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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외유 내강한 신념의 인간 (조재천)

조재천(曺在千, 전 법무부 장관)


존경과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분


 그것은 1950년의 일이다. 6·25 동란으로 전세가 한참 불리하여 정부가 대구에 와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피난해 간 뒤의 일이었다. 당시 대한 민국의 사실상 영토는 경상 남북도의 각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경상 북도 지사로 있었는데 장 박사는 국무 총리로서 초도 순시차 대구에 왔으므로 비로소 뵈옵게 되었다. 장 박사에 대한 첫인상은 말이 적고,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첫눈에 신사이면서도 성실한 인간됨을 알 수 있었다. 눈부신 외교 활동을 해 온 분이란 것을 나도 알고 있었고, 신앙에 철저한 분이라는 것도 들어서 짐작은 했으나, 막상 그분을 직접 만나 뵈었을 때 존경심과 친근감을 느꼈던 것이다.

 
몇 해 후, 내가 정치 활동을 하면서 장 박사를 뫼시고 일하게 되었다. 야당으로 갖은 시련을 겪으면서, 또 제2 공화국 수립에 참여하면서 나는 그분과 같은 노선을 밟게 되었고, 주어진 수난을 달게 받으면서 일했다.

 
그러다가 5·16을 만났고, 또 신앙 생활의 인도를 받은 것도 다 장 박사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운명적인 무엇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고인이 된 분의 명복을 빌면서 운석 선생을 회고하자니 여러 가지 감회가 새롭다.


저격에도 태연


 
세상 사람들은 그분은 온순하기만 하고 박력이나 용기가 없는 분으로 말한다. 그러나 실지로는 그렇지 않다. 장 박사가 부통령 시절에 시공관에서 저격을 당했을 때만 해도 누구보다도 담력이 센 분임을 알 수 있다.

 
1956년 9월 28일 제2차 민주당 전당 대회가 거의 끝날 무렵 장 박사가 단상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던 중 저격을 받았다. 순간, 대회장은 벌집을 쑤셔 놓은 것같이 시끄러웠다. 당원들은 범인을 잡아 때리기도 하고, 혹은 그분의 상처를 알기 위해 몰려드는 등으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때 그분은 단상으로 다시 올라와서 피가 흐르는 손을 들어 보이면서 “동지들, 내가 건재하니 안심하시오” 하고 장내를 진정시켰다. 저격당한 뒤라 몹시 당황했을 터인데,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장내를 진정시키는 등 정치가로서의 용기를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도 할 것이며 진정한 용기이다.


단호한 태도


 
그 뒤 59년 10월 26일 정·부통령 지명 대회에서 조병옥 박사와 러닝 메이트로 선출되었으나 약간의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그분의 정치적인 단호한 태도로 수습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신·구파의 파벌로 인하여 서로 자파를 대통령 후보에 선출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민주당 내의 신·구파 싸움은 이미 창당 당시부터 그 씨를 품고 있었고 지명 대회가 있을 때마다 대결을 면치 못했다. 이 신·구파의 대립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민주당 입후보 공천 때에 표면화되어 개표 결과 484 대 481의 단 3표 차이로 조 박사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너무도 근소한 차이로 지명된 관계로인지 또는 어떠한 정치적 고려가 있었던지 조 박사는 “근소한 차이니 수락할 수 없고 며칠 생각해 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며칠을 두고 보류 상태로 둔다면 그동안 어떠한 잡음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이 걱정이었다. 장 박사는 연단에 나아가 조리 있고 단호한 태도로 사퇴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방법인 투표로 당선된 이상 그 결정에 복종하여야 하며, 모든 당의 정치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해 나가야지 사양한다거나 보류하는 것은 당원 동지들의 의사에 부합되지 않고 혼란을 초래할 뿐이니, 승낙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조 박사 개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도 당을 위하고 민주 정치를 위하는 길로서 중요한 것입니다”라는 연설을 하여 당원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어서 “나는 당원 동지들의 부통령 후보 지명을 기꺼이 받겠습니다”라고 말하여, 만장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이로써 조병옥 박사는 그 자리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운석 선생은 부통령 입후보자로서 다시금 자유당 독재 정권과 맞서게 되었다.


