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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회고록 -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Ⅰ. 서장 - 제2대 국무총리 취임

 내가 귀국했을 때는 국회와 이 대통령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어 거의 수화 상극(水火相剋)이었다. 평화시에도 물론이거니와 전쟁 수행 도상에 있는 국가에서 입법부와 행정부가 의견과 감정의 대립으로 행동의 일치점을 갖지 못하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나는 중간에서 양자의 조정 역할을 하느라고 무한한 애를 써 보았으나 갈라진 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귀국 즉시 총리직에 취임하지 않고, 1주일 간의 여유를 얻어 요인들을 만나 의논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이 박사에 대한 평이 좋지 많아 총리직을 맡을 생각이 간절하지 않았으나, ‘이왕 인준도 받았으니 하는 데까지 하다가 할 수 없으면 그만두라’는 의견이 다수여서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 이것이 2월 3일의 일이다.

취임 직후 기자회견(1951년 2월 12일)



 총리직을 수락하고 국사를 담당한 후에는 어긋난 국회와 대통령의 중간에서 힘드는 조정 역할을 해야만 했다. 취임 후 곧 실시된 예산 심의에서도 대통령과 국회의 의견은 크게 달랐다. 복잡한 전쟁 문제에서 양자의 화음(和音)을 찾기 위하여 국회의 각 간부, 분과 위원장을 사적으로 찾아 다니기도 하고, 집으로 초대도하여 겨우 통과를 보았다. 내 생각으로는 양자의 상충(相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믿게 되었을 때 불미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 하나가 세칭 국민 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이다.

 
그대로 계속하느냐, 해산하느냐는 문제로 논란이 거듭되었다. 이때 나는 제2 국민병들의 귀향 조처를 주장했다. 정부와 여러 국회 간부들과 협의하여 1951년 3월 19일에는 장정들을 귀향시키기로 결정하였고, 4월 30일에는 국민 방위군을 폐지시키는 결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으며, 5월 12일에 이 법령을 공포했다.

 
내 재직 시에 또한 거창(居昌)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끔직한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의 협의로 현지 조사를 나갔던 합동 조사단은 김종원(金宗元)이 지휘하는 ‘가장 공비(假裝共匪)’를 만나는 등 복잡한 문제들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이 박사의 정부로는 효율적인 국가 통치가 불가하다는 일반의 여론이 점차로 고조되었고, 나 역시 동감이었다.

 
3월 14일에는 수도 서울이 재수복됐다. 그리고 이 대통령에게 국민 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 등 6‧25 이후 일어난 모든 험악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물러나라고 요구했던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이 사임했다. 이것이 5월 9일의 일이다. 그리고 나서 15일에는 새로이 부통령에 김성수(金性洙) 씨가 취임하게 되었다.

 
그 후 8월 15일, 이 대통령은 광복 기념 연설에서 신당 창설 구상을 표명하게 되었다. 자유당 창당의 시사였다. 이 박사와 국회 사이에는 그래도 악화 일로였다. 이 박사 밑에 국무 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
 
 그러나 그분의 성격 소치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정치 면에 나타난 그분의 개성은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정적을 용서 않고 때로는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을 주저 않고 드러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비위에 안 맞으면 공포 안하기가 일쑤이며, 그의 유시나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 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헌법 기관인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 재판소 등도 필요 없다고 구성해 주지 않았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킨 사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다. 또 그분을 장기 집권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중석불(弗) 사건, 원면(原綿) 사건, 연계 자금(連繫資金) 사건, 산업 금융 채권 사건 등, 추잡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국민의 불신을 더욱 사게 되었다.

비서진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