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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Ⅱ. 부통령 시절 - 민권 승리를 위한 부통령직 사임

 4월 18일 데모를 끝내고 귀교하는 학생들을 깡패들이 습격한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고, 연일 데모가 발생하게 된 것은 자연적인 울분의 폭발이었던 만큼 아무도 이를 막을 자가 없었다.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는 외침은 끊임없었다. 4월 22일 나는 기자 회견을 가지고 비상 사태를 타개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재선거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전국의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원에 따라 선거를 다시 실시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자유당측에서는 이를 응낙할 리 만무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우리가 내각 책임제를 주장하며, 원내에서의 간접 선거를 실시하자고 하는데 다시 돈 들여 총선거를 할 필요가 어디 있오?”라는 주로 한민계 인사들의 반대 의사도 있었다.

 정치적인 복선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끝내 재선거를 주장하는 나의 의사는 관철되지 못하고 말았다.

 사태의 진전이 연일 심상치 않게 되어 갔다. 4월 23일 나는 임기 만료 전에 부통령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하고 기자 회견을 가졌다. 이날 기자 회견 석상에서 밝힌 부통령직 사임은 여러 가지로 심사 숙고 끝에 내려진 것인데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도의적인 책임감에서였다.

1960년 4월 23일 부통령 사퇴성명서를 낸 후 기자회견




 내가 이때 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첫째, 당시 나의 최대의 목표는 이 대통령의 하야였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박사의 하야를 촉진시키는 방법의 하나는 내가 부통령직을 사임하는 길이었다.

 대통령직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항상 대통령 자신과 그 밑의 자유당원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만큼 이 정권이 풍전 등화에 놓여 있는 계엄령하인 당시, 이 박사가 이를 막기 위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목표는 우선 이 대통령의 하야였다. 독재 정권의 대통령을 계승하고 싶은 생각이란 추호도 염두에 둘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대통령이 위협감과 의구심을 버리고 대통령직을 안심하고 내놓게 할 수 있는 길은 내가 계승의 야심이 없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즉 이 박사의 하야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대통령직을 계승하여 이 대통령 자신이나 자유당에 보복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에, 부통령인 내가 먼저 하야를 서두른 것이다.

 내가 물러서면 이 박사는 안심하고 하야할 수 있게 된다. 이 박사만 하야한다면 성난 학생들의 요구가 실현될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국민들이 이 뜻을 이해해 주기를 나는 바라고 있었다.

 둘째, 도의적인 면이다. 내가 비록 당이 다른 민주당의 부통령이라고 하지만, 이승만 정권하의 부통령임은 틀림없었다. 이 박사가 비정상적인 사태하에 이 실정의 책임을 지고 부득이 물러날 때에 나는 당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형식적이나마 이 정권하에서 부통령직을 맡았던 나로서는 그 정권이 비상 사태로 물러서는데 나 혼자만 책임을 회피하며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면, 정치 도의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권이 정상적으로 교체되는 경우라면 문제가 다르다.

 셋째, 이 박사가 역경에 빠진 틈을 타서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것 같은 인상을 국민들에게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의 불행에 편승해서 내가 권력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남긴다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내가 이 정권에 보복할 뜻이 없으며, 만일에 이 박사가 부통령이라는 존재를 위험시하여 하야하지 않고 발악적인 비극의 사태도 불사할지 모르므로, 그로 하여금 안심하고 하야시키기 위한 촉진제를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나의 최대의 목적은 이 박사의 하야였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희생해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민주당의 중진들과 사전에 충분한 의견을 나누고, 일부 인사들의 만류도 있었지만 결국 부통령직 사임을 성명하기에 이르렀다.

 4월 24일에는, 이기붕 씨가 부통령 당선을 사퇴한다는 성명과 아울러 이승만 박사가 자유당 총재를 사임하는 성명이 나왔고, 25일에는 대학 교수단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데모에 들어감으로써 학생 의거는 전환점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4월 21일에는 국무 위원의 일괄 사표가 제출되었고, 27일에는 이 박사의 대통령직 사임서가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되어 곧 수리되었다.

 다소의 혼란은 필연적으로 올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인은 그것을 수습하는 길을 모색해야 된다는 신념으로 우리는 자주 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어쨌든 이 박사의 하야는 전체 국민이 원하는 바였고, 이를 위해서 나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박사의 하야라는 우선적 목적이 달성된 후에는 그 다음 야기될 여러 가지 문제들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이 박사 하야 후의 새로운 정부 수립까지의 공백기를 맡을 사람을 누구로 정하느냐 하는 당면 문제 앞에서 당시 이 박사의 심복이던 허정(許政) 씨가 과도 정부를 맡게 되었다. 이것이 과연 합법적이고 합헌적이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당시의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임기 응변의 조처였다.

 허정 씨가 맡았던 과정(過政)은 정상적인 합법 정부가 아니고 임시 조처로 취해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뚜렷한 정책을 펼 수가 없었고, 그 자신이 이렇다 할 책임을 지고 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과감한 시정을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 기간이 길지도 않았지만 기형적이고 과도기적인 형태의 과정 기간이었다.

 이 박사의 하야를 전후해서 미 대사 매카나기 씨와 대통령 간의 의논이 많았다고 하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미 대사의 나에 대한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부통령직 사임 시에도 나의 사임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도록 하였다.

 혹자는 내가 사임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는 의견을 말하기도 했으나 내 사임이 늦으면 단 며칠이라도 이 박사의 하야가 지체되었을 것은 사실이고, 그간에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비극을 미연에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28일 이기붕 일가가 자결하고 이 박사가 이화장(梨花壯)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과도 내각의 실정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4‧19의 뒷처리가 잘되지 않는 책임을 과정이나 어느 특수인에게만 돌릴 수 있을는지 잘 알 길이 없다.

 1960년 5월 29일에는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여 이화장으로 이거하였던 이 박사 부처가 극비리에 하와이로 망명하여 다시 한번 항간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당시 신문에서는 이 박사의 망명을 허정 씨가 사전에 나와 의논한 것처럼 보도하여 내가 이에 협조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실과는 전혀 어긋난 오보였음을 여기 밝힌다.

 나는 이 박사의 망명에 관한 사실을 허정 씨에게서 사전에 연락받은 일이 없다. 이 박사의 망명을 주선한 사람들이 이를 잘 알 것이다.

 이 사실은 미 대사와 허정 씨 그리고 프란체스카 여사만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들 속에서도 제2 공화국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그 상징인 이 박사가 마침내 미국으로 건너간 그 시점에서, 국민들이나 10여 년 간 독재 투쟁을 벌여 오던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일이란 한시바삐 이 나라에 건전한 자유 민주 국가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국민이 우리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이상, 우리는 우리의 주의, 주장, 즉 민주 대원칙에 입각하여 민주 국가를 수립하는 일만이 우리 민주당에게 맡겨진 지상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