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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 著 - 운석 장면 일대기

운석 장면 일대기 - 9. 신앙의 실천 : 성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운석 선생의 미국 유학은 세족적 지식의 습득을 통한 일신의 영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타는 신앙에 대한 갈구에서 단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가톨릭 신앙생활, 즉 사도적 생활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완덕(完德)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베나드 스쿨에 재학 중이던 1921년 8월 28일 운석 선생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했으며, 다음해 9월 24일 세자 요한(St. John Baptist) 성당에서 프란치스코를 수도 명으로 서원(誓願)하였다. 

세자 요한 성당

≪세자 요한(St. John Baptist) 성당≫



 

교회의 정의에 따르면, 수도회의 제3회는 “세속생활에 적합한 방법으로 일반 신자들보다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더 추구하기 위하여 서약한 가톨릭 신자들의 단체”로서 회원들은 “재속신분으로 있으면서, 성령으로 인도되어, 사랑의 완성을 이루려고, 성 프란치스코처럼 교회가 인가한 방법에 따라, 복음을 살기 위하여, 서약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운석 선생은 제3회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다음은 선생이 설명하는 제3회의 목적과 사명. “원래 재속 3회는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좌(聖座, 교황)의 인가로 제정된 회칙을 준수하며 세속생활 중에서 완덕에 도달코자 노력하는 단체이니만큼 무엇보다도 먼저 가지 성화(聖化)에 전부를 기울이고 나아가서 이웃 사람의 성화와 그들에의 사랑의 봉사로 주의 영광을 희구하며 회칙엄수로 보속(補贖)을 충실히 이행함이 그 목적이다. 회원은 그리스도의 신비체(神秘體) 안에 형제애로 단결하여 공동노력으로 평신도 사도직에 앞장서 복음전파의 십자군이 되어야 하며 경건한 수덕수범(修德垂範)으로 도의 앙양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각자 가정과 직장환경에서 복음적 표양(表樣)으로 사랑과 평화의 사자 구실을 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


운석 장면

≪성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무렵, 1921년에서 1922년 사이의 운석 선생≫




 

운석 선생은 제3회 입회 이후 자신의 세족적 지위가 어떻게 변하던 간에 독신 수도자들과 똑같은 수덕생활을 세속 안에서 영위해 나가겠다는 결심대로 일관되게 이 회의 목적과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갔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선생은 가정생활에서 “자기 성화”에 성공하였으며, 사회생활에서도 다음과 같은 그와 직접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의 회상에 보이듯이 “복음적 표양”으로 우뚝 섰음을 운석 선생을 지켜 본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증거할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 제3회 서울 형제회 제1회 착복식

≪성 프란치스코 제3회 서울 형제회 제1회 착복식≫

[두 번째 열 왼쪽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가 장정혜와 김옥윤 여사. 세 번째 열 왼쪽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가 한창우와 정지용.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가 서혜련, 황루시아. 네 번째 열 왼쪽으로부터 첫 번째와 두 번째, 및 다섯 번째가 방병래, 장기빈, 이동구. 다섯번째 열 왼쪽으로부터 첫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가 장면, 조종국, 장발.]


