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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Ⅰ. 서장 - 어린시절

 1899년 나는 서울 적선동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옛날의 삼군부(三軍部)가 있던 뒷골목인데, 중앙청 서남쪽이다.

 
어머니는 제물포(인천)에서 가마를 타고 친정 댁에서 오셔서 나를 낳으시고, 돌아가실 때에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경인(京仁) 철도의 기차를 타고 가셨다고 하니,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 맨 처음 문명의 이기(利器)를 이용한 셈이다.

 
나의 가정은 그리 군색하지도 않았고, 내가 장남인 만큼 부모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셔서, 나는 남부러울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양친의 만년 모습




여덟 살 되던 해, 나는 그 당시 인천에 있는 박문 학교에 입학하여 머리를 땋고 다니면서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 ‘대학(大學)’, ‘통감(通鑑)’을 배우고 신학문이라는 산술도 배웠다. 그때는 아직 어릴 때라 매일 아침 어머니가 머리를 빗겨 주시는데 여간 귀찮지가 않았고, 나도 왜 그런지 머리 땋고 다니기가 싫어서 때마침 인천에 처음으로 이발소가 생겨 머리를 자른다기에, 부모님 승낙도 없이 혼자 가서 머리를 싹 잘라 버렸다.

 자른 머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머님은 깜짝 놀라 질겁을 하시며 역정을 내시어, 나는 혼이 나서 울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아홉 살 때 일이다.

 
박문 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진학을 해야겠는데 어리다고 모두들 받지를 않아, 수원에 있는 농림 학교에서 겨우 원서를 접수하여 주어서, 지원자 1천여 명 가운데서 40여 명을 모집하는데 끼어 간신히 입학을 하였다.

 
이때의 농림 학교는 지금의 서울 대학교 농과 대학(전 수원 고등 농림 학교) 전신으로 관비 학교였으므로, 매월 5원씩 급여해 주는데 기숙사에 3원 50전을 내고 1원 50전씩을 쓰게 됨으로 여간 편리하지 않았으며 나는 수염이 덥수룩한 어른들 틈에 끼어 귀여움도 받고 괴로움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수원 농림학교 재학시절 (앞줄 오른쪽 두번째)



농림 학교는 당시 실질적으로는 전문 학교 정도의 수준으로 우리는 임학, 농학, 축산학, 양잠학 등 농림 부문 전반에 걸쳐 배우면서 여름 방학도 없이 실습이라고 하여 밭도 매고, 논도 갈고, 모도 심고, 때로는 똥통도 지고, 거름도 퍼 나르며, 어지간한 농삿군이 되었다.

 농림 학교 재학 중인 내 나이 18살 때, 나는 결혼을 하였다.

 
마침 나는 2학년이었다. 하루는 아버지로부터 학교로 편지가 왔기에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혼을 해 놓고 며칠 후에 ‘장가를 가게 됐으니 그 전날 귀가하라’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것을 억지로 참고 학교에 사정을 하여 2일 간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가서 어머님께 조용히 궁금한 것을 여쭈어 보았더니,

 
“내가 가서 선을 보았는데 그만하면 괜찮더라” 하시기에 좀 안심을 하고 결혼날을 맞이했다.

1916년 결혼 직후 김옥윤 여사와 함께




식은 중림동 성당에서 올렸는데, 그 시절에는 성당 내부의 한복판을 판자로 가로막고 남녀석을 구별하고 있던 판이라 신랑인 나는 신부의 얼굴도 못 본 채, 식을 끝내고 집으로 되돌아와서야 겨우 처음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이날부터 오늘까지 어언 50년 간 나는 행복한 부부 생활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감사한다.

 
결혼 후, 얼마 있다가 나는 3년 간의 수업을 마치고 농림 학교를 졸업했다. 그 당시에는 농림 학교를 졸업하면 금테 모자를 쓰고, 칼을 차고, 관리 노릇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그러기가 싫어서 그때의 YMCA 기독교 청년 학관 영어학과에 다시 진학하여, 3년 간 영어를 전문으로 공부하였다. 이때에 3‧1 운동이 일어나고, 나도 만세를 부르고 다니다가 그 다음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가서는 약 반년 간 예과에서 영어를 더 배우고 뉴욕에 있는 맨해튼 대학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종교 방면의 연구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보며 더욱 나의 언행을 종교적 양심에 비추어 보고 행동하는 습성을 길렀으며, 일제 아래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민간 교육 사업이 더욱 효과적이며 첩경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고, 민족 도덕을 앙양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겠다고 깨닫게 되었다.

 
미국 유학 중에 나는 집으로부터 조금씩 도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학비와 밥값을 벌어들이기 위하여 방학 기간과 여가를 이용하여 잡역(雜役)을 해야 했고, 또 비용을 절약하기 위하여 자취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생활을 통하여 나는 부지 불식간에 자립 정신과 내핍 생활의 단련을 받고, 인내와 불굴의 힘을 얻게 되어, 그 후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약 5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925년에 나는 미국을 떠나 로마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시복식(諡福式)에 한국 가톨릭 신도 대표로 참석하고 지중해와 인도양을 거쳐 40일의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성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무렵 (1921년~1922년 사이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