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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경제 제일주의 정책

 1961년 3월 8일 국무원 사무국에서 이 법안을 성안했을 때 범야 세력은 반공법 반대에 극한 투쟁을 선언하고 나왔다. 이것은 3월 11일이었다. 3월 22일에는 혁신계가 서울, 대구 등지에서 반공법, 데모 규제법 등 소위 2대 악법이라 하여 반대 데모를 벌려 정국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정부의 새로운 조처에 반대한 세력에는 물론 일부 좌익계가 혼란 조성을 위해 가담했지만 3월 30일 보안법 개정안, 데모 규제법이 국회에 제출되었을 때 당시의 야당 세력은 물론, 민주당 구파측에서도 심한 반발을 일으켰다.

 
그들의 대다수는 이 법안이 자신들을 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 성안한 것이라고 비난하게 되었으니 협조를 바랄 수도 없었다.

 
물론 이 법안이 관대한 내용이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거니와 양식에 의한 판단으로는 이 법안에 조금도 독소가 잠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무능했다고 비난하기에 앞서, 이 법안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혼란 속에 빠진 나라 꼴을 함께 걱정하면서도, 이를 구제하기 위한 진실한 법안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이는 무슨 뜻일까? 국회는 성원을 이루지도 않고 이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은 채 회기를 넘겨 거부해 버린 것이다.

 
4월달에 들어서면서도 갖가지 데모는 계속되고 4월 8일에는 대구에서 대대적인 악법 반대 데모가 전개되었다.

 
새 법의 공포를 못 본 정부는 최후 수단으로 현행법을 최대한으로 하여 과감한 시책을 펼 준비를 했다. 더 이상의 혼란은 용납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국민들 또한 계속되는 데모에 염증을 느끼었고 지나치게 남용하는 자유가 초래한 결과를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의적으로 혼란을 충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 정부는 도저히 정권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라는 공격을 일부에서 퍼붓기 시작했다.

 
이때의 경찰력으로 이 혼란을 제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철봉으로 제지했으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제2의 독재자, 또는 자유당 정권의 재출현을 국민은 결코 원치 않았다.

 
한국의 역사 이래 자유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성심 성의껏 노력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것이 제2 공화국이었음은 사실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심으려던 우리의 노력이 온갖 방해를 받아 피어나지 못한 점이 애석할 뿐이다. 국민 앞에 공약을 지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며, 성심 성의껏 양심적으로 국정을 맡아 보려던 우리의 고충은 너무나 고달프고 벅찼다.

 
우리 각료는 거의 철야 근무였다.

 
우리의 성의는 미처 결실을 보기 전에 끝내 무참히 짓밟혔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총리나 각료들의 헌신적인 노력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뼈에 새겼다. 아무래도 전국민이 합심해서 이끌어야 하는 하나의 수레와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협력할 때 수레바퀴는 잘 구른다.

 
민주당 정권에 공격의 화살을 퍼부은 외부 세력은 주로 구자유당의 잔여 부대, 한민계의 구파, 좌익계의 소위 혁신 세력 등이었으며, 이들과 장단을 맞추어 정부 공격에 부채질한 것은 일부 언론계, 특히 신문들이었다.

 
정치의 자유는 물론 언론의 자유도 무제한 허용되었다. 지각없는 일부 신문인들은 이에 편승하여 무궤도하게 난필을 농함으로써 사회를 더욱 혼란케 한 과오를 범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더 말하고 싶지 않으나 지성인들은 이미 그때 언론 윤리의 퇴폐를 개탄했으며, 5‧16 이후 된서리를 맞은 그네들 자신들도 비로소 민주당 시절의 자유를 새삼 그리워하고 지나쳤던 남용과 과오를 후회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들의 지나친 편견과 선동으로 국민 여론을 그릇 지배하여 정부 비난의 무기를 삼는 태도는 민주주의 발전의 건전한 협력자라고 할 수 없었다.

 
협조의 길이 막힌 신‧구 대립 가운데서도 최대의 자유를 국민들이 누리는 가운데 최선의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해 보려는 성의는 계속되었다.

 
경제 제일주의의 표방하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미국과의 환율 현실화를 실현함으로써 미국의 특별 원조를 받을 계획이 완성되었다.

제2 공화국 한미원조협정 개요

한미원조협정 개요



 
처음부터 제2 공화국은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했다. 경제의 안정을 기한 후에야 정국 안정을 바랄 수 있고 참된 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8일에 혁명 과업 완수 등 80개 항의 정책 백서를 발표하고 이의 실천을 다짐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목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목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목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목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경제기획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경제기획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국토건설청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국토건설청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예산: 세입·세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본 노트 - 예산: 세입·세출




 
배고픈 국민에게 허울 좋은 민주주의만이 양식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경제 제일주의의 구체적인 실현책으로 농촌 고리채 정리 방안과 환율 현실화를 위한 제반 여건을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환율을 현실화함으로써 모든 부패의 온상을 제거하고, 특혜 융자 방지에 의한 중소 기업의 육성은 우리의 경제 계획인 동시에 원조국인 미국의 요청이기도 했다. 미국의 요청에 따라 환율 현실화에 의한 경제 안정을 약속하기 위해서는 환율 현실화에 따르는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안정 기금을 요구하여 이에 대한 미국측과의 합의를 얻었다.

 
김영선 재무부 장관이 도미하여 안정 기금의 일부인 2천여 만 달러를 이미 받아 왔고, 7월에 총리가 도미할 때에 완전 타결을 보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경제 발전을 위한 제반 계획과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구체적 방안이 마련되어, 어느 정도 제2 공화국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할 때 쿠데타를 당했다.

 
결국 ‘무능했던 장 정권’이란 지탄을 받은 나였지만, ‘조금의 시간적인 여유만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