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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채록 · 회고

회고 - 자유의 고귀한 시련 - 곽상훈(郭尙勳, 전 민의원 의장)

 

자유의 고귀한 시련 - 곽상훈(郭尙勳, 전 민의원 의장)

 

하늘이 주지 않는 기회


운석(雲石)과 나와는 인천이 동향인지라 나는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그의 춘부장께서는 인천에서 손꼽히는 어른이었고 나는 젊어서부터 그분의 자제인 운석을 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상면하기는 제헌 국회 의원 시절이다.

나는 진작부터 그의 이름을 알고 있기는 했었지만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훤칠한 인물에 무척 호감이 갔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를 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한결같았다. 사람은 첫인상이 좋아야 한다고 한다. 아마 운석 같은 이를 두고 말한 것 같다. 제헌 국회 시절에 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기생들이 동석한 연회였었다. “장 박사님은 사진에도 미남이신데 사진보다 인물이 더 잘나셨네요.” 기생들이 하는 말이었다.

제3차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전인가, 이 박사의 특사격으로 미국에 갈 무렵 나와 2-3인이 모여 송별회를 해주는데 그때도 그는 기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었다.

운석은 본래가 미남인 데다가 덕성스럽게 생겨 초면에도 상대방에게 호감을 준다. 그의 선천적인 인품의 조건이 그로 하여금 정계에 투신하자마자 외교관의 길로 나서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운석이 제3차 유엔 총회에서 곧바로 주미 대사로 가는 바람에 우리는 한동안 떨어져 있다가, 제2대 국무 총리가 되어 귀국하게 되어서야 다시 상면할 수 있었다.

하루는 나를 찾기에 국무 총리실에 가 보니, 그는 총리 집무실에 있지 않고, 뒷방에다 침대를 갖다 놓고 거기에 누워 있었다. 나는 초췌한 용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웬일이오? 몸이 아주 안됐으니.”

“간장염이 재발된 모양이오만….”

“쉬셔야 되겠소.”

“치료하면 낫겠죠. 그런데 내가 삼연(三然)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 인천 시장이 궐석인데 누구 좋은 사람을 추천해 줘야 되겠소.”

운석은 자기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소임을 다하려고 애쓰는 위인이었다. 그래서 끝내는 그 병 때문에 총리직을 사직하고 말았다.

당시 이 박사는 실정은 물론 악정까지 불사했다. 국민의 마음은 이 박사에게서 운석으로 옮아 왔다.

우리는 그 무렵에 오위영(吳緯泳) 씨 댁에 모여 차기 대통령 선거에는 고집 불통이요, 심술쟁이인 이 박사를 몰아내고 운석을 대통령으로 앉힐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 당시의 헌법에 정‧부통령 선거는 직선제가 아니라, 국회에서 얼마든지 이 박사를 몰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압도적인 사전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나는 당시의 국무 총리인 장 모씨에게 우리의 취지를 밝히고 도장을 찍도록 권했다.

“성사하면 배정은 어떻게 할 거요? 그것부터 먼저 정합시다.”

“성사만 되면 한 자리 안 드릴까 봐 그러시오?”

그는 그 자리에서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박사에게 너무나 가혹하게 하는 것 같았다. 당시에 그는 비록 실정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과거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때는 사형 직전에 구사 일생으로 탈옥한 일도 있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 전시인데 갑자기 내각 책임제로 개헌하고, 또 이 박사까지 몰아내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란 용이한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이 박사를 실권 없는 상징적인 대통령 자리에 그냥 둔 채, 내각 책임제로 개헌해서 운석을 중심으로 한 인물 본위로 잘 다스리면 국가 장래를 위해 좋을 것이란 나대로의 결론을 내려, 그 이야기를 했다가 젊은 과격파들에게 묵살당하고 말았다. 걱정은 됐지만 대의에 따라야 하겠기에, 다시 장 모씨를 만나러 그의 국무 총리실로 갔더니, 신임 이 모 장관이 이미 와서 무엇인가 비밀히 숙의 중이었다. 나는 이 박사의 참모들에게 “손 맞게 일들 잘하시오. 성사하는 날 내가 국회에서 잘 알아서 할 테니…” 하고, 혼란한 정국을 바로잡고 참신하게 일하자는 뜻에서 한마디 넌지시 했다. 그것이 화가 될 줄 뉘 알았으랴 그들은 이 박사의 참모라기보다는 주구들이었으니….

