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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2. 일생의 반려, 김옥윤 여사와의 만남

운석 선생과 김옥윤 여사

≪1916년 결혼 직후의 운석 선생과 김옥윤 여사≫



 

 선생의 가족은 1907년 인천 화촌동(花村洞 8통 6호)으로, 그리고 1915년에 서울 정동(貞洞 20번지)으로 이사하였다. 선생의 나이 18세 되던 1916년 서울 중림동(中林洞) 성당에서 부친이 간택한 천주교 집안인 김상집(金商集) 씨의 막내딸로 당시 16살의 김옥윤(金玉允, 1901~1990)여사와 결혼하였다. 선생이 회고하듯이 평생의 반려를 맞은 것이었다. “내가 걸어온 길 가운데 그 중 중요한 하나가 나의 결혼이라고도 하겠다. 아내를 맞음으로써 내가 입신하는 데 있어서 합심하여 같이 노력할 수 있는, 즉 다시 말하면 나의 모든 일을 돌보아 줄 사람을 구한다는 데서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김옥윤 여사는 중림동 성당 부속 가명학교(加明學校)를 나온 것 이외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선대로부터 믿어 온 신앙을 바탕으로 묵묵히 운석 선생을 내조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삶을 살았다. 여사는 운석 선생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생활태도에 깊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박사는 천주교 신자니까 하느님의 뜻에 절대로 어긋나는 일을 아니하겠다는 그 신앙이 바로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하나의 신조가 된 것이 아닌가해요.” 이러한 부인의 신뢰에 힘입어 운석 선생은 평탄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약현성당

≪운석 선생 부부가 혼배성사를 올린 약현(현 중림동) 성당의 1900년 무렵의 모습≫




가명학교

≪1930년대의 가명학교≫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있었으며, 1901년에는 특히 여자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가진 두세(Doucet) 신부가 성당 구내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샬르트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에게 교육을 맡겼다. 당시 교과목은 교리, 경문, 바느질 등이었다. 가명(加明)이란 학교명은 설립자 두세 신부의 세례명인 가밀로의 한자식 표기다.]


 

 만년의 운석 선생은 결혼 직후부터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함께 한 인생에 대해 “이날 [결혼식]부터 오늘까지 어언 50년간 나는 행복한 부부생활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감사한다”고 회고하였다. 임종에 즈음해 선생은 혼배성사를 올린 중림동 성당에서 결혼 50주년 기념미사를 올리길 바라셨다 한다. 그러나 선생은 갑자기 악화된 숙환으로 댁에서 기념미사를 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 열흘 뒤 세상을 달리하셨다. 

1916년 무렵 가족사진

≪1916년 결혼 직후, 수원 농림학교 재학 시절 가족사진≫

 [왼쪽 뒷줄부터 장면 박사, 부인 김옥윤 여사, 부친 장기빈 옹, 처째 남동생 장발(張勃), 왼쪽 앞줄부터 둘째 여동생 장정온(張貞溫), 조부 장치응(張致膺), 조모 박 구네군다, 둘째 남동생 장극(張剋), 어머니 황 루시아, 셋째 여동생 장정순(張貞順), 첫째 여동생 장정혜(張貞慧)]



 이렇게 선생은 부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결혼하였지만, 금혼식(金婚式)을 맞기까지 부부생활 50년 동안 평화스런 가정생활을 누린 이면에서 성직자처럼 구도자적 삶을 살아 간 운석 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 제2공화국 당시 국방부장장관을 지낸 현석호 씨는 삼덕(三德) 중에서도 정결을 으뜸으로 치는 천주교 교리를 충실히 지킨 장 박사의 인품을 기회 있을 때마다 회고하곤 하였다. “장 박사는 참으로 정결한 분이다. 한 번은 교리를 얘기하다가 내가 ‘장 박사는 한 번도 육계(六戒: 외도)를 범한 일이 없소?’하고 묻자, 그 분은 정색을 하며 ‘없지요’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하였다.” “어느 날 내가 장 박사께서도 사람인즉 외도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없다는 겁니다. 정말 없었느냐고 재차 물으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장면 씨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운석 선생의 결혼관은 미국 유학 중에 약혼식을 올린 차남 건에게 보낸 편지에도 결혼 적 처신에 대해 훈계하는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른 여자와는 일체 교제를 끊어야 하며 순전한 사교 이외의 접촉은 가지지 말아야 하며 또 광희(光嬉)와의 교제도 결혼 시까지는 아직도 남이니 절대로 난잡하게 대하지 말며 오직 서로 애정을 가지되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점잖게 상종(相從)하여야 하고 너나 광희가 다 앞으로 1년간은 학업에만 열심하여야 할 것이다.”


