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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1. 엄친 장기빈의 영향


Ⅰ. 가족 배경

 

1. 엄친 장기빈의 영향


 운석 선생의 선대(先代)는 인동(仁同) 장씨(張氏) 황상공파(凰顙公派)의 분파인 개옹공파(㝏翁公派)로, 8대조 장익붕(張翼鵬) 옹(翁)이 인동에서 처가가 있던 평안도 성천(成川)으로 이주했다. 고조(高祖) 장인각(張仁珏) 옹이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中和)로 이거한 이래 이 지역에서 세거(世居)한 가문이었다. 중화는 천주교 신앙이 일찍이 뿌리내린 곳이었지만, 선생의 선대는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장기빈 옹이 작성한 친필 가보

≪장기빈 옹이 작성한 친필 가보(家譜)≫

[이 가보에 의하면 선생의 집안이 천주교에 구의하게 된 시점은 인천 이주 후다. 증조모(曾祖母)와 조모는 인천 이주 후 영세했으며, 증조부와 조부도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계보도

≪계보도(系譜圖)≫

[이것은 운석 선셩이 자신의 일생 중 주요사항을 일자별로 정리해 놓은 친필 연보 앞에 수록된 족보이다.]
직계 가계도

≪직계 가계도≫

[친필 연보 안에 수록된 직계 가계도로 운석 선생의 고조모 강 안나 여사와 조모 박 구네군다 여사가 세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선생의 부친 장기빈(張箕彬, 1878~1959) 옹(翁)은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신흥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고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등 일대 변혁기를 맞아 종래의 한학 공부를 중지하고 새로운 서구 근대학문에 눈뜨게 되었다. 이러한 자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은 관리 출신으로 개항장 인천에 거주하던 조모의 남동생 강화석(姜華錫)이었다. 장기빈은 그의 지도로 1895년 서울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입학해 영어를 배우는 한편 밤에는 일어학교도 다닐 정도로 신학문의 수용에 열심이었으며, 1896년에는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다음 해 그는 강화석의 중매로 평안도의 8대가(大家)의 한 사람인 천주교 신자 황성집(黃聖集, 베드로)의 둘째 딸 루시아(1878~1954)와 결혼하였으며, 영어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그는 그간 터득한 영어와 일어 능력을 바탕으로 탁지부(度支部, 현 재무부에 해당) 방판(幇辦)에 임용되었고, 1905년 주사(主事)로 승진하였으나, 한일합방으로 1911년에 사직하기까지 인천 해관(海關)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그는 1939년까지 스탠더스 석유회사(Townsend & Co.) 한국지사에서 무역과 보험관계 업무에 종사했으며, 해방 이후 군정청(軍政廳) 재무부(財務部) 고문과 부산 세관장을 역임한 바 있다.

광무 2년 장기빈 옹의 관리시절

≪광무 2년 장기빈 옹의 관리 시절≫

[전열 우측 첫번째.]


 
장기빈 옹은 영어와 일어 외에도 독학으로 중국어와 러시아를 익혀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운석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부친을 뵈니 선생보다도 월등히 영어를 더 잘 구사하시고 문장 또한 명확했다고 한다. 운석 선생 역시 미국인도 놀라는 고급 영어 구사 능력을 갖고 있던 점을 비추어 장기빈 옹의 영어 실력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운석 선생 양친의 만년 모습

≪운석 선생 양친의 만년 모습≫

1938년 10월 부친 장기빈 옹의 회갑 기념 사진

≪1938년 10월 부친 장기빈 옹의 회갑 기념 사진≫




 이처럼 선생의 부친은 근대 문물에 일찍이 눈뜬 개명 관료이자 해외 물정에 밝은 지식인이었고, 유복한 집안의 따님이었던 모친은 근대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문학에 취미가 있어 구운동과 삼국지 등 고전 소설을 외우다시피 탐독하였으며, 키도 크고 여행을 즐긴 활달하고 관대한 성격의 여성이었다. 또한 양친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철저했으며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도록 이끌었다. 다음은 두 부부의 인감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환 한토막. “장 레오는 남의 말을 잘 믿고 속기를 잘했으나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고 죽을 경우에는 그 빚을 감해 주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꾸러와서 100원을 청했을 때는 그 중 50원을 거저 쓰라고 하여고 식사 때는 으레 거지들을 위한 상을 따로 차려 놓도록 분부했었다. 그는 또한 소작인들에게도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는데 소작인들의 방문을 받으면, 그들을 대문간까지 나가서 전송했었다. 황 루시아는 평양에서 이름 있는 부잣집, 의성 황씨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나 시집올 때 많은 재산을 가져왔고 관대하고 수완이 좋은 여걸로서 남편 못지 않게 동정심이 많아 남에게 주기를 좋아했다 한다.”

장기빈 옹의 영문 이력서

≪구한말 선각적 지식인으로서 장기빈 옹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영문 이력서≫

[이력서 하단의 자필 서명에 보이는 Leo는 세례명이다.]
목(睦, J. E. Morris) 제2대 평양교구장

≪목(睦, J. E. Morris) 제2대 평양교구장≫

 [그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 선발대로 1923년 내한하여 영유(永柔) 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장기빈 옹의 올곧은 생활 태도와 포용성 있는 너그러운 마음, 신자로서의 열심함에 감탄하여 "레오 씨는 천당에 직행할 사람"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한다.]