나는 역적 모의(?)를 하다가 걸려든 격이 되었다.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자 야당 국회 의원들을 끌고 가 문초하면서, 그들은 자꾸만 운석의 거처를 묻는 것이었다.

“난 운석이 어디 있는지 몰라.”

나는 정말 어디 있는지 몰랐다.

운석은 그때 미군 병원에서 요양 중에 있었던 모양이었고 우리들 스스로가 애국 충정에서 그를 지도자로 모시고자 했지만, 하늘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동아 일보에 준 톱뉴스


1954년 11월 27일, 제5차 개헌안이 135대 60으로 부결되었다. 자유당의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자 의사당 안팎에서는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그러나 누가 뜻하였으랴. 이틀 후 월요일인 29일에, 사회자 최순주(崔淳周) 부의장이 부결을 번복하고 사사 오입으로 통과를 강행하는 의사봉을 휘둘렀다. 청천 벽력 같은 소리다. 당시 부의장인 나는 쫓아가서 의사봉을 빼앗아 부결을 선포하며 의사봉을 내리쳤다. 어찌나 울분에 북받쳤던지 그만 의사봉이 부러지고 말았다.

세칭 사사 오입 개헌 파동 후 야당 인사들은 저마다 야당 결성을 부르짖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국민들은 이 정권의 만행에 시달리고 지칠 대로 지쳐, 벌써부터 정부와 여당에 맞설 야당이 나오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다. 산실은 바로 내 국회 부의장실이었으며, 나는 곧 산파 역할을 한 격이었다.

운석과 유석은 당시 국회 의원이 아니었다.

우선 시급한 것이 제헌 국회 이후에 야기된 개인 플레이를 억제하자는 데 있었다. 그리고 범야 세력의 흡수다. 제일 먼저 내가 손을 뻗은 것은 해공(海公)에게 였다.

“해공, 아무래도 민주 국민당을 해체하고 범야 세력을 규합해야 하겠소. 그렇게 하시오.”

나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해공도 뜻이 있던 터이라, 얼마 후 민주 국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당 창당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1955년 9월 19일에 곧 ‘민주당’의 창당을 보았다. 이때의 최고 위원에 해공, 유석, 운석, 백남훈(白南薰),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사람이 피선되었다.

이 무렵 운석의 힘이 컸다.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자금 조달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가톨릭 세력에 이때부터 힘입은 바 컸다.

창당이 끝나자 우리에게는 곧 당내의 고민이 생겼다. 이듬해 1956년 5월로 임박한 정‧부통령 선거에 누구를 내세워야 할 것인가. 암만 해도 해공, 운석, 유석이 서로의 난투극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955년 11월인가 내가 부산 동래 온천에 가 있는데, 15일자 신문에서 유석이 대구에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보고, 대구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목욕도 할 겸 동래로 오라고 불렀다. 유석은 곧바로 부산 동래로 달려왔다. 나는 긴말도 필요 없고 해서 단도 직입적으로 말했다.

“유석, 이거 우리끼리 싸울 거 없잖아. 난맥을 보인다는 것은 국민에게 실망을 준단 말야.”

“무슨 말이오? 삼연은.”

“내 생각엔 유석이 이번에 나오지 말아야겠어. 이번에는 누가 보더라도 해공이야.”

유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해공보다 못하다는 게 아냐. 유석도 운석도 모두 대통령 감 아닌가! 하여간 다음엔 내가 당신을 적극 밀 테니, 이번만은 눈 딱 감고 있어. 그리고 유석, 당신은 국법을 어긴 사람이라 아직은 안돼.”

