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4. 해방 공간 속 : 정치에 투신하다


 1945년 8월 15일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는 감격을 맛보았다. 해방이란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의 환희에 찬 희망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커다란 실망과 고통을 준 비극적 역사의 원점이자,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추구했던 ‘근대화’의 본격적 출발점” 이었다. 특히 남한에 있어 해방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이상과 국가적 독립·개화·자강·합리주의·실용주의·과학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근대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본격적 노력의 출발점이었다. 

해방

≪해방≫

[심훈은 1930년 3월 1일에 지은 "그날이 오면"이란 시에서 조국의 광복을 노래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가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며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로이리까···]

 

그러면 운석 선생이 해방 이후 건국기에 어떠한 활동을 전개하였는지를 그 자신의 회고를 통해 살펴보자. 먼저 다음은 운석 선생이 개괄한 일제의 패망에서 반탁운동, UN 한국임시위원단의 활동, 5·10 총선, 제헌국회의 구성, 그리고 정부 수립에 이르는 과정이다. 

 “태평양전쟁이 종말기에 도달하자 미·영·소 거두들이 전쟁수습책을 협의하던 얄타·포쓰담·카이로 회담에서 극동문제를 총괄적으로 논의할 때 한국문제가 등장했던 것이 한국의 국제여론화의(상층부만의) 처음이든 것이다. 일본 패전 후 미소점령궁이 우리 땅에 진주하였을 때 한국신탁통치문제가 발표되자 우리는 거족적으로 이에 결사 반대하는 맹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여 이 탁치문제는 좌익계열의 반역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보기 좋게 퇴치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소위 모스크바 협정의 구현이라 하여 한국독립의 실현을 위한다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거의 2개월 동안을 허송 세월하든 끝에 우익진영의 최후돌격으로 백여 단체가 임시정부수립 협의대상으로 참가하겠다는 공격태세를 취하게 되자 공산계열만을 협의대상으로 하여 적색정권 수립을 꿈꾸는 소련대표 일행은 부득이 짐을 싸고 퇴진해버렸다. 우리 국민외교의 혁혁한 성공의 한 페이지이다. 이 운동에 있어서 민간 측으로 주도역임(主導歷任)을 한 것이 곧 임시정부수립 대책위원회이었고 한국민주당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기타 여기 호응한 여러 애국단체의 실천면에 있어서의 공적이 또한 컸던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치열한 독립염원과 탁치반대의 기세가 얼마나 강렬한지를 비롯소 인식한 미국무 당국에서는 한국독립문제를 드디어 유엔에 제소하여 공정한 국제여론과 공결에 의하여 성취시키려는 단계를 밟게 되었다. 과연 유엔에서는 1947년 제2회 총회에서 다각도로 한국문제를 장시일 토의한 결과 결국 미측이 제출한 의안 즉 ‘이 문제는 한국인과 협의하되 대표자들을 급속히 선거케 하고 국회에서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하고 양군을 철퇴시키기 위한 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하자’는 안이 정치위원회에서 46대 0으로 통과되었다. 이 결의의 통과로 인도대표 메논 박사를 수석으로 하는 ‘유엔한위단(韓委團)’이 우리 겨레의 열광적 환영리에 입국하기는 했으나 불행히도 소련의 완강한 거부로 북한까지를 포함한 자유선거는 불가능하게 되어 본의 아닌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하는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

≪신탁통치 반대 운동의 전개≫

[얄타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한 바 있던 연합국은 1945년 12월 28일 미·소·중·영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 실시를 합의하였다. 이에 대해 좌익은 찬탁을 우익은 반탁노선을 취함으로써 맹렬한 반탁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운석 선생도 이 대열헤 합류하였다.]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1946. 5. 6)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1946. 5. 6.)≫

[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의 대립이 격화되어 가는 와중에 3상회의 결정을 이행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신탁통치 기간 한반도의 실질적 통치를 담당할 임시정부 구성문제를 놓고 양국이 팽팽히 맛섬으로써 제1차 회의는 결렬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진영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나섰으며, 운석 선생도 이에 동참하였다.]


1948년 덕수궁에서 열린 UN 한국임시위원단 최초회의 광경

≪1948년 덕수궁에서 열린 UN 한국임시위원단 최초회의 광경≫

[ 1947년 9월 23일 UN 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받아들여 늦어도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한국에서 시행되어야 할 선거를 감시하고, 이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이 국민정부를 구성하는데 조언할 UN 한국임시위원단의 구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위원단은 소련측의 거부로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한국의 지역" 내에서만 선거를 감시할 수 밖에 없었다.]


