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Ⅱ. 부통령 시절 - 청천 벽력 해공 급서(急逝)

 5월 5일 5시경 5호 침대에서 해공 선생은 불의의 변을 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날 새벽 5시경 해공 선생은 일어나신 기척을 내며 “창현아, 뒤지 어디 있냐?” 하고 신창현 비서를 부르는 소리가 나더니 곧 화장실에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상단 침대에 있던 나도 일어났고, 해공 선생과 마주보는 하단 침대에서 자던 조재천 씨도 잠을 깨서 서로 아침 인사를 나눴다.

 나는 세수를 하려고 세면소에 갔으나 물이 안 나와서 돌아와 물이 없어 세수를 못하였다고 하니, 이때 해공 선생이 “아침 세수는 진주에 가서 합시다” 하기에 “그러지요”라고 대답하고, 얼마 안 있어 보니 해공 선생의 몸 자세가 이상했다. 앞으로 푹 수그린 채 일어나지 못하였다.

 나는 무심히 “아이구, 해공 선생 왜 이러십니까?” 하고 해공 선생 곁으로 달려갔다. 그때 조재천 씨도 다가서며 “왜 그러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옆의 비서들이 일으키는데 눈 뜨는 모습이 벌써 이상했다.

 “선생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하고 물어도 좀 창백해진 얼굴에서는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한편 손을 주무르며 비서를 시켜 차 안에 의사가 없는가 알아보게 했다. 한참만에 의사 한 사람이 나타나서 “급체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물러가 버렸다.

 
우리도 뭐 그리 대단치 않은 병이려니 생각했다.

 이리에 가야 병원엘 갈 수 있었다.

 일각이 여삼추로 이리 도착을 고대했다. 맥을 짚어 보았으나 차의 요동으로 인해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차츰 손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이리역에는 지방당 간부들 몇 사람이 나와 있었다. 일행은 해공 선생을 업고 역전의 호남 병원으로 직행했다.

 의사가 주사를 놓은 후에 우리는 차차 회복되기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몹시 망설이는 말로 의사는 “심장 마비 같습니다.” “아, 그럼 잘 좀 봐주시오.”

 그 의사 외에도 다른 병원의 의사까지 와서 함께 진찰을 마치고는 이구 동성으로 하는 말이 “심장 마비인데 가망이 없습니다.”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청천 벽력이었다. 우리는 해공 선생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니 천지가 아득했다. 전국민의 열풍과 같은 인기의 정상에서 선생이 별세하시다니 꿈만 같았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임을 목격하고 우리는 목놓아 울었다.

 평소에 무척 건강한 분이었다. 선거 운동 무렵에는 술과 담배도 끊고 계시던 분이었는데 심장 마비로 급서(急逝)하시다니, 이것이 웬일인가!

 이미 싸늘한 해공 선생을 모시고 특별 기동차 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단장(斷腸)의 눈물로 앞이 안 보였다.

 당시 전국민의 슬픔과 울분도 대단했지만 해공 선생을 맞으려 서울역에 모였던 사람들의 흥분과 울분은 극에 달했다.

 분격한 청년들은 해공 선생의 유해를 앰뷸런스에 이끌고 경무대까지 가겠다고 소리쳤다. 청년들의 격분은 끝내 경무대 앞에서 사상자를 내는 사고까지 일으켰지만, 민주당에서는 질서 유지를 위해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국민의 울분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노력했다.

 해공 선생에 대한 국민들의 앙모와 자유당 이 박사의 독재에 대한 적개심이 겹쳐서 국민들은 해공 선생의 돌연한 죽음이 혹 정치성을 띤 암살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조차 일으켰다.

 만약, 이때에 중앙 당부에 보고한 사람이나 중앙 당부의 고위층에서 조금이라도 선동적인 발표를 했던들 자유당에게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을 것이다.

 이 박사 집권 당시 자유당은 야당 세력을 거세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썼다. 만일 민주당에서도 그런 수법으로 해공 선생의 사인을 전략적으로 선동하여 ‘암살의 혐의가 있어 조사 중이다’라고 했더라면, 그때 자유당의 타격은 어떠했을까? 민주당의 성격은 여기서도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해공 선생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결정되었지만, 장례일을 결정하는데는 크게 논란이 있었다.

 5‧15 선거일 전에 장례를 치르느냐, 선거일 후에 하느냐는 문제였다. 상가(喪家)로서는 매우 괴로웠으나, 선거 후에 장례를 치르기로 정하였다.

 흥분한 국민들 앞에 선거 전에 장례를 한다면 큰 혼란이 야기될 것 같아 민주당으로서는 선거가 끝난 후, 5월 23일 국민장으로 치렀던 것이다.


1956년 5월 23일 치루어진 신익희 선생의 국민장 모습



 갖은 설움과 방해를 받아 가며 부통령 입후보만으로 제3대 부통령 후보에 나섰던 나는 개표 결과 20만 표의 차로 자유당 입후보 이기붕(李起鵬) 씨를 물리치고 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시련을 맛보았다. 전국적으로 개표가 끝날 무렵인 5월 17일에 세칭 대구 개표 중단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개표 결과 열세에 몰리게 된 자유당측에서는 대구에서 개표할 때 전등을 끄고, 이기붕 씨 표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다음 민주당의 소행이라고 모략하는 등 별별 협잡과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민주당원은 투표함을 끝까지 사수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기붕 씨를 당선시켜야겠는데, 내가 얻고 있는 표수가 아무래도 많으니까 자유당은 최후의 비상 수단을 쓰려 했던 것이다.

 내무부 책임자를 불러다 놓고 압력을 가했다는 이야기다. 내무부 장관 김형근(金亨根)이 병을 빙자하여 입원하고 말을 잘 듣지 않으니까 차관을 불러다 놓고 만송(晩松)을 당선시키라고 강요하면서 추상 같은 호령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구 대표 중단 사건을 일으켜 만송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던 계획이 일반 국민의 불신과 빈축을 사고 여론의 심한 반발을 받게 되자, 이 대통령의 담화 한마디로 자유당은 마지못해 개표를 그대로 진행시켜, 약 20여 만 표의 차이로 이 나라의 부통령에 당선이 확정되었다.

 
직위는 부통령이었으나 아무 실권 없는 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후보인 해공 선생을 잃은 민주당에서는 울분에 싸여 있다가 내가 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어느 정도 위안을 받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갖은 악조건 밑에서 갖은 탄압을 받으며 줄기차게 싸웠기 때문에 얻은 민권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