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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초인적인 외교 역량 (장기영)

장기영(張基永, 전 대한 중석 사장)


유엔의 한국 승인


 
1948년은 우리 나라가 유사 이래 처음 국회를 연 해이지만, 밖으로는 한국이 유엔에서 독립 정부로 승인받은 중요한 해이기도 하다.

 
당시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 한국 대표로 수석에 장면 박사, 차석에 나, 그리고 위원에는 조병옥, 정일형, 김활란, 모윤숙, 김우평, 전규홍, 김준구 등 제씨로 구성되어 참석하였다.

 
12월 12일, 소련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엔 한위(韓委)를 1년 간 존속할 것이 결의되고, 한국의 승인안이 제출되기는 이보다 앞선 12월의 일이었다.

 
그동안 한국 승인안이 상정되기까지 장면 박사의 활약은 눈부신 것인 동시에 눈물겨웠다.

 
유엔 정치 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많은 대표로부터 박수 갈채와 지지를 받았다.

 
“한국의 승인은 한국인의 단결을 촉진할 것이며 이것만이 한국 통일을 위한 지름길이다. 나는 남북한에서 외군들이 모두 철수되기를 바란다. 지난번 소위 북한의 총선거라는 것은 우리 남한과 달리 전혀 자유 분위기가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북한의 유권자들은 공산당들의 부당한 감시하에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해 그들이 거부하고 싶은 입후보자에게 거부할 수 있는 흑함에 투표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유엔은 공산 북한을 마땅히 규탄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 남한은 자주 독립 국가로 승인해 주어야 한다”는 제안 설명을 받아들여 유엔 정치 위원회는 한국이 합법 정부임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1948년 12월 8일, 유엔 한국 위원단을 조직하자는 미국과 중국의 제안이 41대 6으로 가결되었다.

 
이어서 12일에 열린 총회에서 한국이 최종적으로 40대 6으로 정식 승인을 받았다. 그때 한국 승인을 위하여 동분 서주하던 장 박사의 초인적인 노력은 외교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교황에게서 받은 묵주


 
1948년, 대망의 한국 승인은 얻었지만 가입은 되지 않아 커다란 과제가 되고 있었다. 어느 날 장 박사와 나는 교황을 알현키 위해서 로마에 갔다. 교황이 방문객을 만나는 데는 7개의 문이 있어, 신분 여하에 따라 장소가 달라지고 가장 귀빈만이 교황의 서재에서 알현할 수가 있었다.

 
교황께서는 예를 깨뜨리고 서재로 우리들을 초청, 한 시간 동안이나 담소를 나누면서 하루속히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확고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주로 정교(政敎) 얘기와 교리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서 잘 몰랐으나 교황께서는 손수 희고 검은 묵주 두 개를 각각 나와 장 박사에게 주면서 흰 것은 아내에게 검은 것은 우리들이 가지라고 했다.

 
장 박사는 어쩔 줄 몰라 “일생에 가장 값비싼 보화를 얻었다”고 무척 기뻐했다.

 
귀국 후 이것을 노 대주교께 보였더니 깜짝 놀라면서 “이것을 어떻게 얻었소? 나도 아직 얻지 못했는데” 하면서 몹시 부러워하였다. 이것은 벌써 18년 전의 옛일이라 이제 묵주는 칠이 벗겨져 낡았고 장 박사는 고인이 되었다.

 
그분은 마음이 너무 유순하여 어떤 결단을 내리기 전에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난 후에야 결정을 내렸고, 조심성이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굽히지 않는 강인한 의지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가장 존경하는 동지로 여겼으며 또한 그에게서 배운 바도 아주 많았다.


술 담배 몰라


 
파리 유엔 대표 단원은 9인이었으나 3개 당으로 나눌 수 있었다. 당이라고 하면 무슨 정당이나 파별을 의미하는 것 같으나 실은 당시 우리들이 만든 명칭이었다.

