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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장면연구회

일본 정계의 제2공화국관 2 (정치가 小坂외상) - 高崎宗司


* 〔 〕안은 역주임. ‘일한’, ‘조선’ 등의 용어는 원문 그대로 두었음.
 

 

Ⅰ. 정치가 -  2. 小坂외상


 
1960년 7월 19일에 제1차 池田내각의 외상으로 취임한 小坂善太郞(1960년 12월 8월에 성립한 제2차 池田내각에서도 외상으로 유임하고 1962년 7월 18일에 퇴임.)는 일한회담에 적극적이었다. 小坂는 “외교면에서는 아마추어고 吉田茂 전직 수상의 직계인 만큼 吉田-池田외교의 ‘심부름꾼’이 되지나 않을까”하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각주:1] 그러나 이 시기 小坂는 일한관계에 관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8월 13일에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小坂는 그 날 중에 각료급 인물을 수석으로 하는 친선사절단을 한국에 파견할 것을 발표하였다.[각주:2] 그것에 대한 장면 민주당 최고대표위원(동월 23일에 총리에 취임.) 등의 반응은 “너무 이르다”는 것이었다.[각주:3] 외무부 장관이었던 정일형도 우리들은 시기상조라며 거부하였는데 그 뒤에도 “연거푸 수상 대신에 외무대신이 친선사절단으로 온다고 하”며 “그들이 사죄 사절단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들었”으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회상하고 있다.[각주:4]

 하지만 정일형이 일한 사이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는데 그 “해결의 절차에 관해 일치할 수 있을 만한 선을 찾아내기 위해 우선 수상 또는 외상 끼리의 회담을 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각주:5]
고 말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신정권이 발족하고 이들 정부 要路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일한관계 개선에 관해 적극적인 견해를 표명하신 것은 참으로 기쁘게 여겨진 바입니다. / 저로서는 이 기회에 일한관계 타개의 실마리를 열기 위해 윤 대통령을 비롯 한국 신정부의 要路에 계시는 분들을 만나 뵙고 친근히 일본 정부 및 국민의 경축의 뜻을 전달하는 것은 時宜適切한 일이라고 생각하오며 (중략) 서울을 방문키로 결정한 바올시다.”[각주:6]

 덧붙이면, 久世有三는 小坂에게 “하가치 사건이나 아이크 방일 저지에 의해 실추된 對米 신용의 만회가 된다”는 계산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각주:7]
또 평론가 藤島宇內는 이승만 하야 직후 매거더 주일 미국 대사가 岸내각에 대해 제의를 하며, “‘한국’ 신정권에 祝意를 보내라,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고려하여라, 재일조선인의 북조선에로의 귀국을 1960년 11월 13일을 기한으로 삼아 어떻게든 중지하여라 등 몇 가지 조항을 제시하였다는 사실이 있다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각주:8] 아무튼 미국에 대한 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8월 15일 小坂는 東京 駐日韓國代表部에서 열린 한국 독립 축하연에 출석하였다. 외상이 출석한 것은 전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각주:9]

 한국 민의원이 장면의 국무총리 지명에 동의한 9월 19일, 小坂는 “참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로서 재건에로의 第一步를 내디디기에 이른 것”을 ‘환영’하고 일한국교 정상화가 실현될 것을 희망하였다.[각주:10]


 한편, 小坂는 9월 6일에 스스로 방한하였다. 그리고 「도착 성명」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가장 친근한 이웃 나라로서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사이임을 믿습니다. 然이나 불행히도 양국 관계가 이러한 本然의 모습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몹시 유감입니다. / 다행히 한국 新지도자 분들이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앞을 내다보고 싶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우리로서는 깊은 감명을 받은 바입니다.”[각주:11]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모호한 ‘유감’의 의사표명마저도 後段에 의해 한층 희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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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귀국 시의 기자회견에서는 “일한 양국에 있어서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양국이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발전이야말로 공산주의에 대한 최량의 대책이다.”라고 말했다.[각주:12] 로스토우노선을 확인한 것이라 하겠다.

 
小坂는 제2공화국을 무엇보다 먼저 ‘日韓關係의 改善’을 지향하는 정권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1960년 12월 15일에 열린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小坂는 “9월의 6일에 京城으로 가서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 정 외무대신 등을 만났습니다만, 마음속으로부터 일본과의 우호친선을 진행시키고자 하는 기분을 갖고 계신 것을 느낀 바올시다.”라고 방한의 성과를 밝히고,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일한회담의 예비회담에 관해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오니 해가 바뀜과 동시에 本會談에 이를 이행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예측을 피력하고 있다.[각주:13]
 

 
또한 12월 20일에 열린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도 한국의 신정권은 舊 정권 즉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사물을 아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게다가 아주 對日친선이라는 것을 기초에 두고 문제를 다루고자 하고 있”으니 “竹島 문제에 관해서도 저는 이것은 합리적인 선에서 해결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각주:14]하고 낙관적인 전망을 말하고 있다.

