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자취

운석 시대 7대 사건 - Ⅵ. 민주당 단명 내각

 운석 장면 박사 생존 시에는 하고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장 박사가 몸소 체험했던 가장 벅찬 정치적인 사건들을 사건별로 간추려 드라마틱하게 엮어 본다.

 픽션 냄새를 풍긴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실 위주임은 물론이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허위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기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치 비화를 추적하면서 해명키로 한다.

 이 운석 시대의 대사건은 원칙적으로 사건 발생의 순위이며,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운석 기념 출판회에 있음을 밝혀 둔다.


 

 1 


  참의원 의장 백낙준(白樂濬) 박사는 제2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윤보선 씨에게 무궁화 대훈장을 목에 걸어 주었다. 박수가 터졌다. 민·참 양 의원들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2 3층에 있던 방청객들도 제2공화국 대통령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윤 대통령은 미리 준비한 인사문을 약 5분 간 읽어 내려갔다. 이어 민의원 의장 곽상훈 씨가 등단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자유와 행복이 시작되는 날입니다"라고 전제하고, "대한 민국 만세!" 삼창을 선창했다.

  7·29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8월 8일 국회를 개원하고 제2공화국의 돛을 올려 자유라는 이름의 순풍을 받으며 역사의 바다에 배를 띄웠다. 8월 12일 윤보선 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기까지 정계의 항로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정계는 무서운 것, 내일의 안녕을 바라기 어려울 때가 있다. 풍랑을 만난 것이다. 바다가 일으킨 풍랑일까. 풍랑이 이는 쪽으로 키를 잘못 돌린 선장의 잘못일까. 총리의 지명과 인준으로 국회는 개원 벽두부터 열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17일, 윤 대통령은 뜻밖에도 구파인 김도연 씨를 지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가 111표, 부 112표, 무효 1표로 부결되었다. 이날의 법정 가결 과반수는 재적 의원 227명에 의해 114표이다. 이튿날 18일에 윤 대통령은 장면 박사에 대한 동의 요청서를 다시 국회에 제출하여 19일 하오 1시 본회의에서 표결했다. 조용한 가운데 진행된 투표는 1시 33분에 완료되어 곧 개표에 들어갔다. 이날의 법정 득표수는 재적 228명의 과반수인 115표였다.  곽의장의 음성이 낭랑하게 퍼진다.

  "가표 117표, 부표 107표, 기권 1표로 장면 씨가 국무 총리에 인준되었습니다."

  와! 의석과 방청석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만세를 부르는 소리도 여기저기에서 났다. 이로써 운석 장면 박사는 수십 년의 각고 끝에 이 나라 정치 무대에서 최고 영광의 좌에 오른 것이다. 


2


  그러나 영광된 장 박사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조각의 문제인 것이다. 총리 인준에서 고배를 마신 구파는 요직을 원했다. 그러나 국정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각파의 안배가 중요한 것이다. 고집을 피우던 구파는, 8월 21일과 22일 중앙청 조각 본부에서 밤을 새우며 요직 다툼을 하다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들 구파는 분당을 하겠다고 장 총리와 그의 측근에게 선언했다.

  그러나 23일 첫 조각은 완료됐다. 일반의 기대와는 약간 어긋난 것이었다. 신파 일색이었다. 농림과 문교에 무소속이 앉았다. 각 정당에서 비난의 화살이 퍼부어졌다.

  제2 공화국 수립 후 최초의 예산 국회가 되는 제37회 정기 국회가 9월 1 일에 그 막을 올렸다. 그러나 예산 심의보다도 초점은 항상 내각 편성에 있었다. 그리하여 장 내각에 불행한 첫 단계가 도래했으니 이는 9월 10일의 제2차 신 구의 연립 내각으로의 개각이 바로 그것이다. 제1차 조각 때에 구파는 5:5:2의 비율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선 바가 있었다. 그것이 이루어진 셈이었지만 벌써 갈라지기 시작했던 구파가 이로써 신파와 더불어 본래의 민주당으로 돌아갈 리는 만무였다. 그리하여 김도연계의 구파는 드디어 9월 22일 에 신당 발족을 선언함으로써 민주당 창당 이래 5년 동안 고질이 되어 오던 신 구의 대결은 드디어 그 파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4·19가 가져다 준 민주당의 비대가 빚어낸 결과이며 착잡한 정국의 난맥상을 드러낸 것이다. 


