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운석 장면

회고 - 박애의 정치가, 내가 모신 10여 년 (이홍열) 이홍열(李泓烈, 전 장 박사 비서) 조용한 귀공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철저한 민주주의의 신봉자 여기에 가다.” 허탈감에 빠진 나에게 감회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평소에 무척 존경하고 믿었던 어른이 갑자기 가시니 눈앞이 캄캄하고 허무한 감뿐이다. 중태에서 신음하시던 박사님을 뵈옵고도 현대 의학의 권위와 기적이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던 나의 유일한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박사께서 가시는 마지막 길에 영광이 깃들이기를 기원하며 비통에 잠길 틈도 없이 철야하다시피 장례 준비에 전념하고 있는 이때, 원고 청탁을 받고 옛 일을 잠시 돌이켜보니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장 박사를 모신 지 10여 년, 너무 크고 깊고 넓어서 그 어느 한 모퉁이도 부여잡을 수 없다. 장 박사의 치적은 널리 세상에 알려.. 더보기
회고 - 불멸의 의지 (이귀영) 이귀영(李貴永, 전 장 박사 경호 책임자) 5·10 총선이 맺어 준 인연 오랜 경찰 생활을 통해서 가장 뚜렷이 기억에 남고 또 감격과 울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직한 것은, 장면 박사를 모셨던 3년 남짓한 기간의 일들이었다. 해방 이듬해에 내가 동대문 경찰서 경무계장으로 근무할 때 그분은 우리 관할인 동성 중학교에 교장으로 계셨다. 그 뒤 종로 경찰서에 전직 중에 5·10 총선거를 맞았다. 당시의 선거 분위기는 살벌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온갖 폭행과 치상이 횡행하였고 좌익 계열의 책동도 엄청났다. 나는 이런 갖가지 정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하여 동분 서주했다. 장면 박사는 마침내 관할 지역인 종로구에서 출마하였다. 평소부터 그분을 존경해 오던 나는 그분의 신변 보호에 유달리 신경을 썼다. 내가 바랐던.. 더보기
회고 - 대채로운 업적 (윤형중) 윤형중(尹亨重, 신부) 고난의 길 앞장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장면 박사는 모범적인 신앙인이었다. 양친이 다 독실한 신자였고, 그러한 가정에서 자란 장 박사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일반의 사표가 되었다. 약관에 벌써 확고한 신앙인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었던 모양이다. 기미 3·1 운동을 전후하여, 그는 서울 용산 신학교의 선생이었다. 그때의 신학교라면 마치 교도소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장 박사는 일본 말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일본 말만 가르치는 선생은 아니었다. 외부 사회와 격리된 신학생들에게 3·1 운동의 진상을 들려주었고 암암리에 민족혼을 고취했다. 장 박사 나이 20여 세였다. 그가 신학교에서 가톨릭 신자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게 된 것은, 일찍이 일본인 소학교를 다녀 매우 .. 더보기
회고 - 민주주의의 상징 (유홍열) 유홍열(柳洪烈, 문학 박사·대구 대학장) 나의 견진 대부 내가 장 박사를 처음 뵈온 것은 1936년 가을이라고 생각된다. 내 나이 26세로 명동 성당에서 견진을 받을 때였다. 이때 나는 경성 제대 역사학과를 나와 대학의 조교로 있었다. 나는 마침 동성 상업 학교 박 교장을 알고 있었던 터이라 박 교장의 소개로 명동 성당에서 견진을 받게 되었다. 내게 견진을 내리신 이가 바로 장 박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분은 아우 장발(張勃) 씨와 더불어 우리 나라 최초의 방지거 제3회원이실 뿐더러, 이 나라 가톨릭 발전에 크나큰 공적을 쌓아 오신 분이었다. 그 뒤부터 나는 장 박사를 견진 대부로 모시게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 너그러운 인품, 그리고 한국 가톨릭 역사에 영원히 빛날 분을.. 더보기
회고 - 장 박사 선종기 (유수철) 유수철(柳秀徹, 혜화동 본당 신부) 굳은 신앙인 장면 박사를 처음 안 것은 1932년 내가 동성 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지만, 그분을 좀더 잘 알기 시작한 것은 내가 철이 좀 들기 시작할 3학년 때 박사님께 영어 회화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처음에는 여태까지 다른 선생님들께 배워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발음에 어리둥절했지만, 이것이 진짜 영어 발음인가 보다 생각하였다. 다른 선생님들보다 특이한 인상을 주었으며, 싫증 안 나고 재미있게 가르치시고, 점잖고 어딘가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느끼게 하고, 열심한 교우 선생님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우리가 5학년 졸업반이 되던 해, 박준호 교장께서 별세하시어 장 박사께서 후임 교장이 되시고 신임 교장으로서 우리에게 첫번째 졸업장을 수여하신 일은 지금도 잊혀.. 더보기
제2대 국무총리 재임시 사진 - 4 더보기
제2대 국무총리 재임시 사진 - 3 더보기
회고 - 장 박사의 건강과 나 (유병서) 유병서(兪炳瑞, 의학 박사) 내가 부족하나마 장 박사님을 모시고 그분의 건강 문제를 돌보아 드리기 시작한 것이 어언 10년이 되었다. 그전에도 내가 현재 살고 있는 혜화동에 근 30년 간을 살았고, 그분도 이웃에서 수십 년 전부터 사셨기 때문에 그때부터 뵈었고, 늘 존경하고 지내면서도 그분의 건강이 나쁘지 않아서 별로 찾아뵙지 못했다. 4·19 직후의 공백기에 그분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보아드리기 시작한 것이 줄곧 작고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실한 교육자였고, 양심적인 정치가였으며, 또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장 박사께서는 매사에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도 굉장히 꼼꼼하셔서 의학에 대한 상식도 웬만한 의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알고 계셨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 상태도 당.. 더보기
제2대 국무총리 재임시 사진 - 2 더보기
회고 - 교육가로서의 운석 (유동진) 유동진(柳東璡, 전 경전 사장) 일인(日人) 교무 주임을 내쫓은 배짱 내가 동성 학교로 교사직을 얻어 가기는 1931년 9월로 기억된다. 당시 장 박사는 서무 주임이었는데, 내가 들어간 해 4월엔가 평양 교구에서 일을 보다가 왔다고 한다. 동성 학교는 애초에 염천교 건너 만리동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어물 객주업(魚物客酒業)을 하던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교명을 소의(昭儀) 학교라 했다. 방규환(方奎煥) 씨가 초대 교장으로 들어서면서 ‘소의 상업’이라 고치고, 다시 갑종 상업으로 승격하면서 남대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남대문 상업이라 했다. 운영 관계로 박준호(朴準鎬) 씨와 의논하여 학교 운영권을 가톨릭 재단으로 넘겼고, 그 후에 동성(東星)으로 개명하여 지금의 혜화동에 옮긴 .. 더보기
제2대 국무총리 재임시 사진 - 1 더보기
로마 교황청 실버스터 훈장수여 (1954.05.22) 더보기
모내기 더보기
이대통령 부부 및 훈시하는 장면 총리 더보기
이승만 대통령 훈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