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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일반의 의혹을 해명하며

 8개월 간의 민주당 집권을 통하여 일반 국민에게 남긴 인상이 반드시 소위 ‘무능’과 ‘부패’일까? 혹자는 감투 싸움이 빚어 놓은 추태로 말미암아 국민의 신망을 잃고 말았다는 말도 한다. 당내 신‧구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감투 싸움이라는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부패하지는 않았다. 소위 중석 사건이 장 정권 부패의 일면이라면, 세상에 알려진 얘기야말로 터무니없는 허위 날조였다. 국회에서 특별 조사 위원회까지 구성해 가지고 여러 모로 파헤쳐 보았으나 결국 ‘태산 명동(泰山鳴動)에 서일 필격(鼠一匹格)’도 안되고 말았다. 원래 꼬투리가 없는데 무엇이 나오겠는가.

 
한국의 광산을, 나중에는 땅덩어리 전부를 팔아먹은 듯한 의혹을 받게 만든 이 사건은 정말 허무 맹랑한 얘기였다.

 
당시의 대한 중석 사장인 문창준(文昌俊) 씨는 여러 차례 무시무시한 문초를 받았으나, 엄밀히 조사한 결과 아무런 부정도 찾아내지 못했고, 오히려 그가 사장으로 취임한 후 능숙한 수단으로 사무 처리를 훌륭히 해냈다는 것이 드러났을 뿐이다.

 
혹 지금도 일반 국민의 의혹이 가시지 않았을까 우려하여 그 진상을 말하고자 한다.

 
중석이라는 것이 전략 물자의 하나로서 상당한 매장량을 가진 우리 나라는 이의 해외 수출에 있어 다른 것 못지 않게 신경을 써 왔다. 이 자원은 외화 획득의 열쇠 같은 중요한 것으로서, 1952년부터 1954년까지 2년 동안만 해도 한미 중석 협정에 의해 1년 평균 4천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했다.

 
그러나 그 뒤 국제 시세가 떨어졌고, 따라서 판로가 줄어들자 1958년 미국의 콘티넨털 회사와 일수 위탁 판매 계약(一手委託販賣契約)을 맺었는데, 이것은 1961년 1월 23일로 만료되기 때문에 과연 어느 나라의 어느 회사와 신규 계약을 맺을까 하는 문제로 경제계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이 계약을 체결함에 앞서 여러 가지 이점을 비교해 본 결과, 일본의 동경 식품 회사와 가계약을 맺었다. 수송비를 한국에서 지불해야 되는 까닭에 이것이 절약되는 일본 상사와 일단 가계약을 맺었으나, 이는 다시 본계약을 거쳐 상공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계약이 실제로 성립되는 실정에 있었다.

 
국회에서 물의를 일으켜 근 4일 간에 걸쳐 조사를 하고 5‧16 후에도 계속되어 명백히 의혹을 벗은 것이지만, 물의가 일어날 때에는 상공부 장관 허가는 고사하고 가계약마저 허사가 된 것이었다. 한국의 중석 한 톨이 일본에 건너간 일 없고 일본의 돈 한푼 받은 일이 없다. 거기에 100만 불 커미션 운운하니 허무 맹랑한 날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총리로서 그 자리를 천거할 때는 그 뒤에 이권의 교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이 중석 문제로 전에도 물의가 일어난 것을 참작하여, 유능하고 양심적인 사람을 물색하느라고 신중을 기해야겠기에 상공부 장관과도 여러 차례 의논하여 선정하였다. 중석 회사 사장을 천거했던 민주당의 모 소장파 의원이 자기가 천거한 인사가 등용되지 못했음을 불만으로 여겨, 자파 소속 의원으로 하여금 문 사장에게 무슨 흑막이나 있는 양 신문에 터뜨린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이것은 개인의 욕구 불만에서 나온 반발에 불과하다. 신문들은 이것을 받아 대서 특필로 보도하여, 마치 민주당 정권에 무슨 큰 스캔들이라도 일어난 듯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이다. 그 후에도 문창준 씨는 철저한 조사를 받았으나 이 조사의 결과는 어느 외교관의 말처럼 민주당 정부가 ‘클린 거번먼트’임을 밝히는 산 증거가 되고 말았을 뿐이다. 애매한 누명이 억울하다기보다 고소를 금할 수가 없다.

 
그 무렵보다 얼마 앞서서 집단적으로 반발을 일삼던 신풍회(新風會) 모 의원이 국회에서 발설한 이른 바 ‘동경 식품에서 100만 불의 커미션을 받기로 했다’는 설이나, ‘무임소 장관 오위영 씨가 관련되었다는 얘기는 전혀 사실 무근으로서, 발설자 자신이나 나중에 의원 총회 석상에서 공식으로 사과한 바 있다. 여하간 이런 장난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이나마 세간에 쓸데없는 물의를 일으킨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반공법과 데모 규제법을 두고 2대 악법이라 하여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고 급기야는 혁신계의 ‘횃불 데모’까지 일어났다. 물론 불순 세력의 가담도 있었고 옆에서 이를 충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로 인해 외면상으로는 정권이 흔들린다는 인상, 다시 말하여 무능하다는 말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질서가 문란해지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계획이었다. 항간에 유포된 3월 위기설이니, 4월 위기설이니 하는 가운데서도 질서를 바로잡을 자신이 서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조금만 더 국민 스스로가 자중하기를 기대하였다. 어디까지나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법으로 다스리되 그래도 국민 스스로가 자숙하지 못하면 최후 단계의 강격책을 발동할 생각이었다. ‘무능’을 탓하지만, 국민들도 이제는 지나친 데모 소동에 염증을 내게 되고 이성에 돌아가 정상적인 질서를 원하게 되어 우리의 그러한 대책에 점차로 협조해 주기 시작했다.

 
1961년 봄철이 지나서는 격심한 혼란은 수습 단계로 들어갔다.

 
물론 데모로 시작하여 데모로 날이 저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5‧16 직전에 이르도록 데모가 매일같이 일어난 것은 아니며, 설혹 무절제한 행동이 일어난다 해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을 정부도 아니었다.

 
무엇으로 인해서 민주당 정권이 구악과 부패, 무능의 표본으로 악선전 되었는지는 현명한 국민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전국민이 민주당을 증오했으며 정권이 무너지기만 바랐던 것이었던가. 두고두고 하느님이 심판하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