 
운석 선생 개인사의 관점에서 볼 대 해방은 한국인의 정치 참여 기회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던 일제 식민통치기간 중 교육과 종교운동을 통해 민족의 미래에 투자해온 자신의 개인적 역량을 정치와 외교 일선에서 조국과 민족에게 되돌리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일제하에서 선생은 교육과 종교활동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했으며, 해방된 조국은 그의 능력과 식견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일제의 정치참여권 박탈로 인해 해방 이후 국정을 운영할 정치적 경험을 가진 인재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소수의 인사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은 종교·교육활동의 경험을 갖고 있었던 선생의 정계진출은 불가피했다. 당시 운석 선생은 “우리 민족의 최대 당면과제는 정치적으로 조국의 완전 독립이며, 경제적으로는 자주자립의 확립, 그리고 문화와 교육정책의 강화라는 점을 당면한 과제로 판단”하였고, 이러한 정세 인식을 바탕으로 1946년 2월 정인보(鄭寅普) 선생의 권유와 노기남 대주교의 추천을 받아 천주교 대표로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民主議員) 의원에, 그리고 동년 12월 입법의원(立法議員)의 의원으로 지명된 이후 “주로 좌익과의 투쟁, 군정당국과의 절충,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정책 수립” 등에 여념이 없었으며 18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종로 을구에서 출마하여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선생은 우리나라 초유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종로 을구에서 출마한 입후보자 9명 중 23,188표로 총 투표수의 5할 이상을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다음은 선생이 말하는 정계진출 과정.

 
“해방의 기쁨, 그것은 나만이 느낀 기쁨이 아니리라. 국내에서 해방을 맞이한 여러분과 똑같이 나누게 된 벅찬 기쁨이었다. 사실 해방이 되어서부터는 여러분과 다같이 신생 대한민국을 위해서 동지적으로 일해 왔던 만큼 내가 구체적으로 여기 늘어놓지 않아도 국민 여러분이 나보다 먼저 더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해방직후 미 하지 군정 하에 설치된 민주의원에서 의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민주의원은 다 아시다시피 해방 후 상해(上海)에서 귀국한 임정(臨政) 요원과 국내 각계 요인이 반반씩 의원이 되어 전부 이십여 명으로 조직되었는데, 당시 의장에는 이승만(李承晩)박사께서 취임하시고 나는 주로 미군정과의 연락을 맡아보게 되었다. 당시의 우리들은 이 민주의원을 토대로 우리의 국회를 만들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또한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우리들의 손으로 뽑고 우리들의 손으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군정청에서는 장래 국회의 과도적 입법기관으로 입법의원을 조직하고, 반수는 임정요인과 각계 각층 대표인물로 임명하여 관선의원을 만들고 반수는 일반 선거에 의한 민선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관선의원 가운데는 좌익계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이 때부터 한국의 정계는 두 갈래로 나누어져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고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싸움이 시작되다가 결국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유엔 결의로 그 감시 하에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제헌국회의원 선거 당시 나는 종로 을구에서 출마했다. 이 제헌국회야말로 신생 대한민국이 민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닦게 한 것이었다. 사실 이 제헌국회가 생김으로 해서 오늘의 한국이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때의 기쁨은 8·15 광복날의 기쁨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

≪상해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


민주의원(1946년 2월) 결성

≪민주의원(1946년 2월)의 결성≫

[ 다음은 민주의원 시절에 대한 운석 선생의 회고. "군정의 자문기관이오 장래 입법기관의 모체로서 구상된 '민주의원'의 의원으로 당시 하지 중장으로부터 임명되어 한국민의 민의 소재를 미 점령군 수뇌부에 반영시키는 임무를 수행해고, 민주의원 수뇌부 ─ 이 박사 의장, 김규식(金奎植) 부의장, 김구(金九) 총리 등 ─ 와 미 군정 및 군정청 수뇌부와의 연락사무를 담당하였으며, 양방 의견의 차이와 대립으로 이를 조정하는 데 상당한 고충이 있었다. (출처: 장면, 「(手橋) 회고록 초안」, 유족 소장자료) 선생의 다른 회고에 의하면 당시 민주의원의 상황은 이러했다. "임시정부 요원과 국내 요원이 반반씩 의원이 되어 전부 20명이지요. 거기서 1년 쯤 의원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의장으로는 이 박사가 취임하시고, 나는 주로 미군정과 연락을 맡아 봤어요. 그런데, 매일 모여 앉아서는 '우리의 국회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모체적 역할을 해야겠다'는 의논을 하고 미군정과는 달리 우리 손으로 헌법도 만들고 대통령도 뽑가는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미군정과는 자연히 목적하는 바가 달라졌단 말이거든요." (출처 : 「이 얘기 百萬딸라 : 張副統領의 秘話」, p. 9.)]


