 앞서 1960년 11월 중순 어느 날, 4·19 부상 학생과 유족들이 국회 의사당에 침입하여 흙발로 의장의 책상에 올라가 국회 의원들에게 대성 질호(大聲叱呼)했다. 그 까닭은 서울 지방 법원의 장모(張某) 판사의 부정 선거 원흉들에 대한 형량이 너무 가벼워 심지어는 무죄 선고까지 받은 사람도 몇 사람이나 있었는데, 그때 “법이 없어서 놓아 주었노라”라는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부상 학생과 유족들은 국회에 와서 “필요한 법률을 만들지 않고 있는 국회 의원들은 소용없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들의 애국심 유무는 장차 조사해 보아야 할 일이고, 우선 현저한 국회 모독 사실을 추궁하기 위하여 그들을 체포하는 것이 순서이겠는데, 당시 국회 의장은 의원의 의견도 묻지 않고, 자의로 난동하고 나가는 그들과 밖에 있었던 군중들을 정문 밖에 모아 놓고, 자기는 발코니 위에서 “그대들의 애국심은 인정되는 바, 곧 법 조치를 취할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해놓고, 자기는 곧 총리를 만나러 갔다는 소리가 의사당 안에 떠돌았다.

 
민주당 집권 시절에 장 박사와 나의 상관 관계가 이상과 같으니, 나도 장 박사와 근본적으로 토의할 것을 내심 기대하였고 장 박사도 또한 그러했는지, 내가 영국 여행을 떠나기 한 주일 전과 떠나던 61년 5월 1일 아침 두 차례에 걸쳐 장 박사는 워싱턴에서 만나서 의논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즉 장 총리는 그해 7월 12일부터 19일까지 일주일 간 워싱턴 체류의 스케줄을 짜놓고 있었다 한다.


맺는 말


 
이러한 약속은 한낱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나, 조용히 내가 아는 장 박사를 추모할 때 그의 언행은 하나도 일치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다만 그 실행이 그의 성격상 뜻하는 바를 지연시켜 온 게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5·16 쿠데타 당시 무력하게도 정권을 내놓았다고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정권 유지에도 폭력을 쓰지 않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권 획득에도 폭력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을 나로서는 짐작하고 있다. 다만 장 박사는 민주당 시절에 신·구파의 다툼과 정치 자금의 곤란 등으로 이상과 같은 성질이 다소간 변질된 것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아, 이러한 인물이 우리의 실제 정치에 기수가 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은 장 박사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장래의 큰 불행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