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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Ⅰ. 서장 - 해방정계

 나는 해방된 우리 민족의 최대 당면 과업은 우선 정치 면에서 우리 조국을 완전 독립 국가로 재건하고, 경제의 자주 자립을 확립하며 문화, 교육의 정책과 체계를 재편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정계에 투신하여 민주 의원(民主議院)의 의원이 되고, 연달아 입법 의원(立法議院)의 의원이 되었다.

 
과도기 입법 의원으로서 나는 주로 좌익 계열과의 투쟁, 군정 당국과의 절충, 미‧소 공동 위원회에 대한 대책 수립 등으로 정계의 말석에서 일해 오면서 혼란의 정계를 수습하여 독립 국가 체제의 완비와 정권 이양 단계로 지향시키는 데 모든 정성을 기울여 노력하였다.

입법의원 당시.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우측 첫번째)와 함께




 때마침 제2차 유엔 총회의 결의로 한국 초유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나는 서울 종로 을구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고, 제헌 국회 의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헌법이 제정되고 정부가 수립되어, 8‧15 기념일에 우리 나라의 독립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독립 정부는 수립되었지만, 우리가 국제적 승인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립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그해 9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표단을 보내서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나는 외람스럽게도 수석 대표가 되고, 차석 대표인 장기영(張基永) 씨와 고문단으로 조병옥(趙炳玉), 김우평(金佑坪), 전규홍(全奎弘), 김활란(金活蘭), 정일형(鄭一亨), 모윤숙(毛允淑) 제씨와 함께 파리로 갔다.


제3차 유엔총회에 임한 한국 대표단의 얼굴들 (앞줄) 조병옥, 장면 수석, 장기영 (뒷줄)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김진구, 김우평




 국제 외교 무대에 처음 나서는 우리는 모든 것이 낯설고 유엔 총회에 모인 세계 열강 외교단들에게 우리의 실정과 승인의 필요성을 납득시키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소련을 비롯한 공산 국가 대표들의 악착 같은 악선전과 방해 공작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하루는 우리 일행이 헤에그의 이준(李儁) 열사의 묘지를 참배하고 비장한 결의를 피력한 후, 진실성 있는 노력으로써 50여개 국 대표를 돌아가며 설복하여, 드디어 제3차 유엔 총회 마지막 날 밤의 최종 안건으로 국제 승인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날의 나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만큼 큰 것이었다.

UN 총회 연설문 요약문




 그 후 나는 다시 대통령 특사로 바티칸의 로마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하고 한국에 대한 정신적 후원을 청하여 그분의 쾌락(快諾)을 받고 바로 뉴욕에 도착하였는데, 다음해 1949년 정월 초하룻날 트루먼 대통령은 솔선하여 미국이 한국 정부를 승인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나는 수일 후에 주미 대사로 임명되었다는 전문을 받았다.


신임장




 나는 귀국 예정대로 짐도 전부 본국으로 부친 후였고, 하도 뜻밖의 일이라 당황도 하였지만, 할 수 없이 워싱턴에서 임시 정부 때 쓰던 구미 외교 위원부(歐美外交委員部) 자리로 가서, 친구의 비서를 한 사람 데려다가 그와 함께 집안 소제 등 정리를 하고 우선 사무실을 하나 꾸며 놓았다. 이것이 바로 ‘대한 민국 주미 대사관’의 첫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