입법의원으로 활동할 당시의 운석 장면 박사

≪입법의원으로 활동할 당시의 운석 선생. 위폐사건으로 미군정이 몰수해 경향신문에 불하한 "조선정판주식회사" 앞에서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우측 첫번째)와 함께≫

[다음은 운석 선생의 회고. "군정청의 입법기관으로 관선 50명 민선 50명으로 구성. 관선의원으로 피임. 관선의원의 대다수는 임정요인 기타 정객들로서 대개가 우경사상을 가졌고 민선은 대체적으로 좌익인사들로서 벽두부터 사상대립으로 격돌. 나는 관선이면서도 민선 우익인사들과 시종 동조하여 반탁, 대북협상반대운동을 추진함. 나의 발의로 국대안(國大案, 국립서울대학교 설치안) 및 사창(私娼) 폐지안을 통과시켰음"(출처 : 장면, 「(수고) 회고록 초안」)]



회고록 초안

≪회고록 초안≫

[만년에 선생이 회고록 집필 준비를 위해 만든 육필 초고. 특히 해방 후 자신의 활동을 "민주의원 시대, 입법의원 시대, 제헌국회 시대 및 UN 총회 대표 시대, 바티칸 파견 특사, 초대 주미대사 시대, 한국동란 시대, 제1차 국무총리 시대, 재야 시대 및 부통령 시대, 그리고 과정(過政)·7·29 선거"로 나누어 개관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모두 7쪽이다.]


유엔 감시하 1948년 5·10 총선거

≪유엔 감시하 1948년 5·10 총선거≫

[선생은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영구히 잊지 못할 1948년 5월 10일 아국사(我國史)상에 처음되는 남녀동권(男女同權) 국민개참(國民皆參)의 자유총선거가 UN 감시하에 실시되었다. 필자도 그때 당선된 초대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제헌(制憲)의 대사명을 보좌하는 광영(光榮)을 가졌던 것을 언제나 무량(無量)한 감개(感慨)로 회상하고 있다. 이제 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당선되고 정부가 수립되어 8월 15일 해방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그 뚜렷한 존재를 전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출처 : 장면, 「韓國民主主義十年」)]

 


제헌국회 의원 당선 기념

≪익선동 선거 사무소 앞에서 제헌국회 의원 당선 기념촬영≫

[다음은 제헌국회 의원 시절의 감격담.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벅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으니까. 우리가 대통령을 선출했을 때, 방청석에 와 있던 노파 한 사람은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만세를 부르기까지 했어…" (출처 : 장면, 「韓國民主主義十年」)]


이승만과 운석 장면

≪제헌국회에서의 이승만 대통령과 운석 선생≫


제헌국회 의원 명부

≪제헌국회 의원 명부≫


홍보 전단

≪"종로 을구 입후보자 기호 Ⅱ번 장면"을 알리는 홍보 전단≫


 운석 선생의 정계 진출에 있어 “가톨릭적 배경과 영어실력”은 이를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결정적 요인은 조국의 복음화를 통해 국가의 공산화를 막고 민주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그의 뚜렷한 소명의식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는 다음의 인용문에 잘 나타난다.