 

 
이러한 가정적 배경은 운석 선생을 비롯한 슬하의 3남 3녀 모두가 일본과 구미에 유학해 근대 교육을 받아 각계의 전문가로 성장하는 한편, 충실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타인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인물들로 살아가게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한마디로 운석 선생의 가문에서는 그 자매나 그 후손들이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지녔고 외국어에 능통하며, 많은 이가 성직자로 봉사하고 일찍이 외국에서 유학한 이가 대다수를 점하는 특색을 띠고 있다. 

회갑기념 가족사진

≪장기빈 옹의 회갑을 기념해 찍은 가족 사진≫

[장기빈 옹과 황 루시아 부처는 슬하의 3남 3녀에게서 23명의 손자, 손녀를 보았다. 이들은 할아버지가 세운 가풍의 영향하에서 사회 각계의 전문가─대학교수 6명, 의사 5명, 엔지너와 건축가 3명, 신부 2명, 수녀 1명 등─로 성장하였다.]

[왼쪽부터 장발, 장면, 장 앙네다(정온) 수녀, 처조카 김 말가레다(교임) 수녀. 장발 씨는 일본 우에노(上野) 미술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 도미하여 뉴욕 콜럼비아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을 역임했으며, 26세 때 명동성당 제대 뒷면에 있는 "14종도상(宗徒像)을 그린 바 있다. 장정온은 숙명고녀(淑明高女)와 일본 성심여전(聖心女專)을 나왔고, 첫 한국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초대 원장수녀(세례명 마리아, 수도명 앙네다)를 역임했으며, 한국 전쟁시 평남에서 북한군에 피랍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이 밖에도 장극 씨는 독일 베를린 국립공과대학 항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톤 가톨릭대학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 항공학자다. 장정혜도 숙명고녀를 나온 후 미국에 유학했으며,, 장정순도 일본 성심여전에 유학한 바 있으나 졸업했으나 졸업 직후 요절하였다.]


 

 운석 선생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삼군부(三軍部) 뒷골(後洞, 지금의 종로구 적선동) 외가집에서 아버지 장기빈 옹과 어머니 황 루시아의 3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운석 선생은 생후 15일만인 9월 12일 종현본당(鐘峴本堂, 지금의 명동성당) 박(Victor Poisnel)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897년 명동성당

≪운석 선생이 유아세례를 받은 명동성당의 1897년 모습≫

[맨 왼쪽에 주교관, 중앙에 명동성당, 오른쪽 끝에 신축 중인 수녀원 본원 건물이 있고, 수녀원과 고아원으로 쓰던 부속건물도 보인다.]


 이후 선생은 생후 2개월만에 당시 처음으로 개통된 경인선 철도편으로 부친의 근무지인 인천 전동(典洞)으로 돌아와 “나의 가정은 그리 군색하지도 않았고, 내가 장남인 만큼 부모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셔서, 나는 남부러울 것 없이 어린 시절을 자랐다”고 회고할 만큼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운석 선생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비범한 재능을 보였던 듯하다. 당시 동네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한 승려가 운석 선생을 보고 어머니에게 “저 아이는 분명히 크게 될 아이이니 각별히 보살펴야 됩니다”라고 했다 한다. 



면태생시몽조

≪면태생시몽조(勉胎生時夢兆≫

[운석 선생의 어머니 황 루시아가 말하는 선생 수태시의 태몽 등을 한문으로 적어 놓은 기록으로 선생의 한학 실력이 수준급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 문서에 의하면, 무술(戊戌, 1898) 12월 21일 밤에 어머니는 "성전(聖殿)에 가는 도중에 길가 진흙덩이 사이에서 홀연히 섬광이 눈을 찌르는 것을 보고 그 속에서 금가락지 5개를 얻는" , 아버지는 "뒤뜰 나무 위에 내려앉은 영롱한 깃털이 찬란하고 울음소리도 신비한 진기한 짐승을 가슴에 품는", 그리고 외숙모는 "밭 가운데로 별 하나가 떨어지는" 태몽을 동시에 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어린 시절 그는 소문난 개구쟁이였던 듯하다. “내가 어렸을 때 사내들도 머리를 따 늘였었지. 그래 어머니가 매일 아침 머리를 빗겨 주셨는데 따갑고 아파서 못 참겠어. 하루 아침은 동리 이발소에서 용돈 모아 두었던 15전을 내고 머리를 깎고 집에 돌아오니까 어머니께서 마구 야단차시지 않아. 참 혼났지.” 선생은 어린 시절 세례명인 요한으로 불리었는데 어느 날 부친 장기빈 옹이 너무 심하게 장난을 치는 아들을 계도(啓導)하기 위해 힘쓸 면(勉)으로 이름을 지어 준 것이었다. “나는 날 때부터 천주교도로서 요한이었으나 그후 아버지께서 내가 공부는 않고 장난만 치니까 공부 부지런히 하라고 타이르시면서 ‘면’자를 달아주셨지.” 선생의 부친은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주셨는데 그 이름자에는 모두 힘 력(力)자가 들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또한 그는 아들들에게 어릴 적부터 직접 호도 지어주었다. 장남인 면은 운석(雲石), 발은 우석(雨石), 극은 하석(霞石)으로 모두 비 우(雨)자가 들어 있다. 장기빈 옹의 호가 태암(太巖)이어서 자체들의 호는 큰 바위에서 나온 돌(石)로 표현하고 구름·비·안개를 본떠 호를 지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