“내가 국법을 어기다니?”

유석은 몹시 놀라며 펄쩍 뛰었다.

“내무 장관 때 생각 안나? 하여간 잔말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합시다.”

나는 껄껄 웃으며 농담을 했다. 내 말의 어감은 농담이지만, 사실 유석은 내무부 장관 시절에 모 국회 의원을 공산당 관련자라고 하여 국회에서 석방 결의까지 낸 사람을 끝내 석방시키지 않은 잘못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난 유석은 금방 자기 잘못을 깨닫고 “삼연이 알아서 하시오” 하고 양보의 빛을 보였다. 그것은 매우 유석다운 일면이었다.

다음엔 민주당 지방 유세 때에 유석을 설득시켜야 했다. 어느 날 밤 마산의 어느 조그만 여관방에서 해공과 운석 사이에 내가 눕게 되었는데,

“운석, 이번 대통령에는 해공을 주자. 어떻나? 작정해라. 그래야 우리 민주당이 잘될 것 아닌가.”

옆에서 자는 운석을 잡고 종용했으나, 그는 즉석에서 쾌락을 안했다. 곁에 누워 있는 해공은 자는 척하고만 있었다.

“사실 나도 나서고 싶지는 않소. 하지만 동지들이 있으니 시간 여유를 주오. 그들을 어떻게 설득시킬 테니.”

이튿날 아침에야 겨우 이런 말을 했다. 그 후 이영준(李榮俊) 박사 댁에서 내 뜻에 동조하여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 최고 위원 5명은 곧 최고 위원실에 모였다. 유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에 나서지 않으려오. 대통령에는 해공, 부통령에는 운석을 내세웁시다. 어떻습니까?”

“나도 거기에 따르겠소.”

백남훈 씨도 즉석에서 동조했다.

이날 민주당 최고 위원회의 사회 격인 나는 “나도 마찬가지요. 당사자들에겐 발언권을 안 주오” 하고 잘라 선언하고, 전당 대회에서의 결의를 노력하는 한편 서로 심혈을 기울여 돕자는 조건을 내세웠다.

이 뉴스를 동아 일보에 있는 김준하(金俊河) 씨에게 몰래 전했다. 동아 일보 1면에 톱으로 난 것은 물론이다. 민주당 내에서는 발끈 뒤집혔다.

“누구 맘대로 선정했으며 발표를 누구 마음대로 했느냐?”라면서, 각 파에서들 따지고 들었다.

“발표한 일은 없어. 우린 다만 의논만 했을 뿐인데….”

나는 생전 처음 거짓말을 하면서도 어찌나 유쾌한 기분인지 몰랐다. 당내의 잡음이 일소되었으니 대성공이었다.


"명당을 썼구려"


민주당이 불운했던지? 국운이 계속 독재자의 수중에 맡겨진 채, 국민은 더욱 시달림을 받아야 할 불의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루아침 사이 뜻밖에도 해공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으니….

거기에다 대구 개표 중단 사건 등 피나는 노력 속에 갖가지 고난과 굴욕을 겪은 우리였다. 하지만 운석은 민의에 의해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외로운 직책이었다. 그러나 운석은 안심하고 있어도 좋았다. 자기의 주위에는 우리 민주당 동지들이 항상 감싸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주 부통령 관저를 드나들며 거기에 외빈용으로 마련되어 있는 양주를 거의 다 마셔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그가 살아 있던 그 시절이 아쉽다.

운석을 회고하는 이 자리에서 나의 약간의 실수로 저질러진 부통령 재직 시절의 피격 사건을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1951년 9월 28일이다. 당시 시공관에서 민주당 전당 대회를 가질 때 나는 사회를 맡아 보았다.

운석은 몸이 불편해서 나오지 못한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이를 곧 장내에 알렸다. 그러자 한 청년이 벌떡 일어서면서,

“우리가 피 흘려 뽑아 드린 부통령이신데 과히 불편치 않으시면 잠시 나오셔서 얼굴만이라도 보여주십시오.”