 
“오늘의 세계를 소란스럽게 하는 가장 중요한 싸움은 ‘자유에 대한 압제에 대한’ 싸움이다. 이 압제는 여러 모로의 가면을 쓰고 인간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릇된 철학을 지지하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세계를 제 것으로 만들려고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데, 많은 성실한 사람들은 그 해로운 적의 행동을 슬퍼할 뿐, 이와 저항하기 위하여 하는 일이 없다. 우리의 나날의 생활은 크게 정부의 행동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정치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불리한 사정으로 하여 정치에 관여할 수 없으므로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관심과 냉담한 태도가 관리의 타락을 낳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의 주요한 지위에 앉을 사람을 택하는 것은 몹시 소중한 일이다. 곧 그 지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양도할 수 없는 하늘이 준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그 노력을 집중하고, 종교 및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생활의 민주적 발달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그리스도교도국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정치가의 구실은 곤란한 것이다. 그는 주로 정치와 사회면에서 많은 장애를 피할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교 원리를 따라 깊은 지혜와 굽힐 줄 모르는 결심으로 이 장애와 싸워야 한다. 행정, 입법, 사법 그 어느 분야든, 정부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가장 직접적으로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정당에서 지도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그리스도교도도 정당의 정책에 그리스도교 원리를 침투시키고, 정부에게 그 실시를 촉구함으로써 나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명은 일반 국민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크게 촉진될 수 있다. 국민은 큰 소리로 지방 관리와 입법자에게 자기의 여론을 듣도록 해야 한다. 모든 이는 지방과 국민의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시민 단제에 참가하고, 개인과 국민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활동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선생은 가톨릭 정치가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소련 주도 하의 공산주의 침투 저지와 인권의 옹호 및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을 돕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소명의식이 단순한 구두선(口頭禪)이 아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선생은 헌법 제정 시 자신의 소명의식과 국회의원 입후보시에 내건 정견에 따라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고 천부의 인권을 옹하하기 위한 두 개의 제도― “개체 생명 보전을 위한 사유권(私有權) 제도”와 “혼인의 신성성”을 토대로 한 “종족보유를 위한 가족제도”―의 “영구적 실현을 위한 국가의 도덕적 의무”와 “언론 자유”의 보장을 규정하는 법조문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으로 제헌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사유재산권의 보호와 혼인의 순결과 가정의 건강에 관해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법조문이 규정되었다. 특히 이미 입법의원 시절 사창제도를 폐지시키는 입법을 제안·통과시킨 바 있었던 운석 선생은 제헌 헌법 제1장 31조로 채택된 “혼인의 순결과 보호”라는 법조문을 통해 종래 사회적으로 용인되던 축첩(蓄妾)제를 소멸시키고 여권의 신장과 함께 가정과 사회의 건전화를 이루는 도덕적 기반을 닦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한 모교 맨해튼 대학과 포담(Fordam) 대학은 1948년과 1950년에 각각 선생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바 있다. 이 법조문은 그가 평생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몸소 실천하고 지켜온 결혼과 가정생활의 반영이었다는 점에서 선생은 자신의 정치철학을 일관되게 현실 정치에 반영하려 노력한 언행일치의 정치가였다. 

정견 대강

≪제헌국회 의원 입후보 시에 내건 "정견 대강"≫

[총 16개 항의 정견(政見) 중 눈에 띄는 내용은 " 도의에 입각한 민주국가 건설", "국제 협조", "국가적 종합계획에 따른 다른 산업구조 조정", "농지의 농민 귀속", "대일배상의 즉시 요구", "종교를 통한 도의 재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등이다. 이러한 정견은 그의 일관된 정치사상으로 선생은 이를 자신의 정치생활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법제정 취지문 초안

≪사유재산권과 혼인의 신빙성 보호를 국가의 의무로 규정한 법제정 취지문 초안≫

[총 7쪽 분량의 수필 초고로 소유권과 혼인, 노자(勞資)간의 문제 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대한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반론이 주된 골자다.]



 이와 같이 운석 선생은 해방 후 미군정이 구성한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에 참여하고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몸을 담았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주권재민 사상과 헌법·선거·정당·의회 등 대의민주주의 사상이 우리나라에 보급되던 해방 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정치 이념과 제도의 보편화 작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특히 헌법에 국가가 결혼과 가정의 순수성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규정하는 등 인권의 신장과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법학박사 학위 수여 이유

≪맨해튼 대학 당국이 운석 선생에게 보낸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이유를 밝힌 편지≫

[이 편지는 가정의 순수성에 관한 국가의 보호를 헌법에 삽입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학위를 수여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학위 수여 장면

≪맨해튼 대학 토마스(Thomas) 총장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는 광경(1948년 12월 19일)≫

[중앙은 스펠만(Spellman) 추기경.]


포담대학 학위 수여

≪포담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후 찍은 기념사진(1950년 12월 14일)≫

[운선 선생 오른쪽이 맥킨리(Mcginley) 총장, 왼쪽은 도나휴(Donahue)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