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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Ⅰ. 서장 - 초대 주미대사 시절

주미대사 발령 직후인 1949년 초 10평짜리 임시 대사관 사무실에서




 그러나 대사라고는 처음하는 일이라 다음날부터 각국 대사 중 아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솔직하게 대사직의 공부를 시작하여 서식(書式) 편제(編制) 등을 습득하면서 차근차근 대사관의 기초를 세워 나갔다. 1년 반 동안을 두고 대사관 청사도 증축하여, 직원도 정비하고 운영도 본궤도에 올려놓아 대사관의 기초는 튼튼해지고 나의 마음도 안정 되었을 무렵, 1950년 6월 25일 밤 느닷없이 UPI 기자에게서 전화가 오고 뒤이어 이 대통령으로부터 국제 전화가 왔는데 “북한 공산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오는 중이니 속히 미국 정부와 유엔에 호소하고 활동을 개시하라”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의 음성은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즉시로 나는 미 국무성 고위층과 대통령을 순방하면서 구원을 요청하고, 대(對) 유엔 활동을 개시하여 민주 우방 제국 대표들에게 눈물의 호소를 하면서 밤잠을 못 이루고 구국 활동에 나섰다. 미 국무성 당국과 철야 숙의한 결과 나는 그 다음날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긴급 회의에 나가서 한국의 위급한 사태를 호소하게 된 것인데, 처음에는 본국과의 통신이 두절되어 더 이상 아무런 지시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의논할 사람도 별로 없었던 나는 그날그날의 정세를 판단하여 나의 재량에 따라 고군 분투하던 격이었다.

 미국 정부와 더욱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당시 미국의 유엔 수석 대표인 상원 의원 오스턴 씨, 국무성 고문 덜레스 씨 등과 접촉하여 안전 보장 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틈을 타서 출병, 원조 관계, 기타 모든 것이 한국에 유리하도록 거의 일사 천리 격으로 결정되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미 국무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사회 단체, 언론계, 종교 단체에 거듭 호소함으로써 이들의 호응을 받아, 본국의 국민들이 실망 속에서 체념하지 말고 희망에 찬 전투 의식과 반공 태세를 갖추도록 있는 힘을 다 기울였다. 나는 안보 이사회가 끝날 때마다 거의 매일 ‘미국의 소리’를 통해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우리 동포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유엔군이 창설되고 맥아더 원수가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에 출병하게 되었을 때는 마음이 퍽 든든하고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 낸 외교 활동을 정리한 "미국의 한국 전쟁 참가 경위"



1950년 6월 27일 열린 안보리 474차 회의에서 북한에 대한 대응 군사행동을 결의하는 표결 장면




 북진한 유엔군과 국군은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 근처의 초산(楚山)까지 진격하여 전세는 매우 유리하였으나, 중공의 개입으로 다시 악화되었다.

 11월 6일에는 맥아더 원수가 중공의 월경(越境)을 발표하고, 28일에는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본국으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국무 총리에 임명되어 인준되었으니, 곧 귀국하라는 것이다.

 
나는 곧 귀국할 수 없다는 뜻을 이 박사에게 전했다. 중공의 개입으로 전국이 변하여 새로운 전쟁에 직면함에 따라 11월 20일 트루먼 미 대통령이 “한국전에서 원폭(原爆)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언명이 있었고, 유엔에서도 중공의 개입에 대해 논란이 심해졌으므로 이 문제가 일단락된 후에라야 귀국하겠다는 보고를 올리고 양해를 구했다.

 
본국에서 내가 총리에 지명되어 국회의 인준을 받은 것이 1950년 11월 28일이었고, 중공 개입 문제가 유엔에서 일단락되는 것을 보고 귀국한 때는 다음해인 1951년 1월 28일이었다. 내가 귀국한 다음날인 2월 1일, 유엔 총회에서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보내온 국무총리 임명 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