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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자유하의 갖가지 시련

 지나간 얘기지만, 제2 공화국 초창기에 고개를 든 민주당 자체 내의 보이지 않는 세력 다툼을 제1선에서 당하는 나로서는 지긋지긋한 시련이었다. 내각 책임제라면 연대 책임하에 생사라도 같이할 정치적인 기본 자세가 요청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이미 분당되어 버려 협조는커녕 비난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특히 청와대는 신민당 인사들을 끼고 장 정권의 타도를 공공연히 주장하기에까지 사태가 돌아가니 나라가 잘되어 갈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자기네 구파에 장관 자리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 하여 몇 주일 만에 개각까지 단행해 놓으니까, 이번에는 모두 시시한 자리만 골라 주었다고 트집을 하며 일각에선 계속하여 장 정권 타도를 모의하니, 제2 공화국은 어디로 갈 것이란 말이냐.

 
국민들의 주시를 받아 가며 신‧구 세력의 각축 속에서 난항을 계속하던 제2 공화국이었다. 게다가 10월 11일에는 4월 부상 학생 데모대가 국회에 난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상 학생들이 국회 단상에 오르게 된 동기는 간단하다고 볼 수 있다.

 
서울 지방 법원 부장 판사가 10월 8일에 내린 4‧19 때의 발포자 및 부정 선거 관련자에 대한 판결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다. 홍모(洪某) 장관과 같은 이에게는 거의 무죄 판결이 내렸다.

 
이러한 판결에는 나 자신도 분격했다. 물론 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을는지는 모르나, 일반 국민 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혁명 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말이다.

 
5‧16 이후에는 이들에 대해 다시 중형이 가해지고 그들의 시책을 자부하기도 했지마는, 우리와는 사정이 매우 다른 얘기다. 5‧16 직후의 재판은 3권을 완전히 장악한 군인 체제하에서의 재판이었고, 제2 공화국 때의 그것은 3권이 완전히 분립되어 사법권이 명실 상부하게 독립된 지상(至上)의 민주주의 체제하의 재판이었음을 상기해야 하는 까닭이다.

 
여하간 4‧19의 발포자와 부정 선거 관련자에 대한 판결은 평상시의 법조문에 의한 것으로도 너무 가벼운 형이었다. 일반 국민의 실망과 분격도 대단했음은 당연한 감정의 소치였을 것이다. 국회에서 소동이 나던 날에 치안국에서는 국회 외부의 경호를 위하여 이중 삼중으로 방어를 했으나, 의장의 지시로 경찰의 경호권이 발동되지 못하고 의사당에 데모대가 난입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데모대 대표와 만난다는 약속하에 민의원 의장이 의사당에 들어올 것을 허락했으나, 4‧19 혁명 전후의 부정 선거 협조자, 발포 경관의 처벌, 제명 등의 부작용으로 심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약화된 경찰은 흥분한 데모대의 난입을 과감히 방어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힘껏 노력한 것으로 안다.

 
곽 의장이 의회 자체 내의 경호권을 발동시키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부상 학생의 의사당 난입으로 11월 28일 소위 반민주 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법이 가능하게 된 점은 부끄럽게 여긴다. 민주당측에서는 본래 이를 통과시키지 않으려 했다. 부정 축재자, 발포자 등을 이 소급법에 의하지 않고 현행법에 의해서 최중벌(最重罰)로 처벌해도 무방하리라 보았다.

 
소급법은 정치 도의상으로도 허용할 수 없는 일이있으나 당시의 격렬한 국민 감정과 지배적인 공기로 보아서는 이를 안할 도리가 없을 만큼 험악하였다.

 
10월 11일, 부상 학생의 데모대가 국회에 난입하였을 때 그들의 요구를 들어 데모대 대표자와 국회 수습 위원들이 합의하여 특별법의 입법이 국회에서 결의됨으로써 이미 소급법의 소지(素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소급법을 민주당 정부에서 발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희생을 당한 학생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데모를 저지해야 하는 경찰은 약화된 데다가 사법부의 판결은 경미했고, 국민의 감정 또한 가열되어 있어 당시의 형편으로는 입법부로서도 소급법이 불가피 했는지도 모른다.

 
11월 29일 소급법이 통과되기 전, 민주당 의원들이 농협 강당에 모여 소급법 가부의 토의가 있었을 때에도 나는 강력히 이를 반대하고, 만일 끝내 보복을 위한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까지 말하였다.

 
원내에서 자유당계의 의원들을 숙청하고 부정 축재자, 부정 선거 관련자, 발포자들의 처벌을 위한 소급법의 입법을 주장하는 원내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주장도 전혀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강력히 반대함에 따라 원내 의원들의 강경론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이미 민의원 의장과 수습 위원들이 데모대 대표에게 언질을 준 바도 있고 국민의 원망이 고조되어 다시 입법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부정 선거 때 경찰의 숙청과 아울러 억압으로 인한 전국민의 울분은 해소되지 않았고, 전국 각처에서 투서가 들어오고 전화가 끊일 사이 없이 걸려 왔으며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찾아와 자유당의 숙청 내지는 정치적 보복을 강요했다. 견딜 수 없는 고역이었다. 국민의 여론을 외면하고는 국민을 대할 수 없었으니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소급법이 통과되어 공포된 것이다.

 
연일 데모가 일어났다. 자유당과 피투성이 싸움을 하면서 민주당이 국민에게 공약한 것은 집권 후 국민의 자유의 절대 보장과 독재의 배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집권과 아울러 자유를 약속했다. 자유당에 맞서 싸운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면 독재를 막기 위한 내각 책임제의 실시를 국민에게 누누히 공약한 우리이기에 받는 수난도 격증되어 갔다.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인해 사회가 혼란에 빠졌지만, 민주당이 집권한 후 집권 전의 공약을 위배할 수가 없었다.

 
내각 책임제를 실시하면서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독재적인 수법으로 정권을 유지한다면, 이는 국민을 배신하는 것밖에 다른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혼란기라 해서 국민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정권을 잡은 우리로서 무슨 핑계로든지 계엄령이라도 선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총검에 의한 외형적 질서’보다도 ‘자유 바탕 위의 질서’가 진정한 민주적 질서라고 믿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유당 정권하에 억눌렸던 국민들이 자유가 허락된 이때에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한번은 마음껏 발산시키고 나서야 가라앉을 것은 어쩔 수 없는 뻔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일시 은인 자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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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열망하던 완전한 자유를 한번 주어 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갈수록 혼란을 더해 가는 사회 상황 속에서 우리는 철권(鐵拳)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이로 인해 사회 질서가 지나치게 문란해져서 국가 안녕을 유지할 수 없는 형편에까지 이른다면, 그때 가서는 단호한 조처를 취할 준비와 계획을 별도로 세우고 있었다.

 
귀와 입으로 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단단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나날이 데모가 계속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져 진의를 잃은 자유가 남용되고,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가 방종으로 착각되고 있었고, 허용된 자유를 틈타 일부 용공 세력이 준동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정부는 이상 자유의 남용을 허용할 수 없게 되어 이를 바로잡기 위한 보안법의 보완과 데모 규제법을 입안하여 국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