운석 선생이 말하는 “박만 불짜리” 결혼 비화

문: 좀 묻기가 안됐지만요. (잠깐 머뭇거리다가) 선생님은 언제 결혼하셨지요?

답: 허허, (껄껄 웃다가) 묻는 얘기가 심상치 않는 걸.

문: 미국으로 가시기 전에 하셨지요?

답: 훨씬 전 일이지. 농림학교에 다닐 때, 열여덟 살 때 했어요. 마침 졸업반인데 하루는 아버지한테서 학교로 편지가 왔단 말이요.

문: 장가를 가라고요?

답: 그렇지! 그런데 그것도 나는 전연 모르는 사이에 이미 상대방 색시 집과 딱 약혼을 해 놓고 며칠 후에 장가를 가야 하니 집으로 오너라(웃음) 하는 편지란 말이요.

문: 저런.

답: 그때는 거의 전부가 그랬었으니까. 그렇지만 학교 선생님한테 “나 장가 갑니다” 하기도 부끄럽고, (웃음) 어떻게 겨우 얘기를 해서 며칠 동안 휴가를 맡은 다음 덜렁 덜렁 집으로 갔거든.

문: 신부 얼굴은 모르지요?

답: 알 턱이 있나? 부모가 마음대로 정한 혼인인데.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부모님이 정해주신 여자니까 어련하시랴 하고 믿었지.

문: 마음속으로는 퍽 궁금하셨지요?

답: 그럴 수밖에. 그래서 결혼식을 오리기 전날밤 어머님께 가만히 여쭈어 봤지. 그랬더니 어머님 말씀이 “그만하면 괜찮더라” 하시지 않아.

문: 안심이 되셨겠군요? (웃음)

답: 좀 안심이 되긴 했지만. (웃음)

문: 결혼식은 구식으로 올리셨어요?

답: 아니지. 중림동에 있는 성당에서 올렸는데 이 이야기가 또 재미있어.

문: 어떻게 하셨기에.

답: 이 얘기는 미공개 비화야. 백만 불의 얘기지. (웃음) 오늘 온 조 여사(趙敬姫)와 기자는 운이 좋아서 백만 불짜리 얘기를 거저 듣는구먼. 지금도 성당에 가보면 남녀석이 구별되어 있지만 그때는 남녀석이 구별된 정도가 아니라 판자로 한복판을 가로막아서 왼쪽은 남자석, 오른쪽은 여자석으로 갈라놓았어요.

문: 그렇게 엄했어요?

답: 엄격했었지. 그래서 결혼식 날도 새벽 여섯 시에 가서 나는 왼쪽에서 들어아고 신부는 오른쪽에서 들어가고.

문: 서로 얼굴도 못 보고요?

답: 보려야 판자에 가로 막혀서 볼 수가 있나? 서로들 판자 떼기를 사이에 두고서 신부(神父)의 얼굴만 볼 뿐이지.

문: 딱하게 되셨네요. (웃음)

답: 예식 가운데 신부가 신랑 신부에게 서약을 시키는데 신부의 목소리가 하도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대답시켰거든.

문: 요즘 신부들이야 어디 그래요. “사랑하겠는가?” 하면 “네” 하는 판인데. (웃음)

답: 서약을 받더니 신부가 악수를 시키는데.

문: 그때 얼굴을 보셨지요?

답: 어딜? 판자가 가로 막혀 있으니까 서로 손만 앞으로 내밀고 악수를 하는 거지? 결국 결혼식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서 겨우 힐끗 쳐다봤어.

문: 그때 감상은 어떠셨어요?

답: 그건 얘기하긴 곤란한데, (웃음)

문: 좋으셨죠?

답: (껄껄 웃고 만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서도 신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단 말이거든.

문: 설마 그러실라구요?

답: 정말입니다. 내 안식구에게 가만히 가서 물어보구려. (웃음) 그때만 하더라도 가장에 대한 예의범절이 퍽 엄격해서 신부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 앞에서는 신랑을 보더라도 얼른 외면을 해야 하니까 얼굴을 볼 수 있어요?

문: 다들 그랬었나 봐요.

답: 더군다나 수원에 가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관계로 어쩌다 한번 집에 들르게 되니까. 결혼 지 두 달이 넘도록 신부의 얼굴을 똑똑히 알 수 없었단 말이야.

문: 낮에는 어른들 앞이니까 잘 보지 못 하셨게지만 밤에도 잘 못 보셨단 말씀이에요? (웃음)

답: 조 여사는 대단한 소리를 하는군.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