 
주당(酒黨)은 나를 위시하여 조병옥, 전규홍, 김우평 제씨였고,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김준구 제씨는 국민당(國民黨), 장 박사는 독립당(獨立黨)이었다.

 
왜 그분이 혼자서 다니시기를 좋아했는가 하면,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도 당시 한국의 승인 문제를 위해 천주교인을 만나러 다녔고 또 위장이 몹시 약해 육식을 하지 않고 국수를 즐겨 먹었다. 자연 식사도 혼자서 하고 아침 저녁엔 미사에 꼭 참례하기 때문에 늘 혼자였다. 나는 가끔 그분에게 “여보, 국수 먹으러 갑시다.” “아니, 나 때문에 일부러 먹으러 가는 것 아니오? 아무튼지 갑시다” 하고 앞장서서 혼자서 잘 다니는 국수 집에 나를 안내하여 같이 국수를 먹기도 했다.

 
또 그분은 배나 비행기를 타면 멀미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쪽에 누워서 조용히 책을 보거나 명상에 잠겨 우리와 별로 대담을 하지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멀미를 앓고 있는 그분에게 “여보, 술을 먹으면 멀미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뱃속에 있는 벌레들도 죽으니 이런 때 술을 좀 하시오” 하고 술을 권하면 그분은 웃으면서 “공연히 내게 술 먹이려고 하시는군…” 하고 술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파리에서 받은 주미 대사직


 
1949년 초에 교황을 알현하고 나오자 본국 정부에서 전보가 와 있었다.

 
“주미 대사 임명, 빨리 오라.”

 
장 박사는 미국으로 직행을 하였다. 떠나기 전에 파리 총회로 올 때, 여비 받은 것 중에서 남은 것을 반씩 나눠 나와 그분이 각각 가지면서 “이 돈으로도 모자라지 않고 오히려 남았으니 다행한 일이오” 하면서 서로 웃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파리로 떠날 때 정부에서 받은 돈이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미국으로 떠나자 차석으로 있었던 나는 뒷일의 처리를 위하여 파리로 가서 그동안에 쌓인 서류를 정리했다. 아마 6, 7트렁크가 넘는 서류를 챙겨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해방 후 유엔 한국 위원단이 있을 때, 장덕수(張德秀) 씨와 나, 김도연 씨 등이 외교 문제를 맡았었는데 그 뒤 이춘호(李春昊) 씨와 나, 그리고 장 박사가 맡게 되어 초창기의 외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 뒤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후에는 나와 장 박사, 김도연 씨 등이 외교 문제를 책임 맡게 되어 나와 장 박사는 이상하게도 항상 같이 일하게 되었다.


성인다운 면모


 
이미 고인이 된 그분이지만 건국 초기 제헌 국회 의원 시절부터 많은 인연을 맺어 왔다.

 
제헌 국회 때는 그분이 연한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점심때는 같이 백숙 집에 가서 점심을 나누었다. 그분은 장난기 어린 거짓말이나 농담을 하지 않아 대인 관계가 항상 진지했다.

 
한때는 나와 정치 노선이 달라 서로 발을 끊은 적도 있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얼마 후 곧 우리 사이의 정의는 다시금 두터워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마음은 온순하신 분이 3·15 부정 선거와 5·16 군부 쿠데타의 와중을 거쳐 심리적인 타격을 너무 많이 받은 탓과 지병인 간장염과 함께 큰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만약 그분이 종교에나 교육 사업에만 종사했더라면 수명도 훨씬 연장되었을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의 숭고한 종교적 관념과 훌륭한 교육자적 지도력과 훌륭한 민주주의적 영도력, 그리고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인간애는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성인에 가까웠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파란 많은 한국의 정치 풍토에서는 아직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이었는지 모른다. 훨씬 후세에 가서 우리의 후손들은 그런 훌륭한 분의 고난적인 생애를 애도하며 다시금 목마르게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길을 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