외유 내강한 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차츰 일인 독재의 천년 성(城)을 구축하기 위하여 발버둥치며 권세의 맹위를 떨치기에 급급할 무렵 민주당원들은 갖은 악조건하에서 목숨까지 걸고 싸워 왔지만, 특히 장 박사는 그러했다. 자유당 시절에 민주당 간부들이 가는 곳마다 야당 탄압은 악착 같았다.

 
장 박사를 모시고 선거 유세를 다니면서 겪은 쓰라린 수난을 다 기술하면 이 나라 야당 투쟁의 생생한 역사가 될 만하리라.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것을 다 밝힐 지면은 없다. 다만 가는 곳마다 끊일 줄 모르는 미행, 물샐틈없는 감시와 갖은 방해, 그리고 살벌한 공포 분위기가 감도는 그러한 속에서 독재와 과감한 투쟁을 벌이는 전위대로서 장 박사의 태도는 조금도 굴하지 않는 외유 내강한 분이었다는 것만은 명백히 하여 두고 싶다.

 
이와 같은 모진 독재와 탄압을 무릅쓰면서도 오랜 세월을 두고 민주당이 대여, 대정부 투쟁에 앞장서 싸우면서 길을 닦고 탑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4월 혁명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석 서거 후 “대통령 후보 없는 선거는 무의미하다”는 구실로 3·15 선거를 포기하자는 의견을 당내 일부에서 내세웠지만, 장 박사를 비롯한 정론자들이 선거 포기를 반대하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독재 투쟁을 계속했기 때문에 3·15 부정 선거를 국민 앞에 여실히 증명할 수 있었고, 따라서 마산 사건이 터지고 4·19가 터졌던 것이다.


“나도 가야지”


 
5·16, 그것이 과연 애국적이고, 진정한 혁명이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줄 날이 있을 줄 안다.

 
1960년 8월 23일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그해 9월 10일에, 즉 18일 만에 민주당 정권을 전복키로 시내 충무가(忠武家)에서 정식 결의하고 부서를 정하여 활동을 개시한 사실은, 그들 자신이 발행한 한국 군사 혁명사, 한국 혁명 재판사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1962년 6월 1일 소위 이주당(二主黨) 사건이 발표되고, 거기에 관련된 혐의가 있다고 하여 장 박사를 기소하고 공판을 하다가 구속하여 형무소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 변호인의 한 사람이던 나는 장 박사를 위로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때 장 박사는 “5·16 후 많은 동지와 국민들이 감옥에 가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유야 어찌 됐든 나도 가야지. 그래야만 내 마음이 가벼워지겠어”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무한한 뜻이 내포되어 있고 장 박사의 인간성이 여실히 나타나 있는 이 한마디 말을 국민 앞에 알리고자 한다.


정치인이기 전에 인간이 되라


 
장 박사는 “정치인이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5·16 후 나는 장 박사를 정치인으로서가 아니고 신앙인으로서 대할 기회가 많았다. 그분은 영혼의 구원을 말하고 신앙을 가질 것을 권고하였다.

 
나는 일찍이 종교에 관심을 가졌고, 광주 고보 시절엔 장로 교회에 나가 보았고 성경 연구회에도 나갔으나 만족할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당시 학생들을 현혹하던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 공감하기도 했고, 광주 학생 사건 때 경찰에 잡혀 가기도 했으며, 교원 시절에는 불교 강의를 듣기도 했지만 어느 종교도 선택하지 아니한 채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갖가지 종교에 대한 관심만은 가지고 내려오는 동안에 어렴풋이 가톨릭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도 수년이 흘러갔는데 마지막 신뢰할 수 있는 장 박사의 권고가 가톨릭에 귀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는 조용한 성당 안에 경건히 꿇어앉아 인간성의 순화를 위하여, 인간의 구령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장 고귀하고 행복한 시간으로 삼게 되었다. 그 기도 중에 하느님의 곁에 가서 계실 장 박사의 영복을 비는 구절이 들어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