나는 그 지방 당원의 간절한 말에 너무나 감격했고, 또 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당선이 된 것이니 의당 그러는 것이 도리라 생각되어, 즉시 부통령 관저에 기별을 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운석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여보, 왜 안 나오고 그러오? 안색도 괜찮은데.”

“나야 왜 안 나오고 싶겠소만, 그동안 좋지 않은 소문도 있었고 해서…. 마침 삼연이 기별을 하기에 이렇게 나왔지.”

“이봐, 거 뭐 죽으면 어때서?”

나의 농담은 얼마 못 가서 사실에 가까운 사건을 야기시켰다.

운석의 연설은 간단하면서도 구구 절절 폐부를 도려 내는 듯 실감에 넘쳤다.

연설과 인사가 끝나고 하단하던 운석이었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총성과 함께 밖으로 나가던 운석이 저격을 당했으니 말이다.

총회를 마치고 집에 가서 보니 그는 두툼한 요 위에 누워 있었다.

“이봐 운석, 명당을 썼구려!”

나는 농담 비슷이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내가 한 청년의 말을 슬쩍 받아넘겼더라면, 운석은 저처럼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남들은 그 바람에 국내외적으로 민주당과 운석이 상당히 선전되었다고 오히려 좋아들했지만, 내게는 두고두고 가슴에 박힌 못이 되었다.


뜨거운 잔 기울여 보세


4‧19가 왔고 우리는 난행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끝내 5‧16을 맞아 정권을 넘겨주고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5‧16 이후로는 접촉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혹 만나는 기회가 있으면 내게 입교하라고 권하면서 종교에 관한 책도 여러 권 보내 주었다.

그러다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엘 가 보았으나 ‘면회 사절’이란 표찰이 붙어 있었다. 나는 운석이 보고 싶었다. 정작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만나 보는 것이 건강을 해칠까 해서 돌아서 나오는데, 그의 비서가 나오며 나를 이끈다.

“면회 사절인데 내가 어떻게 들어가나. 들어가 봐도 서로 가슴만 아플 걸.”

거절을 해보았으나 나는 비서에게 안내되어 병실로 들어갔다.

“삼연이 오는구려!”

저만치 창가에 앉은 사람이 나를 보고 인사를 하는데, 나는 속으로 ‘아뿔사 이제 틀렸구나’ 싶었다. 나는 너무 초췌해진 그가 정말 운석인가 하고 한참 들여다보았으니 말이다.

“신문에서 보아 대강 짐작은 했네만 운석을 몰라보게 됐네.”

벌써 15년 전 총리실 뒷방에서 앓던 바로 그 병이었다.

“이젠 살 만큼 살잖았소.” 쓸쓸한 대답이다.

내가 병자와 오래 이야기할 수 없어 일어서려면 붙들어 앉히고, 일어서려면 또 앉히곤 했다.

몹시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가 떠나고 말았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내 이제 고인을 두고 무슨 말을 하리오. 다만 생전의 운석에게서 바라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좀더 과단성을 지녔다면 하는 것이다. 국가가 어지러울수록 그런 것이 필요하다. 운석은 난세의 정치가로서 좀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는 그의 소신대로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정치를 했던 것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이제 우리의 동지가 또 한 사람 갔다. 민주당이라는 것도 이미 자취를 감추고 당시 최고 위원 중에서 해공, 유석, 운석이 벌써 타계했고, 백남훈 씨와 나 둘만 남았는데, 이제 우리 둘만이 남아 누가 먼저 가야 할 것인가?

옛일이 생각날 때면 나는 술병을 들고 고우(故友)들의 묘소로 찾아가 회포를 푼다.

운석! 모쪼록 영생의 터전에서 편안키 바라며, 일후(日後) 우리 다섯 사람이 다시 만나는 날 뜨거운 잔을 기울여 볼까 싶구려. 그때가 언제쯤일 것인가.

운석! 명복을 비는 마음 간절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