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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Ⅱ. 부통령 시절 - 유석 서거와 3‧15 부정 선거

 1960년 2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을 한달 앞두고 나는 또 기구한 운명을 맞이했다. 복부 수술차 도미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서거(逝去)했다는 비보였다.

"조병옥박사 급서"를 알리는 『한국일보』 호외



 선거전이 한창 치열할 무렵인 1월 19일 유석은 기자 회견에서 “앞으로 입원할 생각은 없으며,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선거 유세에서 한 시간 반 정도는 연설할 자신이 있다. 장(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입원할 생각은 없으며, 수술 진단 운운은 모르는 일이고, 의사로부터 통고받은 바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1월 22일 조 박사의 주치의는 기자들과 회견하고 “조 박사의 그 위장에 관한 X선 시현(示現)으로 인하여 개복 수술을 즉시 실시할 것을 요한다”는 요지의 진단서가 발표되어, 1월 29일 “잘 다녀오겠오”라는 말을 남기고 도미했다.

 
1월 30일 월터 리드 육군 병원에서 처음엔 수술 성과가 좋아 2월 22일경에는 퇴원할 수 있고, 월말경에는 귀국할 수 있다는 회보를 전해 왔으나, 2월 15일 돌연 급서의 소식이 전해 왔다. 나는 선거에서 두 번씩이나 러닝 메이트를 잃는 정말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때에는 선거일 열흘 전에 해공 선생이 돌아가는 비운을 당했고, 이번 또한 조 박사가 이국에서 불귀(不歸)의 몸이 되니, 가위 얄궂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이 박사측으로 보아서는 힘 안들이고 제물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호기(好機)가 되었음은 사실이다.

1960년 2월 29일 부산 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정견 발표회에 모여든 청중



 민주당에서 대통령 입후보를 다시 지명하여 선거에 임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4선은 거의 확정된 셈이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일단 한숨 돌린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 씨를 당선시키기 위해 철저한 부정 선거를 준비했다. 제3대와 같은 패배의 전철을 다시 밟을 수 없다는 듯이 의기 양양했다.

 
3월에 접어들면서 자유당측에서는 본격적인 부정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사전에 입수되었다. 당시의 경찰이 모두 자유당의 주구(走狗) 노릇만을 한 것은 아니다. 자유당의 부정 선거 지시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경찰 간부들이 많았다.

 
야당으로서는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대한 흉계를 만천하에 폭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증거를 제시할 자신이 있어서 우리는 그때그때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각 신문으로 하여금 대서 특필 하게끔 발표하는 한편, 국회에서 크게 문제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당과 정부에서 부정 선거에 대한 세밀한 계획 아래, 이 부정 선거 지령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유혈을 사양하지 말라”는 엄한 명령을 내려 놓은 것도 우리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 무엇을 말하랴. 나는 2월 28일 대구에서 선거 강연을 하게 되어 강연장으로 가는 도중에 학생 데모가 터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민주당 강연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당국은 학생들을 일요일인데도 등교시켜 말썽을 일으켰다.

 
이날의 학생 데모는 전국적인 데모의 파종(播種)이었고, 4월 혁명의 봉화가 아니었던가. 대구 학생들의 데모의 아우성을 들으며 수성(壽城) 강변에서 강연을 하던 때의 감개가 지금도 새롭다. 민심의 호응은 절대적이었다. 민심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당내에서는 구파의 대표적 존재인 조 박사가 이미 서거하였으니, 대통령 후보 없는 부통령 선거는 무의미하다고 이를 포기하자는 논의가 주로 구파 인사 사이에 대두되어 그들의 대부분은 방관 내지는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즉 신파인을 부통령에 당선시킬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자유당측에서는 대통령 당선이 확실해진 것을 기화로 정‧부통령 단일 투표제를 주장하는 등 선거일의 박두와 더불어 부정 선거의 양상도 극에 달했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사진 몽타주 술책까지 써 보았다.

 
선거일에 임박해서 어느 날 아침 길에 나가 보니 전주와 벽에 무수한 사진 포스터가 나붙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어느 일본 군인과 함께 박은 것인 양, 어느 사진사를 시켜서 내 얼굴을 딴 놈의 몸에다 접붙여서 마치 내가 친일파라는 인상을 주려고 꾸민 모양인데 이것이 통행 금지 시간에 전국에 일제히 나붙은 것으로 보아 철저한 계획하에 기관원을 동원하여 붙인 것만은 틀림없다. 수법 치고는 가장 치졸하고 야비한 것이어서 자기들이 의도한 효과를 거두기는 고사하고, 국민의 조소를 자초한 역효과밖에 안 났다. 선거 당일 새벽부터 여러 곳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선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비명이었다.

