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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3. 교육자의 길

 



 운석 선생은 1931년 4월 1일 서울 혜화동 소재 동성 상업학교에 부임해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서무주임의 보직을 5년 반 정도를 수행했으며, 1936년 11월 19일에는 교장에 취임한 후 1947년 12월 25일 교단을 떠나기까지 17년간 교단에서 후진 양성에 오 힘을 기울였다. 동성상업학교는 선생이 부임하던 해 남대문 상업학교에서 교명을 바꾼 학교로 원래 1907년 서소문 일대의 상인들과 선각자들이 힘을 모아 설립한 민족사학인 소의(昭儀) 학교가 그 모체다. 소의 학교는 1920년 소의 상업학교로 성장하였고 1922년 천주교 교단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남대문 상업학교로 개명하였으며, 1929년부터는 학교 내에 중등과정의 신학 예비학교(소신학교)를 신설하여 상업 전공의 일반 학생을 갑조(甲組), 소신 학생을 을조(乙組)로 편성해 운영함으로써, 실업교육과 함께 사제를 배출하는 신학교의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천주교단이 종래의 용산 예수 성심 소신학교 과정을 폐지하고 이를 동성 상업학교에 이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니, 선생으로서는 도미 전에 교편을 잡았던 신학교에 복직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신학교 교사 시절 이래 교육과 민족의 복음화를 이룩함으로써 독립의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하려 했던 운석 선생은 동성 상업학교 부임 후 교육현장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천해 나갔다. 

동성 상업학교

≪동성 상업학교 사진≫

[교사에 걸린 국체명징(國體明徵)이란 구호가 일제하의 암우한 교육현장을 말없이 대변해준다.]


라리보 원 주고

≪라리보 원(Larribeau, 元亨根) 주교≫




 
운석 선생은 서울 교구장이자 학교 설립자인 라리보 원(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추천으로 동성 상업학교에 서무주임으로 부임하였으며, 담당 과목은 영어였다. 30대 초반 서무주임 시절부터 선생은 범접할 수 없는 인품으로 동료 교사와 학생들에게 큰 감화를 주어 선생의 “성실성·진실성·자애심 등은 그들의 생활 속에 세포의 일부로 남게 할”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동진의 증언을 들어보자. “서무 주임인 장 박사의 첫 인상은 퍽 좋았다. 인물이 어찌나 훤칠하고 용모가 예뻤는지 나는 그만 반해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그때는 30대였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 분은 미남인 동시에 존엄성이랄까. 근엄성이랄까. 하여간 내 부에서 풍겨 나오는 인격이 범인답지 않아 함부로 농을 걸기는커녕 쉽게 접근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휴식 때나 일과가 끝나면 대개를 장기를 두거나, 바둑판에 정신을 쏟거나, 아니면 객쩍은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인 우리들에 반하여, 장 박사는 성경책을 탐독하거나, 서무 주임이면서 영어를 가르치는 관계로 영어책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자연히 그 분을 흠모하게 되고, 음으로 양으로 그 분의 인격적인 지도를 받았던 것이다.” 운석 선생 부임 1년 뒤인 1932년 입학생 박달규의 눈에 비친 운석 선생. “장면 선생님의 존재는 군계일학(群鷄一鶴)과도 같은 인상적인 것이어서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생생하게 뇌리에 새겨져 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서 얼마 안되던 그 당시의 장면 선생님은 하프백의 머리로 항상 미소를 띠고 있었던 미청년이었고 유창한 영어와 해박한 지식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랬다고는 하지만 왜 그렇게 강한 인상을 나에게 심어주게 된 것일까? 첫째로 넘치는 교양미와 박학다식(博學多識)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1학년이었던 당시 장 선생님은 과학과 영어를 담당하고 계셨다. 그의 유창한 영어회화는 말할 나위도 없고, 과학시간에는 해박한 지식으로 흥미롭게 강의하여 우리를 매료시켰다. 그는 담당과목은 물론이고 미술·음악·종교·역사에 이르기까지 만물박사라고 할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교양미가 뒷받침이 되어 실례가 될는지 모르지만 인간 예술품이라는 느낌까지 들었다. 둘째는 뛰어난 리더쉽과 인격이었다.”



