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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장면연구회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 3 - 경제정책의 기조 (2)


 민주당 정권이 경제제일주의를 지침으로 삼고 추진한 일련의 경제정책이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1961년 2월 장면 국무총리는 제1회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자신이 추진하는 경제정책의 기조를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이상 경정예산에 관련하여 중요 시책의 몇가지를 말씀드렸거니와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기조는 질서와 발전이라는 2대 명제에 귀착됩니다. 이 2대 명제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창안이 결코 아니고 다만 질서의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업의 지상명령이라고 하겠습니다.[각주:1]



 장면 총리가 말하는 ‘질서와 발전’이라는 2대 명제의 의미는 정치․사회적 안정을 통한 경제 발전의 추구를 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있어서 정치적․사회적 안정보다 더 긴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의견대립과 다툼이  ‘민주주의의 고귀한 모습’이지만  ‘상호간의 선의와 협조와 관용’을 바탕으로 질서를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우리는 장면 총리가 말하는 질서는 정치․사회적 측면 뿐만아니라 경제적 의미도 지니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경제의 발전이야말로 국민과 정부의 지상과업입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의 선결조건은 먼저 경제적 질서를 정돈하는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 자유기업주의에 있어서 자원 배분에 합리적 질서가 서는 것은 주로 가격기구를 통해서입니다. 실로 가격제도는 시장에서 표시되는 사회적 수요의 실세와 가용 자원과의 상관 관계를 자동적으로 반영함으로써 합리적인 경제정책의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신정부는 경제정책의 출발점으로 먼저 가격기구의 정상화를 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를 위하여 환율, 금리, 공공요율 등의 실세화를 단행하게 된 것입니다.[각주:2]



  이처럼 장면 총리는 질서를 경제적 차원에서도 고려했고, 경제질서를 정상화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로서 환율, 금리, 공공요금의 현실화 정책을 추진했다고 했다.

 
김영선 재무부 장관은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의 방향을  ‘경제 요소의 현실화와 경제 건설이라는 2대 支柱’로 설명하면서, ‘과거의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었던 비현실적인 모든 경제 요인을 현실화하는 것’을 ‘경제질서를 정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환율 현실화의 목표가 경제질서의 정상화에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부정과 부패의 근원을 제거하여 외환을 절약하게 함으로써 경제자립을 성취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하였다.[각주:3] 

 
위에서 보듯이 민주당 정권이 취한 환율, 금리, 물가의 현실화 조치는 자유기업주의에 입각한 경제질서를 정상화함으로써 부정부패로 특징지워지는 ‘특권적 경제’를 지양하고자 한 것이었다. 특권적 경제의 지양은 곧 산업 구조의 불균형 문제와 분배의 불공정을 극복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장면 국무총리는 1960년 9월 국회에서 행한 시정연설에 ‘과거 부패정권이 취해온 관권 경제와 불균형한 산업구조 등을 지향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면서, ‘환율 현실화’ 정책과 농어촌 진흥정책과 중소기업 육성책을 실시하겠다고 하였다.[각주:4] 말하자면 민주당 정권에서는 특권적 경제체제로 인한 부의 편재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농촌 경제와 중소 기업 육성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채택했던 것이다.[각주:5]  농촌경제 안정과 진흥을 위해서는 토지세를 금납제로 개정하고 농민의 조세 부담을 경감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중소기업 전담 금융기구 설립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각주:6]

 
특히 민주당 정권에서는 1961년 2월 6일 국무회의에서 중소기업진흥을 위한 「중소기업금고법안」을 의결했으며, 3월 14일에는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종합대책」을 의결하기도 했다.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종합대책」에서는 중소기업의 지도와 육성을 총괄하는 중소기업센터를 각도에 1개소씩 설치한다는 계획을 비롯하여, 중소기업협동조합의 창설, 중소기업 전담 금융기관의 설치, 중소기업경영합리화촉진법의 제정, 중소기업신용보험법 제정, 중소기업 제품 공동판매제 실시, 중소기업에 대한 조세 경감 조치 등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어 있다.[각주:7] 이처럼 민주당 정권은 경제 질서를 정상화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소기업의 육성을 중시했다.