 먼저 선생의 용산 신학교 교사 시절 제자인 노기남 대주교와 동성 상업학교 재직시절 제자인 유수철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그의 신앙은 깊고 철저했다. 모든 언동은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 사생활에서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오직 천주님의 가르치심대로 실천한 성인이었다. 우리 성직자도 따르기 힘들만큼 모범적이었다. 그가 지닌 넓고 깊은 학식, 매사를 잘 처리해 나가는 역량, 그리고 숭고한 신앙심으로 인하여 만인의 우러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를 사귀는 이마다 그를 존경하지 않고는 못 배겨날 만큼, 만인을 품에 안은 숭고하고 세찬 힘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의 깊은 신앙과 높은 인격에 의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분은 언어·행동·몸 전체에서 신앙심이 넘쳐흐르는 철두철미한 종교인이었다… 그는 고해성사를 자주 하시는 분으로 대개는 정교직으로 2주일에 한 번 이상 꼭 받는 성실할 교인이었다. 때로는 그의 고해를 듣는 내가 등기에도 ‘이런 것도 죄일까?’ 싶은 것까지 세밀하게 고해하셨다. 그토록 양심을 깨끗이 가지기에 최선을 다했으며 사소한 일들까지 깊이 뉘우치는 겸손한 태도였다. 여기에 내 스스로가 감명받은 바 지대함을 밝혀둔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장 박사의 위대한 생애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다음은 『가톨릭 청년』의 기자였던 주미(周美)씨의 촌평. “장 박사는 그가 생존시 교육자로서 또 정치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허나 가장 강하게 생의 향기를 남긴 것은 그가 교육자로서 아니 정치가로서보다 한 사람의 가톨릭 신자로서 생활한 데 대한 발자취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지만 가톨릭 정신과 그 생활을 일치시켜 나가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장 박사는 그 정신을 그대로 자기 생활에 적응시켰음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박사의 생존시 그의 생활 밑바닥을 흐르고 있었던 굵직한 이데아는 오상(五傷) 방지거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성경 그대로 생활한 청빈과 겸손 그것이다.”

 한마디로 운석 선생은 ‘성직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고결한 생활을 했던 분’이었다. 특히 선생은 가톨릭 신앙의 전파를 제3회원으로서의 최대 의무로 생각했으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를 충실히 실천하였다. 일례로 선생은 미국 유학시절 도미한 동생 장발을 제3회에 입회시켰으며, 귀국 후에는 한국 최초의 성 프란치스코 제3회인 서울 형제회를 만들어 그의 부친 장기빈 옹과 부인 김옥윤 여사, 동생 장발·장정혜·장정순 등 가족을 비롯해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한창우와 성 루가 병원을 열어 의료 봉사활동을 전개한 박병래, 『가톨릭 청년』을 함께 발행한 정지용·이동구 및 『한국 천주교회사』의 저자 류홍렬 등을 제3회원에 입회시켰다. 또한 선생은 100여 명이 넘는 아래의 “대자 명단”에 보이듯이 선생이 몸담은 곳마다 주변 인물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생에게 감화되어 신앙을 갖게 된 주변 인사들의 경험담을 들어보자. 먼저 2공화국 당시 국방장관을 지낸 현석호 씨의 증언. “그 분은 종교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피로한 줄도 모르고 정열을 다해 말씀했고, 자기의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몹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5·16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그 분과 같이 지내는 동안 나는 많은 교리를 배웠고 종교인으로서 가지는 근본적인 덕성도 몸에 배도록 교정되었다.” 다음은 민주당시절 고락을 함께한 박순천 여사의 회고. “장 박사님은 많은 동지들을 입교(入敎)시켜 구령(救靈)을 받게 했다. 나는 본래 6·25 이후에 신교에 관계하고 있었지만, 어찌해서 차츰 명동성당에 나갔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편암함을 느꼈던 것이다. 민주당 동지들을 비롯해서 제2공화국 당시의 각료들은 대개가 장 박사님의 전교에 의해서 영세를 받았다. 지금은 모두가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 박사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나는 신교니 뭐니 하며 핑계를 대다가 돌아가신 요즈음 박사님께서 권고하시던 그 말씀이 가슴에 남아 몹시 찔리는 모양인지 지금은 교리강좌도 받으며, 선생 생전에 영세도 받고 하여 주일마다 미사에 나가게 되었으니 박사님께서 살아 생전에 그렇게 전교에 열심히셨던 덕분이었다. 돌아가신 오늘날도 그분은 천당에서 구령사업을 하시고 계실 것만 갚다.”


 
한마디로 운석 선생은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이후 그의 세속적 지위는 교육자, 외교관, 정치가로 바뀌어 나갔지만, 그는 평생토록 제3회 회원으로서 서약한 바대로의 의무를 지키는 삶을 살아 나갔다. 따라서 제3회 입회는 운석 선생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회원증

≪성 프란치스코 서울 형제 자매회 회원증≫


대자 명단

≪대자 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