서무주임 시절 운석 선생

≪서무주임 시절의 운석 선생≫

[동료교사 유동진은 훤칠한 운석의 용모에 그만 반해버리고 말았다고 하였고, 제자 박달규는 하프백의 머리로 항상 미소를 머금었던 미청년으로 묘사하였다.]


서무주임 시절 동료교사들과 함게

≪서무주임 시절 동료교사들과 함께≫

 

 운석 선생이 교직에 몸담고 있던 시기는 일제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말살하고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일본어 교육을 강조하고 천황(天皇) 숭배사상 주입에 치중하는 등 한국인을 일제의 “충량한 신민(臣民)”으로 만들려는 민족말살 정책이 강압적으로 시행되던 때였다. 특히 선생이 교장을 맡고 있던 1940년대의 “전시체제(戰時體制)” 하에서 일제는 한국인 학생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근로동원에 끌어들였으며, 모든 공·사립학교의 설립 및 운영에 대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제를 가하던 암울한 시기였다. 운석 선생이 교장에 취임했을 무렵 교사 비율에서 일인이 한국인에 비해 두 배 이상이었으며, “학교의 교육방침이나 기타 모든 것도 일인들에 의해 움직여지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자주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교육철학인 교육과 복음화를 통한 민족의 독립을 위한 미래 투자에 헌신하였다. 

교장 시절의 운석 선생

≪교장 시절의 운석 선생≫

[삭발한 그의 머리 모습과 복장에서 교육계에 강요된 일제의 탄압상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민족을 우선시한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에피소드 한토막을 들어보자. 선생은 자신의 교육관에 저촉되는 언행을 일삼는 일인 교무주임을 퇴직시킨 일이 있었는데, 다음은 그 계기를 제공한 당시 동성학교 교사 유홍렬의 회고담이다. “부임하자마자 내게는 여러 가지 고초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일본 역사와 세계사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인 교사들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어느 날의 일이다. 일인 교무 주임은 조선 사람이 어떻게 대일본 제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느냐고 정면으로 불만과 공복을 주었다. 그러나 교장인 장 박사는 이를 일축해 버렸다. 결국 교무주임을 몰아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이고도 총독부 학무국의 상당한 배경을 가지고 들어와 동성을 일인 교육 기관으로 만들려하였던 자인만큼 그를 내쫓는 데는 당국의 압력을 염두에 둘 때 몹시 힘든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분의 결심과 실천이 어떠했는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교무 주임의 후임으로 오다무라가 들어왔고, 나는 훈육주임이란 직책까지 맡게 되었다.”

 
다음으로 선생은 그리스도 교육가로서 ‘사도적 사명’을 절감하고 이 사명의 실천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 교육가의 사도적 사명’을 들어보자. 

“나라에 있어서 청소년을 교육한다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거룩한 사명은 없다. 교사는 국민과 세계에 장래를 결정하도록 부르심을 입을 젊은이에게 문명의 유산을 전하는 통로다. 교소는 몇천 명의 생도에 대한, 그 모범과 감화로 선행의 규범을 세워야 한다. 그리스도교도인 교사가 이교국의 비그리스도교도를 가르칠 때는 더욱 그렇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의 정신과 영혼을 도야하고 이에 깊은 지식과 진리의 인식을 주는 것이다. 좋은 교육은 인생의 마지막 목적을 존중해야 한다. 비그리스도교적 공사립 학교에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교사는 젊은 정신에 그리스도교의 진리의 씨를 뿌려, 신법을 침해할 때 중요한 결과가 온다는 것, 또 인격적인 하느님이 계시고 언젠가는 그 앞에 나아가 한평생 한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는 그 생도의 영혼에 진리의 씨를 뿌릴 뿐 아니라, 또한 나타나는 온갖 기회를 잡아서 학원에 가득 차 있는 잘못된 가르침을 논파(論破)해야만 한다. 그러나 특히 비그리스도교국에서는 이른바 정교(政敎) 분리(分離) 때문에 공사립 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톨릭교도가 경영하는 학교에서도 생도와 학생들은 종교의 진리를 들을 기회가 적다. 이 결함을 메우기 위하여 교육자의 구실을 교실 밖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사는 클럽 활동, 운동장, 생도 활동에서 그들과 협력함으로써 생도의 지도자 또는 벗이 되는 것이다.”