 3



  인준 당시부터 역경을 헤매던 장 총리는 그 쓰라림을 되새기며 밤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다. 12년 간 이 정권과 싸워 온 보람이 영광의 좌에 오르게 했지만 그것은 조금도 편안한 자리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평소의 장 총리는 서구적 자유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심고자 노력했었다. 그러기에 집권 시부터 그는 모든 것을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데모가 그치는 날이 없었다. 장 총리는 가슴이 아프기에 앞서 국민들을 따뜻이 감싸 주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 얼마나 그리던 자유였던가. 12년 간 이 정권하에서 억눌렸던 자유를 국민은 마음껏 누렸다. 그러기에 장 총리는 모든 데모를 막지 않았다.

  그러나 데모는 항상 평화스런 것은 되지 않았다. 10월 11일 이성을 잃고 흥분한 4월 부상 학생들이 드디어 국회에 난입하여 의사당을 점거하는, 제2 공화국 국회 첫 모독의 난동이 벌어졌다. 이보다 사흘 앞선 10월 8일 자유당 원흉들에 대한 판결이 의외로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검찰에서는 석방되었던 원흉들을 다시 구속하는 등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국에 다시 혼란이 야기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의장단의 사표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표는 표결에 의하여 부결되었다.

  이러한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장 총리는 민의원에서 "행정 수반으로서 책임을 느껴 의원 제위께 사과를 드린다"고 말하고, 이어서 "데모대가 4월 혁명을 성취시킨 의거 학생들이기 때문에 더 큰 혼란을 걱정해서 강권으로 막지 않겠다"고 자기의 소신을 밝혔다.

  그러나 그뿐이랴. 사회의 안녕 질서와 사회 복지에 헌신하고 봉사할 경찰들이 데모를 하는가 하면, 6 25의 상이 용사들이 처우 개선 문제를 들고 중앙청에 몰려오는 등의 소란을 피워 국민들의 빈축을 샀다. 이런 것을 모두 지켜 보고 있던 장 총리는 하루속히 국민들이 자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의 참모들이 강경론을 펴면 장 총리는 이를 일축했다. 왜? 그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독재의 억압 밑에서 싸워 왔으며 부통령 재직 시에 눈물겨운 천대와 박해를 받지 않았던가. 당해 보고 싸워 보지 않은 자가 어찌 그 심정을 이루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런 데다가 11월 8일, 드디어 구파에서 신민당을 발족시키니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해공과 유석이 타계하자 민주당은 이제 완전히 분열을 본 것이다. 


4 



  장 국무 총리는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우고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국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우리 나라가 아시아에 있어서 너무나 고립되어 있음을 위험시하여 외교 정책에 과감한 조처를 취했다. 대미 관계는 더욱 우호를 증진시켜 대한(對韓) 원조의 증가도 엿보이게 되었다. 8·15 이후 사실상 교류가 끊어졌던 한일 문제를 재검토하여 이 정권하에서 명목상의 한일 회담을 본격화시킴으로써 자유 한국의 위치를 보다 확고히 하게 하려 했다.

  그리하여 10월 25일 동경에서 한일 예비 회담을 개최했던 것이다. 국토개발 계획을 말하면 국토를 개간키 위하여 국토 건설단을 창단, 이를 적극화함으로써 안으로는 경제 제일주의하에 국가의 부력(富力)을 쌓았고, 밖으로는 우리 나라의 위치를 자유 세계에 뚜렷이 내세웠다. 뿐만 아니라, 불균형 상태의 환율을 천3백 대 1로 현실화하면서까지 경제 제일주의의 밑거름이 되게 했다.

  그러나 부작용 또한 없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남북한 문화 교류론을 들고 나와 집권자로 하여금 고민케 했으며, 한편 유엔에서는 북한 괴뢰의 조건부 초청을 가결함으로써 정부는 연일 밤을 새워 가며 구수 회의를 열어 그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장 총리는 용공적인 통일을 배격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또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여론화되고 있는 남북 교류론은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남북 교류론은 국민을 오도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정부로서는 중립론 또는 교류론을 적극 반대한다"고 밝혔다.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데모 규제법을 성안하기도 하고, 국회 안정 세력도 이미 구축되어 민주당이 수립한 신년도 예산을 집행할 단계에 들어갔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소위 '4월 위기설'이라는 것이 국민들간에 퍼졌으며, 정부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으나, '4월 위기설'은 말로만 그치고 말았다. 4월에는 정국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장 총리는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혼란한 현 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그러나 누가 뜻했으랴. 민주당 내각이 불과 9개월의 단명 내각이 되고 말 비극적인 운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