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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6. 유학을 위해 들어간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


 운석 선생이 영어학습에 열중하였고 미국 유학을 단행한 이유는 농림학교 재학 시절 한 사건을 계기로 세속적 출세욕에서 벗어나 일제의 지배하에 고통받는 민족의 영혼 구제를 위한 천주교 신앙 전파에 자신을 바칠 결심을 하게 된 데 있었다. 그러면 선생의 일생을 가른 사건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선생은 태어나자마 영세를 받고 10세 되던 1908년 인천 답동(沓洞)성당에서 뮈텔(閔德孝, Gustave Mutel, 1854~1933) 주교에게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은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렸을 때부터 “천주교가 골수에 배인” 신자였다. 그러나 농림학교 생도 중 유일한 천주교 신자였던 선생은 개신교 신자인 상급생의 해박한 성경 지식에 자극 받아 천주교 교리에 정통해 볼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 발단은 농림학교 재학시절 한 개신교 설교사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설교로부터 유발된 개신교 열품이 농림학교 학생들을 강타한데서 시작되었다. 다음은 선생이 술회하는 사건의 경위.


뮈텔 주교

≪조선 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

[뮈텔 주교는 1890년 교구장으로 임명된 이래 1933년 사망하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이끈 인물로 재임 기간 내 교회 안팎과 조선 사회의 주요 사건을 상세하기 기술한 『뮈텔 주교 일기(Journal de Mgr. Mutel)』을 남겼다.]


 “전교생 120명 중 내가 유일한 천주교 신자임을 알게 되었다. 대다수가 무종교자요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4, 5명 있을 뿐 종교문제는 교내에서 별로 화제에 오른 일조차 없다. 그러던 중 서울서 유명한 설교자 현(玄) 목사가 수원 삼일(三一)교회에 부흥운동 차 내려와 연일 연야 씨의 독특한 웅변으로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현 목사는 원래 웅변가로서 설교 중에 독립사상을 교묘히 고취하여 젊은 학도들의 정열을 자극하고 항일의식에 피끓게 하였다.


 수원 농림학생들은 너도나도 현 목사 설교를 듣고자 수십 명씩 짝을 지어 예배당으로 내왕이 빈번하였다. 일제 억압하의 울분도 풀 겸, 허탈한 공험감에 신앙의 양식도 맛볼 겸 감격과 흥분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학업도 제쳐놓다시피 하고 밤이면 설교 듣기, 새벽이면 산상기도로 수십 명이 열광적 신자로 돌변하여 교내는 어느덧 “프로테스탄트” 일색으로 뒤덮였다. 연일 화제가 현 목사 설교의 예찬이요 그리스도 복음의 토론이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지도자가 한 사람 있었으니 그는 곧 나보다 한 반 상급인 김 모씨다. 그는 열성도 대단하려니와 일찍 성경공부를 철저히 한 분이라 교내 목사 격씨로 매일 기숙사 이 방 저 방을 순회하면서 전도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자연 천주교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상기가 되어 “천주교란 완고하고 미신적이고 부패한 사교라” 하며 여지없이 매도하고 조소하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학우들은 교내 유일한 천주교인인 내 얼굴을 주시하면서 냉소하곤 했다. 자아시(自兒時)로 천주교가 골수에 배인 나로서 천주교만이 옳다고 확신해 왔던 내게는 청천벽력이었고 그지없이 놀랐다. 나는 분격을 참지 못하고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였지만 그 김씨는 청산유수로 성경구절을 연상 인용하면서 “고린도전서 몇 장 몇 절”에 이런 말이 있지 않느냐, “골로새서 몇 장 몇 절”에 이 말씀을 모르느냐 식으로, 또 이러이러한 부패사실이 있지 않느냐, 또 교회사의 사실(史實)을 들어 육박하는 데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때까지 “고린도 전서”가 무엇이고 “골로새서”가 무엇인지 들어본 일도 읽어본 일도 없었고 더욱이 교회사는 캄캄할 따름이라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때 우리 교회에 성경 관계 서적이라고는 『성경직해(성경(聖經)직해(直解)』 밖에 없었고(매주일 복음을 제시하고 이를 해설한 것), 호교(護敎)관계로는 『진교사패(眞敎四牌)』가 있을 뿐 이나마도 보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이 방면에 어둡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여지없는 부전참패(不戰慘敗)를 당하고 나서 내가 받은 정신적 타격이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신뢰감만은 확고부동이었지만 너무나 교리(敎理)와 교회사(敎會史)에 암매(暗昧)했던 탓으로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냉소의 쓴잔만 마신 울분이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농림학교 재학시절부터 영어 공부에 열심이던 운석 선생은 천주교 교리와 교회사에 대한 탐구욕을 충족시킬 기회를 좇아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17년 농림학교 졸업과 함께 서울로 이시한 운석 선생은 유학 준비를 위해 YMCA,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영어를 습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다음은 선생의 회고. “어언간 나도 20세쯤 되고 보니 우리 교리 자체에 대한 나로서의 의문도 차차 머리를 들게 되어 이에 대한 만족할 해답을 구해보려 했으나 적당한 서적도 없고 신부님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다른 성무에 바쁜 몸들이시라 개인지도의 시간적 여유조차 별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내 신념을 채우려면 외국으로 유학 나가 외국 원문을 통한 광범위의 섭렵으로 마음껏 교리 연구와 교회사 연찬(硏鑽)에 정진해 보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따라서 수원고등 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도미할 준비로 당시 유일한 영어학교인 YMCA 영어반에 통학하였다.”


1907년경 YMCA

≪6·25 전쟁 당시 소실된 옛 YMCA 회관의 1907년경 모습≫

[다음은 YMCA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 시절에 대한 운석 선생의 회고담. "수원농림을 마치고 나는 도미 유학할 원의(願意)가 간절했던 만큼 영어를 전공해 보기로 했다. 그때 그런 기관으로는 YMCA 영어학교란 곳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곧 그 1학년에 입학하고 매일 부지런히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교수진으로서는 현 중앙관상대장인 이원철(李源喆) 씨의 형님 되시는 이원창(李源昌)·이원상(李源祥) 양 선생과 영어 교육계의 원로 윤태헌(尹泰憲) 선생과 미일(美人) 루카스 씨 부처 등이었다. ABC부터 시작해서 만 삼 년간 열심히 다녔다. 삼년이 되고 보니 제법 알아도 듣고 간단한 회화도 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졸업 시에는 내가 소위 '최우등'으로 상까지 받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실지(實地)에 들어가 과연 얼마나 실력이 생겼느냐는 미국에 건너가 직접 현실에 부닥쳐 보기 전에는 미지수의 것이었다."(출처 : 장면, 「나의 학창시절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