 
장면 정권이 제시한 ‘경제질서의 정상화’는 경제 정책의 입안 및 추진 과정에서도 견지된 원칙이기도 했다. 장면 총리는 4월혁명의 과업은 민주주의적 방식과 절차를 통하여 해결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시간과 기술 상의 제약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각주:8] 민간부문의 자율적 활동과 그에 대한 정부의 유도 혹은 지원이라는 형식은 경제정책 수립을 위해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1960년 12월 15일부터 19일까지 서울에서는 경제계, 학계, 언론계 지도자 및 각 지방의 유지 등 250여명에 이르는 전국의 인사들이 모여 종합경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7개의 분과로 나뉘어 분과별로 정부에 건의할 경제정책을 제시했다. 이 때 채택한 「경제발전을 위한 대정부 건의」는 218쪽에 달하는 방대한 문서였다.[각주:9] 

 
이 종합경제회의는 정부가 주도하여 개최한 전국 규모의 경제회의로서는 최초이며, 민간의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하여 정부의 정책에 반영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각주:10] 이 회의를 계기로 장면 정부와 민간 기업인간의 협력 체제는 보다 더 공식화되었다. 즉 1961년 1월 10일에는 경제계 인사 70여명이 회합하여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를 창립하였다. 한국경제협의회의 발족은 장면 정부와의 유기적 협조 하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 또 협의회가 장면 총리 집무실이 있는 반도호텔에 위치함으로써 정부와 협의회 인사들간의 자연스러운 협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국경제협의회 발족시 장면 총리는 축사를 통해 정부 정책의 잘못이 있으면 기탄없이 지적할 것을 당부하면서 협의회와 정부의 상호 협력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할 것을 역설했다.[각주:11]  당시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경제개발계획 입안에 참여하고 종합경제회의 간사를 맡았던 김입삼은 장면 정권기의 민관협조체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사농공상의 질서가 엄격했던 한국 역사 상 ‘士’로 상징되는 관료 집단과 ‘工商’으로 상징되는 기업가들간의 협조체제가 이 시절만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적은 없다고 본다. 바로 민간 創意의 시장경제가 막 꽃피려는 시기였다.[각주:12]



  종합경제회의에서 집약된 경제정책에 대한 민간측의 의견은 장면 정권과 그에 뒤이은 군사정권에 의해 대부분 채택되어 시행되었다.[각주:13]
이 점에서 경제정책 수립을 위해 여론을 수렴하기 위한 절차는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정책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건의된 정책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경제행정기구개편 분과위원회에서 제안한 ‘경제계획원의 설치’와 ‘부흥부의 건설부로의 개편’ 제안이었다.

 
경제정책의 체계성을 확립하기 위한 중앙 부서의 설치는 경제정책의 ‘질서’를 수립하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질서의 정상화’를 정책 기조로 내세웠던 장면 정부는 이러한 건의를 수용하여 중앙기획기구를 만들기 위한 ‘정부기구개편소위원회’를 설치하였다.[각주:14] 뿐만아니라 경제정책 기구로서 변희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경제위원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 『한국재정40년사, 제1권』, 394쪽. [본문으로]
  2. 위의 책, 393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395~396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385쪽 [본문으로]
  5. 『국회사』 제37회 정기국회, 5대 국회, 117쪽. [본문으로]
  6. 위의 책, 382쪽. [본문으로]
  7.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종합대책」(1961), 『한국경제 반세기 정책자료집』(한국개발연구원, 1995), 196~197쪽. [본문으로]
  8. 『한국재정40년사』, 392쪽. [본문으로]
  9.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경제발전을 위한 대정부건의」(1960. 12.) 한국개발연구원 소장 [본문으로]
  10. 『한국경제 반세기 정책자료집』, 195쪽. [본문으로]
  11. 김용삼, 「김입삼의 경제개발 비사」, 『월간조선』 1999년 4월호, 411쪽. [본문으로]
  12. 김용삼, 위의 글, 403쪽. [본문으로]
  13. 유광호, 「장면정권기의 경제정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5 - 1960년대의 전환적 상황과 장면정권』(오름, 1998), 158쪽. [본문으로]
  14. 조갑제,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생애,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 368회, 『조선일보』 1999년 1월 21일자. 위원회는 재무부 예산국장 이한빈, 부흥부 기획국장 이기홍 등 4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간사는 정재석이었다. [본문으로]