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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Ⅳ. 침묵의 세월 - 집권 18일만의 쿠데타 모의

 5‧16과 함께 이날, 이때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대외적인 발언을 삼가해 왔다. 누구보다도 책임감을 느껴서 정치를 잘했느냐 못했느냐에 대한 것은 후일 사가(史家)의 비판을 받을 일이지만, 여하튼 도의적으로 보아 무거운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5‧16 정변이 일어난 동기가 ‘장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하여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혁명’이라고 널리 선전되어 왔음은 이미 구문에 속한다. 무엇이 무능하고, 무엇이 부패였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군사 혁명 비사(秘史)’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집권한 지 18일만에 정권 전복의 모의가 시작되고 있다. 집권 18일만에 대체 무엇을 어쩌자는 셈이었을까. 그동안에 부패와 무능이 나타나고 있었던가? 아니면 부패와 무능을 미리부터 예언할 수 있었다는 얘기인가? 세상에 이러한 모순이 없다. 처음부터 정권을 잡겠다는 그들이 한번이라도 정직하게 발표한 일이 있었는지, 과문한 나는 듣지 못했다. 부패와 무능을 기다렸다는 것이라면 또 모른다. 전부터 정권을 쥐고야 말겠다는 야심을 지닌 증거는 되어도 우리가 잘못한 때문에 쿠데타를 시작했다는 논리적인 귀결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면 장차 무능해지고 부패할지도 모르니 미리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을까?

 
하여튼 장 정권이 무능, 부패했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공언은 앞뒤가 어긋나는 얘기다. 뜻있는 국민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의문이지만, 침식을 잃고 양심껏 한다고는 했을 뿐인데 무엇이 어떻게 부패했는지 알 길이 없다.

 
5‧16 후에도 군사 정부에서는 전 각료 및 관련자들을 감금해 놓고 취조를 거듭하여, 소위 장 정권의 부패상을 색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부패상은 없었다.

포승에 묶인 민주주의의 꿈

포승에 묶인 민주주의의 꿈




 
‘장 정권의 부패상’이라고 도하(都下) 각 신문이 앞을 다투어 대서 특필로 보도하였지만 그 내용은 무엇이었나?

 
두드러진 예를 들어, 방직 협회에서 받았다는 23억 원 정치 자금 수탈설은 사실과 거리가 너무나 먼 얘기다. 7‧29 총선거를 전후하여 다시 창궐하던 혁신 세력의 진출을 막아야겠다는 이유로 주로 선거 자금으로 민주당을 위해 자진해서 2억 원 내외를 제공한 일은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앙 정보부에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 부패상을 들춰 내었지만, 결국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민주당 정권이 ‘깨끗한 정부’였음을 증명해 주는 결과밖에 초래한 것이 없다.

 
조재천 씨가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김영선 씨가 부정 축재자라고 옥살이를 하였는데, 결국 조씨는 아무 혐의가 없다고 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고, 김씨는 부정 축재자가 아니라는 판결이 났다.

 
성실한 태도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권력의 남용으로 독재를 하지 않으면 ‘무능’이라는 혁명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8개월 간의 짧은 시정(施政) 끝에 덮어놓고 부패와 무능이라는 누명밖에 씌울 것이 없다면 이는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려는 구호로 쓰기 위한 것뿐일 것이다.

 
민주당 정권이 국민 앞에 큰 과오를 범해서 쿠데타를 당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정국이 악화되었다는 자각은 없다. 아마 내가 군부를 너무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민주당 정권이 실책을 거듭해 이를 전복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군 전체의 지배적인 주장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필연적으로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제2 공화국이 큰 과오를 범했다는 의식적인 자각은 없다.

 
다만 정권을 유지하지 못한 탓으로 국민의 여망에 어긋나게 된 결과에는 나 자신이 뼈아프게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 국민 앞에 사과하며, 그동안 자숙과 근신의 성의를 표하는 길밖에 없어 오늘까지 침묵 일관이었다.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말은 얼마든지 있어도 자숙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본다는 뜻이었다. 침묵 속에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를 찾을 수 있었다. 신앙 생활에 파묻힌 나날 속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조용히 회고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