 
선생이 복음 전파를 통한 이민족의 압제 하에서 상처받은 청년의 영혼 구제를 교육의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꾸준하게 실천했음은 다음의 증언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노기남 대주교가 술회하는 교장 시절의 운석 선생. “나는 교장인 그를 도와 동성학교와 계성학교에서 교리시간을 맡았다. 그 때 나는 그의 인간 됨됨이를 알게 되어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그는 수쳔 명의 학생을 교육하는 교직자로, 봉급이나, 어떤 물욕에도 초연하였으며, 언제나 궁극의 목적은 ‘종교’에 두었다. 별로 말이 없이 묵묵히 실천만 하는 그는, 모든 일을 은연중에 신앙의 정신으로 이끌었다. 교장직에 있으면서도 모든 행동과 교육방법을 그리스도 정신으로, 전교의 목적의식에 투철하여 자연히 학생들도 그의 신앙적 교육에 감화되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이를 본받아 입교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복음 전파를 통한 영혼 구제 노력과 같은 제자 사랑은 제자들의 재학기간만이 아니라 졸업 후에도 계속되었다. 필자가 잊을 수 없는 것은 1966년의 일이다. 그 해가 바로 그 분이 작고하신 해인데 동성 동창생 중 김만균(金萬均)과 나를 영세받도록 명동성당에서 실시되는 ”예비 교리 과정“에 천거해 주셨다. 그리고 그 때 벌써 병색이 짙어 불편한 몸이셨는데도 불구하고 명동성당까지 오셔서 격려를 해 주셨다.”

계성보통학교 교장 재식시

≪계성보통학교 교장 재직시 노기남 신부 및 교사들과 함께≫

[당시 선생은 "노랑 대부"라는 선의의 별명도 들었지만, 학생들에게 "장면 선생님은 각 반에 정규시간을 장만하시고 예의작업(에티켓)을 가르쳤다. 말하자면 신사도"를 가르친 "만인의 에티켓 선생"이었다고 한다. 선생 인품의 덕향(德香)이 묻어나는 일화 한 토막. 선생은 신품(神品)을 받아 신부가 된 제자들이 인사차 들렀을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스승이나 교장의 신분이 아닌 평신도로서 신부를 대하는 예의"를 갖추었고 이러한 선생의 인품에 감화된 유동진은 천주교에 귀의했으며, "신도가 된 후에 신부에게 절대로 평어(平語)를 쓰지 않고 경어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안정열·문준호 편, 『東星九十年史』(서울 : 동성 중·고등학교, pp. 129, 413.)]


 일제에 의해 한국인의 정치참여 기화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던 식민통치기간 중 양식 있는 한국인이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민족의 미래에 투자하는 교육운동과 이민족의 지배하에 상 처 입은 민족의 영혼을 달래는 종교운동에 투신하는 것이었으며, 운석 선생의 선택도 그러하였다. 따라서 선생 자신이 “나의 지난날에 있어서 가장 오랜 햇수를 차지한 생활이 교편생활이다. 해방이 되는 해까지 거의 이십 년이란 세월을 변함없이 후세의 청년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다시 말하면 나의 생의 대부분이 교단에서 늙어졌다. 나의 청춘도 교단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 싶다”고 회고할 만큼 일생의 대부분을 민족의 미래를 위한 교육활동에 투자한 선구자였다. 교육자로서 운석 선생은 각계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지만, 특히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을 포함해서 196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사제 중 3분의 2 이상이 선생의 제자”라고 할 정도로 천주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혹자는 운석 선생이 일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으며, 친일단체에 가톨릭 대표로 참여했던 점 등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고뇌에 함께 한 신앙인으로서 용산 성심신학교 교사시절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자신의 독립정신을 신학생들에게 전파하였으며, 동성 상업학교 교장 시절 자신의 교육이상에 반하는 일인 교무주임을 퇴직시키는 등 복음화와 교육을 통해 민족 독립을 위한 미래투자에 헌신하였다. 물론 선생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하는 평자들의 지적처럼 일제하에 뚜렷한 항일 경력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하 국내에서 활동한 모든 인사들이 갖고 있는 공통의 한계이며, 선생이 일제의 전면적 탄압이 가해지자 않는 범위내에서 자신의 이상을 일관되게 관철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며 교육자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일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교육활동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총독부와 천주교를 중화”시키는 즉,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중간에서 도맡아 방어하는 역할을 전담”한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신도였던 선생으로서는 교단에 대한 일제의 박해를 초래할 저항적 종교활동을 전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