1960년 3·15 선거를 앞둔 어느 날 전국의 거리를 뒤덮은 "구국항일동지회"라는 유령 단체 명의의 포스터



 
투표함에는 미리 무더기 투표가 되어져 있는가 하면, 민주당 선거 참관인들은 투표장 근처에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와 간부들은 이러한 우울한 정보를 받고 나서, 처음엔 끝까지 선거를 고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왕 포기하더라도 때가 있는 법이니 좀더 시간을 두고 봐서 자유당이 부정을 감행하는 모습을 충분히 파악한 다음에, 포기하더라도 보람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당장으로서는 포기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3월 15일 그날의 선거 분위기는 갈수록 암담 그것이었다. 그날 5시가 투표 마감이었는데 4시 반경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포기 선언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각처에서 발생한 구타, 테러 사건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다수의 민주 당원들이 가장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역사적으로 그 전례가 없는 주권 박탈의 부정 선거가 실시된 그날 저녁, 마산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민의 데모가 발생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태까지 빚어냈다. 이는 자연적인 폭발이요, 민심이라는 급류가 굽이친 한 표현이다.

 
그러나 민주당이라는 야당 세력이 줄기차게 부정과 독재에 싸웠기 때문에 민심이 이에 호응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19 학생 혁명도 민주당의 대여 투쟁이 길을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이룩된 위대한 의거였던 것이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당 억압하에서 몇 해를 두고 줄기차게 대항했던 민주 당원들은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매맞아 병신이 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 한 예는 전남 여수 민주당 재정부장 김용호(金容鎬) 씨는 선거 운동 중 괴한에게 피습되어 1960년 1월 9일 밤 드디어 절명했다.

 
국민은 민주당의 이러한 투쟁사를 옳게 인식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당이 정권욕에만 급급했고 4‧19 혁명을 맞아 노고없이 정권을 쥐게 되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본다.

 
4‧19 학생 의거가 직접적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사실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피를 뿌리며 헌신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4‧19 학생 혁명이었다.

"민주주의 사수하자"라는 플랭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온 동성 중고등학교 학생들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최루탄과 소방 호스로 제제하는 경찰


태극기를 들고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시위대에 발포하는 경찰




 그러나 학생들로 하여금 부정과 싸우는 의거의 바탕을 마련해 준 여러 해에 걸친 민주당의 공로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3월 16일에는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제4대 정‧부통령 선거 무효를 선언하였고, 4월 11일 민주당에서는 3‧15 선거에 대하여 무효 소송을 제기하였다.

 
다음날 4월 12일에는 마산에서 제2차 데모가 일어났다.

 
이때 나는 민주당 간부들과 부통령 공관에서 마산 사태를 검토하고 마산으로 당의 주요 간부는 물론 다수의 의사와 변호사를 급파했다. 지방 의사들의 경우 부상한 데모 대원들을 감히 치료할 수가 없었다. 자유당의 탄압 때문에 그 보복이 두려워서였다. 그리고 인권이 무참히 유린당해도 속수 무책이었다. 우리가 급파한 의사들은 다량의 약품으로 이들의 치료를 담당했으며 민주당측 변호사들이 인권 옹호에 나서게 되었다. 만시지탄은 있으나 야당은 힘껏 할 일을 다했다. 당시 마산은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 속이었다. 민주당 간판을 붙인 지프차가 지날 때마다 소리쳐 부르던 ‘만세!’ 소리는 감격어린 민심의 메아리였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으로서는 제1차 마산 사건 때 행방 불명되었던 학생 김주열(金朱烈) 군의 시체를 찾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해녀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도록 노력도 해보았다. 김주열 군의 시체는 4월 11일 드디어 눈에 흉탄이 박힌 채 해상에 떠올랐다.

 
마산에서 비롯한 민중의 외침이, 서울서는 4월 18일 고대생의 데모로 점화되었는데, 이 며칠 전 야당 의원들의 농성 투쟁과 대규모 데모가 있었다.

4월 18일에 일어난 고대생들의 국회의사당 앞 시위 모습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가 여기서 처음 나왔다. 이것은 서울에서의 고대생 의거에의 선도라고도 할 수 있다. 도화선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