 
일한회담 타결의 전망과 관련해서, 1월 15일의 『朝日新聞』이 민의원에서 야당의 질문에 대해 장면 총리가 “이승만 라인은 국제법에 위반하고 있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이것을 끝까지 관통해 가는 것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언명하였다.”고 전한 적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지 어떤가, 하는 질문이 나왔을 때도 小坂는 “저도 그 보도를 신문에서 읽으며, 아주 합리적인 기초에 서서 사물을 생각하는 장면 정부에 경의를 표한 바올시다. 따라서 그것에 관해서는 실은 문의를 해보았습니다마는 아무래도 이 점에 관해서는 쉽사리 言明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일한관계를 개선하자는 긍정적인 자세로 저쪽이 나서고 계신다는 점에 관해서는 이 기회에 되도록 양국의 관계 개선에 이바지하고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각주:15] 같은 로스토우노선을 채용하기 시작한 한국측의 사고방식․자세는 小坂에게 있어서 ‘합리적’이었다.

 
野田卯一를 단장으로 하고 田中角栄․田中竜夫 등을 단원으로 하는 자유민주당 제1회 한국방문 議員団이 1961년 5월 6일부터 12일에 걸쳐서 방한한 후, 小坂는 더욱 낙관적이 되었다. 5월 15일에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는 “경제적으로 양국이 협력관계를 갖게 될 전제로서 한국측의 민심이라는 것이 일본에 대해 오랫동안의 여러 가지 경위도 있어서 반드시 좋지는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이것은 커다란 요소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이번 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하여 이 점이 아주 풀려가고 있는 중이다, 아주 空気가 好転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는 경우에 유력한 뒷받침이 되리라는 것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올시다.”[각주:16]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여러 가지 경위’로 치부하였던 것, 의원단의 방한으로써 “이 점이 아주 풀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평가하였던 것 등은 小坂의 역사인식의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다.

 
5월 16일에 박정희 등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회 예산위원회에서 “이러한 정세를 미리 알기 위해 萬全을 기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하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小坂는 “혹시나하면 一周年에 못미치고 四月革命의 再來와 같은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염려는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겨우 이 위기도 극복하고 여러 가지 법률 관계의 것들을 정비해 가지고 바야흐로 경제관계의 개발이라는 일에 나서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기 때문에 이웃 나라인 우리로서는 一衣帶水의 땅이기도 하고 해서 가능한 한 한국경제의 伸長, 또 한국의 民生에 기여함으로써 우리들은 자유를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던 까닭입니다.”[각주:17]라고 답변하였다. 혹하면, 四月革命을 완성시키고 제2공화국을 군사쿠데타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보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지원하는 일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1. 무기명, 「発足した池田内閣 --低姿勢で総選挙準備に専心」, 『朝日ジャーナル』, 1960. 7. 31. 75쪽. [본문으로]
  2. 『朝日新聞』, 8. 14. [본문으로]
  3. 『朝日新聞』, 8. 15. [본문으로]
  4. 전게 논문. 275쪽. [본문으로]
  5. 『朝日新聞』, 8. 25. [본문으로]
  6. 『第三十五回国会衆議院外務委員会議録』제2호, 1960. 8. 31. 2쪽 [본문으로]
  7. 「小才の利く計量政治家․小坂善太郞」, 『エコノミスト』, 1960. 9. 27. 36쪽. [본문으로]
  8. 「『日韓交渉』の思想と現実」, 『思想』, 1961. 3. 131쪽. [본문으로]
  9. 무서명, 「すすむ日韓の人物交流 --李垠氏の帰国も実現するか」, 『朝日ジャーナル』, 1960. 8. 28. 77쪽. [본문으로]
  10. 『朝日新聞』, 1960. 9. 19. 석간. [본문으로]
  11. 『朝日新聞』, 9. 6. 석간. [본문으로]
  12. 상동, 9. 7. [본문으로]
  13. 『第三十七回国会衆議院外務委員会議録』제2호, 1960. 12. 5. 5쪽 [본문으로]
  14. 『第三十七回国会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제4호, 1960. 12. 20. 4쪽. [본문으로]
  15. 『第三十八回国会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제10호, 1961. 2. 13. 15쪽. [본문으로]
  16. 『第三十八回国会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제21호, 1961. 5. 15. 8쪽. [본문으로]
  17. 『第三十八回国会衆議院予算委員会議録』제22호, 1961. 5. 16. 2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